간절함은 이미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텐데, 나까지 그 긴장감에 추를 더 올리고 싶지가 않다.
아이가 나를 만나는 잠시만이라도 마음을 좀 쉬었으면 하는 바람이 더 크다.
고민하다 한옥 레스토랑을 예약한다. 한옥은 그 자체가 주는 아늑함과 휴식이 있다. 많이 먹을 아이를 위해 다섯 가지 메뉴를 주문하니, 세 분 아니신가요 묻는 직원에게 "제 아들이 많이 먹어서요"하고 대답했다.
먼 길 떠나기 전에 든든히 먹이고 싶은 엄마의 마음 같았던 것도 사실이다. 아이를 배불리 먹이며 시험 잘 보라는 얘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만,
"욱아, 이모가 내일 전쟁 나라고 기도해줄게."하고 아이의 긴장을 함께 나눴다.
카페에 가서 상큼한 애플파이와 따뜻한 밀크티로 아이의 마음을 데우며 한마디를 더 전했다.
"욱아, 시험 따위에 쫄지마."
기초학력을 쌓는 초등 6년, 고등교육의 밑거름을 다지는 중등3년,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하는 고등 3년. 12년을 달린 최종 평가가 단 하루에 치뤄진다.
26년 전 내가 수능시험을 치르던 날을 떠올려본다. 팽팽한 긴장의 끈 위에서 줄타기를 한 하루. 모든 시험을 마치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천천히 걸었다. 해거름 녘 운동장은 노을이 물들고 있었고, 나는 가방을 메고 터벅터벅 그 길을 걸었다.
'드디어 끝났다 야호'하고 환호가 나올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이게 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하루를 위해, 이 시험을 위해 12년을 공부한 거구나' 왠지 모를 눈물이 흘렀다. 시험지 종이 몇 장에 모든 것이 결정 나다니. 그간의 애씀, 마음씀의 시간들이 너무나도 애틋해 눈물이 흘렀다. 등 진 고사장이 멀어져 가듯 12년의 시간이 막을 내렸다. 그날의 허탈함을 아직도 기억한다.
<수능이 지나고>
분주했을 아침 시간을 피해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카는 아침으로 불낙죽을 먹고 갔다고 한다.
아니 불, 떨어질 락의 불낙죽. 그만 웃음이 나와버렸다.
그 깊고 깊은 간절함이 명치에 와닿았다.
언니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니 너무 짠해 눈물이 나더란다. 그 마음이 전해져 같이 눈시울을 적셨다. 그리고 뒤이어지는 어미의 자책. 좀 더 잘해줄 걸, 기도도 더 열심히 할 걸... 시험장이 아닌 곳에서 긴장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어미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 기도와 미안함이 가득한 시간을 맞는다. 절대 자책하지 말라고 충분히 최선을 다했다고 위로하며 전화를 끊었지만, 줘도 줘도 부족한 것만 같은 부모의 그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나도 먼발치에서 '우리 욱이 마음 단디 붙들어 매라'하고 화살기도를 한다.
오후 4시 40분, 모든 고사가 끝났다.시간 여유를 두고 인터넷 기사를 먼저 검색해본다. 올해 수능은 불수능은 아니지만 물수능도 아니라고 한다. 적당한 난이도였던가 보다.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욱이 힘들었다 하지 하고 묻는데, 언니 목소리에 힘이 없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해서는 안될 것 같아 전화를 끊으려 하다 한마디만 전한다.
"언니, 속상해도 힘 빠진 모습 보이지 말어. 애 속상해."
반인생 지나고 보니 한 고개 한 고개가 나를 키워왔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게 되고, 길은 또 다른 길로 이어진다. 어제 간 고성 바닷가가 떠오른다. 파도는 밀려오고 하얀 포말로 부서지고, 또 파도가 밀려오고 하얀 포말이 부서지고 또또또...
그 모습을 보고 해변에 앉아있자니 쉬이 자리를 뜨지 못했다.
밀려오고 또 밀려오는 새로운 파도를 맞을 때마다 태엽이 감기는 시계처럼 처음으로 돌아가 처음의 반복인 것만 같았다. 그렇게 바다에는 끊임없는 끝과 끊임없는 시작만이 있었다.
시험을 잘 치뤘든 못 치뤘든 그 파도는 하얀 포말로 부서지고 새 파도와 새 시작이 찾아온다. 그것은 확실하다고 바다가 들려주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대양처럼 길고 긴 시간, 모든 순간은 하나의 점일 뿐이다. 성공도 실패도 점에 불과하다.
파도는 바다의 점에 불과하다. 하지만 바다가 존재할 수 있었던 건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처럼 생의 진실은 '멈추지 않는 것'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우리 삶에 숱한 점들이 파도처럼 밀려와도 멈추지 않고 나아간다면 새로운 길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