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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성 Aug 20. 2023

비 온 뒤 갤 땅

주체성 회복이 필요한 때


2005년 10월 16일, 나는 결혼이라는 것을 다.

그렇다. '결혼이라는 것...'

그 당시 나는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었다.

결혼=?

이 질문에 도통 답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혼에 대해 내가 가진 정보는 현실 드라마(부모님과 친척을 비롯한 내가 아는 주변 기혼자들의 삶)와 TV 속 드라마에서 간접경험한 것이 다였다. 결혼 앞에서 나는 철저히 3자적 관객시점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남은 인생을 담을 그 세계는 연극 무대 같은 느낌이었다. 내 것 같지 않고 낯선, 그러나 내 역할이 분명히 있는, 그래서 역할이 주는 의무에 충실해야 하는.

모범생 딱지가 제법 어울리는 삶을 살아온 나로서는 그다지 무서울 것도 없었다. 주어진 일을 해내는 건 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해내야 하는 일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어쩌면 좀 버거울 수도 있겠구나 하고 처음으로 직감하게 된 건 이 말 때문이었다.


결혼 직전 명절이니,
이번 추석은 와서 같이 보내도록 하자.
집안 어른들께 인사도 드릴 겸...



결혼 후에는 명절에 며느리라는 직함을 달고 시댁에서 일을 많이 해야 다는 것쯤은 드라마 속에서 보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결혼 전 명절은 친정에서 의미 있게  보내고 싶던 터였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답했다.


결혼 직전 명절이니,
이번 추석은 친정에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낯선 어른들이 풍기는 어딘지 위압적인 분위기, 며느리 심사대 위에 올라 평가받는 듯한 기분. 앞으로 만날 상황이 대략 그러하리라는 것을 모르던 그때는 합리적이고 당당한 사고를 주장할 수 있었다.

'이지 말라'는 세상을 맞이할 사람 치고, 나는 여전히 '나'였다.


공부하고 직장 다니고 사회생활 하고. 그때까지의 내 삶과 남편 될 사람의 삶에 다름이 없는데, 존재감과 역할은 다르게 부여되것에 대한 반발이 일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그래서 합리와 공정, 정당성의 권리를 주장하던 때가 있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그러려니...'라는 체념이 나의 8할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가벼운 일에는 따지고 들 수 있으나 근본적인 존중이 필요할 때는 그러려니 체념하게 된다. 바닥에 뜯어놓은 남편의 발바닥 각질에는 '당신이 치워'라고 말할 수 있지만, 연년생 아이 둘의 홀로 육아가 버거워 도움을 요청하면 남자가 사회생활하는데 방해한다, 남편의 외도에는 남자들은 한 번씩 그러기도 한다라는 반응 앞에 놓이게 된다.


살림이 뭐 하는 건지 알리 없고, 아는 음식 레시피 하나 없고, 빨래 개는 법, 옷 다리는 법, 설거지하는 법 등 뭐 하나 해본 적이 없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여기 다리면 저기 구겨지고, 저기 다리면 여기 구겨지는 와이셔츠를 놓고 40분 동안 쩔쩔매며 다리다 울 뻔했던 시절.

내 일에만 집중하고, 내 문제만 고민하고, 내 미래만을 생각고, 발라드 노랫말 같은 연애를 하고, 꾸미고 치장하는 게 당연하고, 주는 사랑보다 받는 사랑이 익숙하고, 챙기기보다 챙김을 받는 시간이 당연했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그런 과거 없이 나는 줄곧 지금의 모습이었던 것으로 인식되는 상황을 겪을 때마다 가슴 한켠이 찡해온다. 예쁜 거, 좋은 거, 맛있는 거, 분위기 있는 거, 낭만에 취할 수 있는 거, 예뻐 보이고 싶은 거, 사랑받고 싶은 거 모두 그대로이다. 그 마음은 그대로이다. 다만 지경과 외모만 달라졌을 뿐.


삶의 한정된 시기에 주어지는 특권이 있다. 그때는 그것이 한정된 것이라는 걸 몰랐다. 잔잔한 파도 뒤에 오는 큰 파도가 모래톱을 깊이 파헤치고 지나가면 그 후의 땅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새 세상이 시작된다. 그때 알았다면 더 많이 즐기고 더 많이 기억하고 더 많이 누렸을 것을. 그리고 나를 잘 지켜내기 위해 더 지혜롭게 대처했을 것을.

이제야 알았다. 모든 일을 시간이 다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내 삶의 궤도는 내가 일궈가야 한다는 것을. 인간은 무의식적 이기성이 있기에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않으니 내가 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기다린다고 변화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체념과 반비례를 이루기에 바닥을 치고 있는 주체성을 이제라도 회복하려 한다. 그리고 내 딸은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도울 것이다.

바닥을 쳤으니 올라갈 때는 내가 조율해 오를 수 있다.


내 말이 힘을 가지고 전달될 수 있도록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는 입체적 사고,
감정 통제, 지혜를 연습해갈 것이다.
더 나은 내가 돼서 더 좋은 환경을
주체적으로 이뤄갈 것이다.
싸움이 아니라 옳고 그름의 분별 있는 지혜로 부드러운 투쟁을 하는
성숙한 중년의 삶을 보내도록 하겠다!


지금 나는 이런 다짐을 하고 있다.

내가 연해지는 세월이 내게 가르친 부분이 다짐 속에서 보이기도 한다. 나 위주였던 세계관에 너를 위한 공간을 마련해 둔다는 것이다. 내가 흐려지는 과정은 통증을 수반하기도 했지만, 겸손과 상호존중을 배울 수 있는 가치로운 성장기이기도 하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떠오는다. 뜨거운 햇살, 갖가지 벌레와 싸우는 시간을 거쳐 늘어가는 결실인 이삭의 무게를 견뎌낸다. 알곡이 많을수록 더 큰 무게를 감당할 줄 알아야 한다. 그 무게와 고충을 이겨낼 만큼 힘을 키우고서 고개 숙여 가만히 가을을 기다리는 것이다. 나와 너를 함께 세우는 건강한 주체로 세상에 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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