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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조 Jan 17. 2022

작은 비밀

바람이 불고, 나는




세상의 외곽으로 쫓겨나는 바람에 빗 속에 놓여 오래 젖다 보면, 다른 존재에게 받는 위로가 마냥 즐겁다고는 할 수 없다. 생각이 많아지고, 그러다 보면 찡그림이든 경련이 일어나는 억지웃음이든 둘 중 하나로 줄다리기를 하며 상대를 대하게 되므로.


지금은 안다. 대화를 하느니 차라리 처박혀서 초를 켜 놓고 명상을 하겠다는 오랜 친구의 말이 더 와닿을 줄이야. 누가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잘 믿는 거야? 할 말이 없었다. 그렇지, 따지고 보면 그랬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에는 호기로움이 있었다. '떠나도 괜찮아, 나는 너의 친구로 남아 있을 테니 돌아와' 같은 불굴의ㅡ혹은 멍청한 사명 같은 그런 배짱. 그냥 좋았다. 그들은 내게 지적인 대화와 상실을, 미움과 사랑을, 존경과 애환을 던져놓고 일순 사라지거나 반쯤 변한 얼굴로 곁을 지킨다. 모든 것이 시간 속에 쓸려간다. 그 잔해가 아직도 깊이 남아있지만, 이미 사진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얼굴도 몇 있다. 그러니 자연스레 말을 아끼고, 믿음은 한 스푼씩 덜어내는 것으로 위안한다.


이제는 같은 곳을 바라보다가 한쪽이 제 풀에 꺾이는 관계에는 망설임 없이 '과거' 혹은 '지나치는'과도 같은 이름을 붙여야 함을. 그래야 그 상대의 내일이 어찌 되든 나는 다시 나아갈 수 있음을. 비가 오지 않아 빗소리를 틀어놓고 노트북 앞에 앉아 생각하건대, 의미는 주고받기 나름이다. 나는 언젠가, 서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친구이자, 상서로운 시절을 함께 나눈 동료이고, 당신의 현재를 함께하는 누군가로 존재할 뿐.


삶에서 따뜻한 인간관계만 한 멋진 자극은 없다. 아니, 사실 살며시 흘러와 나를 뒤흔들고 꼬집어대는 자극은 그보다도 많지. 고양이처럼 다가와 누군가 만든 생채기도 여전히 내 손등 위에 가득하다는 게 증거고.


그러나 당신에게만큼은 내 어깨를 내어주고 싶다는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하나는 지켜주고 싶다는 이야기. 당신만큼은 '지나쳤네', '놓쳐버렸네'와도 같은 하릴없는 수식 없이 평생 현재만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욕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함께 서 있고 싶다는 내 축축한 마음. 그 마음속에 자리 잡은 어떤 비밀보다도 큰 바람.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믿느냐고? 마음이 너무 약해 큰일이라고?

아니야, 나는 그렇게 질문하는 너만 믿고 있지. 그래, 사실은 오롯이 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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