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는 오래전에 알게 된 친구와 술을 마셨다. 날은 추웠고, 사람들은 제각각 내가 정확히 알 수 없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 술집에서 너무나 오랜만에 만난 그 친구는 나와 성별은 같으나 국적은 전혀 다른 외국인이다.
결혼 이후, 나는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물음표나 느낌표를 정확히 던져오고 있건만, 그 친구 또한 내 의견에 공감하는 중이었다. 미국에서 온 그녀가 내게 보여준 신의는 놀랍고, 내가 한국에서 오래 만나온 친구들이 보여준 면모는 새롭다. 글쎄, 내 결혼식에 오지 않아도 좋지만 건강하다는 연락 정도는 줘야 하지 않겠니? 같은 나의 생각.
오랜만에 거나하게 술을 마시며 일터 이야기를 하고, 그 친구 또한 바뀐 학교에 적응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그 순간들이 사실 얼마나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들인지 나는 알고 있는 터였다. 비록 우리는 그날 목소리 크기라도 겨루듯 깔깔대다 내 신혼집에서 지쳐 쓰러졌지만 값진 시간이었다. 결혼식 이후 별 다른 일은 없다. 분명하게도, 장소만 바뀌었지, 사람들은 바뀌지 않을 거라는 무시무시한 예감을 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선배들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어느 정도 정리는 되더구먼요. 암.
우정, 사랑, 가족, 타인. 이 네 가지 단어 중에서 '타인'이라는 단어를 가장 매력적이게 여기던 순간이 있었다. 아마 지금보다 어렸던 20대 초반이었던 듯한데, 그 당시에는 모르는 타인의 평가에 절절매고 자존심까지 내걸었으니 할 말 다했지. 저 애가 네 이야기를 한다더라, 그렇다더라, 저렇다더라. 하등 쓸모가 없는 논쟁임에도 내 시간과 사력을 다 하던 그런 순간이.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쯤 되자 제대로 성립될 관계의 깊이란, 적어도 서로를 위해 서로의 입장을 사유할 수 있어야 하는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아무렴, 용기가 생겨 결혼이라는 제도를 내 인생의 카테고리로 불쑥 밀어 넣었듯, 꼭 새로운 사람이 아니더라도 알고 있던 지인이, 친구가, 혹은 가족이 새롭게 보이는 경험도 했던 것이다.
남편이 항상 자기 전에 이야기해 주기를, '그 사람과 보낸 시간'을 믿게 된다는 것이다. 점점 말수는 줄어들고, 믿을 수 있는 영역이 좁아지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과 보낸 시간들이 주는 견고함을 믿는다고. 나 또한 3년에서 4년으로 접어드는 이 시기,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서로의 집을 오가며 음식을 해 먹고 영화를 볼 우리의 시간들을 믿는다. 그리고 그 둘은 이제 부부로 바뀌었다는 것 정도인가.
관계란, 더불어 그 관계가 주는 믿음은 사람을 성실하게 만들고, 더 좋은 사람이 되게끔 움직이도록 만든다. 감아놓는 태엽이 있는 시계를 쓰는 사람이 요즘은 몇 없지만, 여전히 그 감성을 사랑하고 또 그 느낌을 공유하고 싶은 사람은 결국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처럼.
어렸을 때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지금의 나는 '관계를 잘 맺는' 어른이고 싶다.
외국인 친구가 헤어지기 전, 환한 아침에 들려주었던 말이 생각난다.
'네가 너무 좋은 사람이라, 나는 세상이 날 상대로 몰카를 하냐고 우리 엄마에게 물었거든. 그랬더니 너도 그 친구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면 되지 않겠냐고 했어.'
과연, 그럴 만한 사람인가, 나는? 어찌 되었든 관계에 대한 정의를 갈구하는 사람임은 분명한 듯하다. 그게 날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주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매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