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 다름을 인정하자. 그것도 삶이다.

<유딧>

by Jin


5년간의 대기업 생활을 그만두고 파리에서 박물관 가이드로 일할 때의 일이다. 그날도 프랭클린 루즈벨트 역에서 스무 명가량 되는 손님들을 모시고 루브르 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은 집중력을 요하는 곳이기도 하고 붐비는 인파를 피하려면 오전에 가는 편이 용이하다. 약 2시간 반 가량의 투어를 마치고 작별인사를 하는데 항공사 승무원으로 추정되는 분께서 내게 다가와 조심스레 물으셨다.


“혹시, 승무원 아니셨어요?”

내가 그녀를 알아보듯, 그녀도 나를 알아봤다.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냥 그런 분위기랄까 느낌이랄까 뭐 그런 게 있는 모양이다.

“그랬었죠ㅎㅎㅎ”

너무 놀란 표정, 정확히 말하면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말투와 얼굴로

“그런데 어쩌다가........ 여기까지.......”


그녀의 말인즉슨 ‘아니 그 좋은 직업을 그만두고 어쩌다가 여기까지 흘러왔냐...’ 뭐 이런 투였던 것 같다. 순간 웃음이 빵 터졌다. 이해 못하는 그녀가 너무 이해가 가서였다.


한때는 나도 매체나 주변을 통해 소위 불안정한 삶을 보면 ‘아니 왜.....’, 혹은 ‘왜 굳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각자 나름의 이유와 사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나보다 못하다고 해서 혹은 잘났다고 해서 업신여기거나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저 다름을 인정할 뿐이다. 너와 내가 다를 뿐이다.

“승객 앞에 섰을 때 보다, 작품 앞에 설 때가 더 행복해서요”

루브르에서 만난 옛 동료의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이었다.


이번 챕터에서는 같은 주제이지만 화가에 따라, 시대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해석된 작품을 소개하려 한다. 바로 유딧 시리즈이다. 유딧은 구약성서 외경에 나오는 영웅호걸로 이스라엘의 부유한 과부였다. 조국 이스라엘이 위험에 처하자,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아시리아의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할 계획을 세운다. 며칠 후 그의 연회에 초대되고 술에 취한 홀로페르네스의 침소에 들어가 적장의 목을 칼로 두 번 내리친다. 다음날 유딧은 적장의 머리를 성벽에 내걸었고 당황한 아시리아군은 퇴각하고 만다.


이러한 유딧 이야기는 회화의 소재로 무수히 많은 화가들에 의해 재현되었다.


페미니스트, 한 맺힌 절규

르네상스 이후 화가의 위상은 점점 올라가고 있었지만 그것은 남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제 아무리 뛰어난 재능이 있다한들 여성으로서 직업화가가 되는 길은 매우 험난했다. 그런 점에서 17세기 여성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탈레스키(1593-1652)는 탄탄한 실력으로 자신만의 위치를 확립한 화가이다. 그녀의 유딧은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아 명암의 대비가 매우 강렬하고 극적이다.


특히 미술사에서 페미니스트의 원조로 여겨지는데 작품을 보면 남성화가의 유딧처럼 야리야리한 미모의 여성이 아니다. 그녀의 팔뚝은 남성의 목을 베기에 충분히 굵고 힘 있어 보인다. 매우 끔찍하고 무서운 일을 저지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망설이는 표정이 아니다. 오히려 결의가 차있다. 시중드는 여인도 적극 가담하여 이제 막 적장의 목을 베고 있는 순간이다. 그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사방으로 튀고 흰색 침대보에 붉은 피가 주욱 흘러내린다. 홀로페르네스는 이미 자신의 목에 칼날이 반쯤 들어가 있어 아무런 저항 없이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힘없고 무기력한 표정이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딧> 아르테미시아 젠탈레스키. 1620년경. 우피치 미술관

어쩌면 이 작품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여성의 고통과 저항의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젠탈레스키가 여성화가라는 점과 그녀 개인 사정으로 인해 화가의 감정이 강하게 들어가 있는 듯하다.


젠탈레스키는 화가인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그림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남달랐다. 이러한 딸을 위해 아버지는 자신의 동료 화가 타시에게 딸의 그림 수업을 부탁한다. 하지만 난봉꾼이었던 타시는 어린 제자에게 흑심을 품고 그녀를 겁탈한다. 젠탈레스키는 그를 고발했고 기나긴 진흙탕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재판은 그녀에게 불리한 쪽으로 흘러갔고 오히려 온갖 고문과 거짓 진술을 강요받아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양심적인 증인이 등장해 타시에게 6개월의 유죄 선고가 내려진다.


이러한 사건이 있은 후 그녀가 그린 첫 번째 작품이다. 작품 속 유딧의 얼굴은 화가 자신의 얼굴로,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은 스승의 얼굴로 그렸다. 이러한 사정을 알고 나니 다른 화가들의 유딧과는 다르게 그려진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녀에게 유딧은 목숨 걸고 나라를 구한 애국자나 성서 속의 여인이 아닌 남성 위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과 그 속에서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자 하는 한 맺힌 여인의 절규를 그려낸 것이다.



남과 여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딧> 카라바지오. 1599년경. 로마 바르베리니 궁


<베툴리아로 돌아가는 유딧> 산드로 보티첼리. 1472년경


반면 카라바조의 유딧은 젠탈레스키의 그녀와 느낌이 사뭇 다르다. 두 작품 모두 침대에 알몸으로 누워있는 적장의 목을 베고 있기는 하나, 유딧이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럽다. 과연 그녀가 남자의 목을 온전히 벨 수 있을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칼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과 팔은 오이 한번 잘라본 적 없는 듯 가냘프고 매끈하다. 그런 그녀를 위해 홀로페르네스는 내리치기 편하도록 자신의 목을 대주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의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도 영 어색하다.

그녀의 표정은 또 어떤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냥 매우 끔찍하고 겁먹은 얼굴이다. 옆에 자루를 들고 있는 노파는 주인공의 미모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등장한 것처럼 보인다. 카라바조의 작품으로 보아 유딧은 분명 젊고 아름다운 미모의 여성이었던 듯하다.


보티첼리의 유딧도 다르지 않다. 그의 유딧은 이미 일을 마무리하고 성을 빠져나와 베툴리아로 돌아오는 길이다. 하늘하늘한 원피스에 한 손에는 올리브 가지를 들고 살랑거리며 돌아가는 모습이 보티첼리 역시 여느 남성화가처럼 그녀의 미모에 주목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카라바조의 극적인 장면보다는 이야기의 줄거리를 전달하고 있다.


팜므파탈, 뇌쇄적인 여인

<유딧 1> 구스타브 클림트. 1901년. 빈 빌베데레 미술관


<유딧 2> 구스타브 클림트. 1909년. 베네치아 국립현대미술관

19세기에 그려진 클림트의 유딧은 앞선 작품들과는 느낌이 정말 다르다.

클림트는 남성화가이긴 하지만 그녀의 미모에 주목한 것 같지 않다. 극적인 장면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외경의 이야기에 나오는 여걸의 모습은 더더욱 찾을 수 없다.

<유딧 1>은 속살이 훤히 비치는 시스루룩에 왼쪽 가슴은 아예 훤히 드러냈다. 잔뜩 달아오른 볼과 게슴츠레한 눈은 섹시하기까지 하다 <유딧 2>는 좀 더 노골적이다. 짙은 화장에 양쪽 가슴을 모두 드러낸 여인의 시선은 알 수 없는 곳을 향하고 있다. 가늘고 긴 그녀의 손가락은 자신의 음부를 가리키고 다른 한 손에는 홀로페르네스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있다.


클림트의 유딧은 그야말로 ‘팜므파탈’이다. 그는 적장을 유혹하는 유딧, 즉 남성을 유혹해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인 여인이다.

나라를 구한 여걸 유딧이 남성을 유혹하는 뇌쇄적인 여인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지금까지 각기 다른 시각을 가진 작가들의 작품을 살펴보았다. 모두 동일한 역사 속 인물을 그린 작품이다. 하지만 전혀 동일인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같은 인물을, 더군다나 성서 속 인물을 이렇게 다르게 표현했다고 해서 ‘누구의 작품은 틀렸고 누구의 작품이 옳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예술의 다양성과 독창성이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 삶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하게 표출된다. 가까운 이의 죽음, 출산, 결혼, 이별, 해고... 등등 무수히 많은 일을 겪고 사는 우리는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대처하며 견뎌낸다. 누구의 방식은 옳고 어떤 방식은 잘못됐다 할 수 없다.

동일한 인물이 화가의 인생과 관점이 투영되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지듯 우리 인생도 각자의 기준에 맞게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 각자는 다름을 그저 인정하고 받아들일 뿐이다.

작품들이 저마다의 매력이 있듯 우리의 생각과 관점은 모두 다름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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