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이 있는 주였다. 매번 그렇지만 이번에 더욱더 지역구를 위한 구호는 없고 오로지 다른 당을 비난하는 문구들로 홍보물이 가득하다. 뭔가 좀 기대를 안고 홍보물을 보던 나는 그저 눈살이 찌푸려졌다. 발전적인 내용은 전혀 없이 내가 말하는 건 옳고 네가 말하는 건 틀리다고 얘기하는 후보자들만 있었다. 다르다와 틀리다의 차이는 모두가 잘 알며, 다른 것을 인정하며 살아가자라고 하지만, 막상 현실에 부딪혀 보면 그렇게 되지 않는 것 같다.
세상은 단순하지가 않은데 정치구호를 보면 무척이라 세상은 단순해 보인다. 한쪽은 친일파 매국노라는 프레임으로 상대방을 공격하고 다른 한쪽은 좌파 빨갱이란 단어로 상대방을 정의하며 몰아가는 세상이다. 정치는 자신의 메시지를 단순하게 하여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 거라고 하던데, 이러한 화법이 사람들을 오히려 세상을 단순하게 보게 만드는 거 같다. 특히나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에선 글 하나 잘못 적었다가는 순식간에 어느 한쪽으로 몰려 비난을 받는 그러한 일들이 벌어진다.
얼마 전엔 건국전쟁이란 영화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 넷상에선 격한 논쟁이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어떤 이에게는 공산화가 될 뻔한 나라를 지켜낸 사람으로 보일 것이고 또 어떤 이에겐 그저 노욕으로 자신의 정권의 안정만을 추구했던 독재자로 볼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나의 삶을 살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의견과 평가는 극명하게 갈리는 것이 사회이다.
이승만의 삶을 조금 더 예시로 들어보자면,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교포들 상대로 독립운동을 펼쳤든, 아니면 사실 독립운동을 가장한 자신의 밥벌이 사업이었든 우리가 그 속마음을 알 수는 없을 것이고, 한국전쟁 이후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던 그의 모습 속에 진짜 나라를 걱정해서 독재의 길을 걸었든, 아니면 그저 권력욕에 취해 그 자리를 내려오지 않았던 다른 사람들은 그 속마음을 알 수는 없겠지만, 결국은 이승만이란 사람도 그의 자아의 욕구를 위해 그 길을 걸어갔을 것이다.
그 진위야 이승만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삶을 살았던 것인데 그 이승만으로 인해 혜택을 받았던 사람, 그리고 그 이승만으로 행적이 지금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탄탄하게 해 준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승만의 업적을 찬양할 것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이승만을 비난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얘기를 소수의 인원이서 토론을 하게 되면 어느 정도의 타협안을
영화 암살에 보면 배우 이정재가 놀라온 연기로 친일파를 연기했었다. 이정재가 법정에서 자신을 대변하던 연설장면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안 본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이정재는 그저 자신의 안위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부하들을 팔아넘겼을 것이고, 그로 인해 여러 친일파들이나 일제 관료들은 그러한 이정재의 친일 행각으로 인해 크게 만족했을 것이다. 반대로 이정재의 그러한 행동은 다시 독립을 추구하였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나 일반 대중들에겐 그야말로 씹어먹고 싶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이정재의 행동이 지금의 기준으로는 용서받기 힘든 모습이었지만, 그 당시 일제강점기를 인정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에겐 오히려 아무런 희망도 없는 독립이라는 망상에 빠져있던 독립운동가들이 오히려 사회에 혼란을 가져오던 단체로 인식했을 수도 있다.
미중관계가 점점 격화되는 요즘이다. 얼마 전 인터넷상에서 이러한 글을 읽었다. 지금 세계가 미국이 패권을 잡은 세계여서 너무 다행이다.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나라가 패권을 잡고 있었다면 어떤 세상이었을지 끔찍하다란 글이었다. 거기에 수많은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했고 결국 감정싸움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결국 글쓴이의 논리는 미국의 논리는 ‘선’이고 중국과 러시아의 논리는 ‘악’이란 생각에서 시작한 글이었다.
미국이 패권을 잡아서 우리가 좋은 건 우리가 미국으로부터 얻는 이득이 많아서 일 것이고 만약 우리가 중국이나 러시아로부터 받는 이득이 많은 나라였다면 미국이 지배하는 이 세계의 질서가 무척이나 불만이었을 것이다.
미국은 그 어느 패권국가보다 평화로운 패권국가 다란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까지 흘러온 역사의 흐름과 미국이 위치한 특이한 지리적 환경이 만들어 낼 결과물이지 결코 미국이 ‘선’해서 하는 행동은 아닐 것이다. 또한 우리 선조들은 중국의 혼란기를 지나 시스템이 안정화되었던 명, 청 시기만 하더라도 그 시스템에 동조하면서 중국이 지배하는 패권 속에서 수백 년간의 평화를 얻었었다. 미국이 우리에게 준 평화는 아직 70년이지만, 명나라, 청나라 시스템에서 살아가던 우리 선조들은 임진왜란, 병자호란이란 큰 전쟁 시기를 제외하면 각각 200년의 평화의 시기를 보냈었다.
결국 상대방의 이익이 우리에게 이득이 되면 ‘선’인 것이고 상대방의 이익이 우리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면 ‘악’이 되는 세상이다.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냥 각각의 공동체에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원하고 있고 공동체에선 양보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의 이익이 대치될 때 상대방은 ‘악’이 되는 세상인 것 같다.
개인은 쉽게 쉽게 양보할 수 있는데, 왜 사회는 그러지 못할까? 이러한 수많은 욕구와 욕망들을 조율하기 위해 민주주의 시스템이 돌아가지만, 왜 민주주의는 그러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사회의 갈등이 점점 더 커지는 듯한 모습을 보일까? 현재 민주주의가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랑은 아예 다른 시스템이지만, 결국 고대 아테네처럼 중우정치로 빠지게 되며 그 시스템을 혐오했던 철학자들이 생겨나던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닐까란 생각도 하게 된다. 민주주의는 권위주의와 다르게 천천히 걸어가며 이러한 갈등들을 조율해 가는 시스템이 다라 하는데, 우리에게 과연 이러한 자정활동이 가능한가,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