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나무 Jan 11. 2024

세 시간 동안 가위질하는 마음

양손잡이였다면 일곱 번째 책도 만들었을 수도.

김장철부터였으니 11월 중순부터였나 보다. 아이가 유치원에서 자그마한 책을 만들었다며 보여주었다. 김치를 주제로 한 놀이책이었다. 배추, 양파, 무, 밥 등 음식부터 귀여운 동물 캐릭터 등을 비롯한 아기자기한 프린트물을 오리고 코팅하여 만들었고 책표지엔 솜을 넣어 폭신폭신한 촉감을 가진 재미난 책이었다. 처음 보는 형태의 책인데 5-6페이지 내지의 구성도 퍽 재미있었다. 여러 귀여운 구성품을 뗐다 붙였다 하며 놀이를 하는 딸을 보니 제법 신박한 놀잇감이었다. 이런 책을 '스퀴시북'이라고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유치원에서 만들어 온 스퀴시북

스퀴시(Squishy)는 특수 제작된 부드러운 폴리우레탄 폼으로 만들어진 부드러운 장난감의 한 종류이다. 스퀴시는 동물, 과일, 그리고 식품과 같은 많은 다른 모양과 크기로 만들어진다. 스퀴시는 어린이와 청소년들, 심지어는 어른들에게도, 사람들이 스퀴시를 누르는 것을 경험하는 촉각적인 즐거움 때문에 스트레스를 완화시킨다고 한다.  _<위키백과>


위키백과에서 찾아본 '스퀴시'의 정의다. 나만 몰랐지 최근에 유행한 건 아닌가 보다. 아이가 만들어온 스퀴시북엔 사전 정의와 달리 폴리우레탄폼 대신 솜이 들어갔다는 차이는 있지만 말랑말랑 재밌는 촉감은 사전에서 말하는 스퀴시와 비슷한 듯하다.


유치원에서 선생님과 친구들과 함께 만들었던 과정이 즐거웠던 건지 혹은 결과물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 아이는 나와도 함께 스퀴시북을 만들고 싶어 했다. 만 다섯 살 아이의 작은 손으로 한 권을 만들기는 많은 노동과 시간이 필요했고 마침 나도 처음 보는 놀잇감 관심이 가던 차라 흔쾌히 요청을 받아들였다.


우선, 도안을 출력하고 코팅을 한다. 이때 앞면은 코팅지, 뒷면은 테이프로 붙여야 한다. 양쪽 다 코팅지를 붙이면 너무 빳빳해 책장을 넘길 때 불편하며 크기가 작은 소품들은 코팅지가 잘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코팅이 끝나면, 도안에 그려진 여러 아이템을 가위로 오리면 된다. 다 오린 뒤에는 얇은 테이프를 돌돌 말아 양면테이프처럼 양쪽이 다 접착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구성품 뒷면에 붙인다. 뗐다 붙였다 하며 놀이를 하기 위해서다.


한 문단으로 설명하면 끝날 책 만들기가 실전에서는 무려 세 시간 이상 걸렸다. 상대적으로 큰 그림은 아이가 오리고, 좀 더 섬세한 가위질이 필요한 작은 그림은 내가 오렸다. 내가 테이프를 돌돌 말아 아이에게 주면 아이는 테이프를 작은 아이템들 뒷면에 하나씩 붙였다. 표지에 넣을 솜은 평소 안 쓰는 손님용 베개에서 조금 가져왔다.


평소 가위를 쓸 일은 주방에서 말고는 거의 없다. 가위를 세 시간 이상 잡고 있을 일은 더더욱 없다. 가위질을 한지 세 시간이 넘어가니 손가락이 아팠다. 내 손인데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느낌도 들고 '나는 왜 가위질을 엄지와 검지로만 할 수밖에 없는가. 다른 손가락도 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진작 양손 가위질 연습을 해둘걸 그랬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목과 어깨가 뭉치는 건 물론 눈도 건조했다. 양반다리를 오래 하고 있었더니 다리도 저렸다.


몸 여기저기서 이제 그만하고 남은 건 내일 하라 신호를 보냈지만 완성본을 보고 싶은 욕심에 끝까지 하고야 말았다. 해가 질 즈음 시작한 작업은 깜깜한 밤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난데없이 시작된 부업 아닌 부업에 온몸이 쑤셨지만 완성된 작은 책을 보니 흐뭇했다. 그때는 몰랐다. 이때가 스퀴시북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이었음을.


평소에도 귀여운 캐릭터를 보면 눈을 못 떼는 아이는 더 귀엽고, 더 새롭고, 더 많은 아이템이 있는 스퀴시북을 만들길 원했다. 그날 이후 아이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간절한 부탁을 하며 새로운 도안 찾기를 요청하였고, '이제 진짜 마지막'이라며 나도 매번 그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들어주었다(엄마의 마음이란 이런 걸까). 친정엄마가 첫째 하교 후 돌봄 때문에 우리 집에 와계신데, 두 번째 스퀴시북부터는 친정엄마도 합류해서 3대 모녀가 거실에 앉아 코팅을 하고 자르고 붙여 책을 만드는 진풍경이 몇 차례나 더 벌어졌다.


문제는 분명 세 명이서 시작한 일인데 어느 순간 친정엄마와 나만 열심히 만들고 있고 아이는 다른 장난감을 갖고 노느라 사라진다는 거다. "뭐야, 이거 안 할 거면 치워. 엄마랑 할머니한테만 다 시켜놓고 다른 거 하고 놀고 있으면 어떡해." 잔소리를 하면 아이는 "아니야, 엄마. 할 거야!!" 하며 쪼르르 달려와, 작은 손으로 요리조리 가위질을 한다. 몇 번의 같은 과정을 거치고 나면 스퀴시북 한 권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형태도 내용도 다른 스퀴시북을 총 여섯 권을 만들었다. 시간과 공을 들여 만든 만큼 아이 스퀴시북을 가지고 놀면 좋겠지만 스퀴시북은 나란히 열을 맞춰 책장에 꽂혀있다. 첫날에만 조금 가지고 놀다가 여지없이 책장으로 들어가는 스퀴시북들을 보면서 '럴 거면 도대체 왜??!?!!?'라는 의문과 약간의 원망이 든다.


그럼에도 내가 여섯 권 만들기에 다 참여한 건 분명 나도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싹둑싹둑 가위질을 하는 동안 어릴 적 자주 했던 종이인형 옷 입히기 놀이, 학알 접기, 거북이 접기 등 손을 써서 만들었던 것들이 생각났다.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물성을 가진 장난감을 내 손으로 만들며 한 페이지가 완성될 때마다 좋아하는 아이를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더구나 완성했을 때 드는 뿌듯함은 아이의 환호와 별개로 오로지 나의 만족에서 오는 게 더 컸다.


그렇지만 뿌듯한 건 뿌듯한 거고 이제는 아이에게 새로운 걸 만들기보다 그동안 만든 걸로 놀이하길 권하는 중이다. 사실 연말에 코팅까지만 진행됐고 공정이 멈춘 '찜질방 스퀴시북'이 있다. 아이는 잊은 듯하여 책장 어딘가에 슬쩍 그 도안을 끼워두었다. 음... 만드는 과정이 분명 즐거운 건 맞다. 완성본을 봤을 때 내 책은 아니지만 흐뭇한 것도 확실히 맞다. 하지만 책장 어딘가에 끼워둔 미완성 도안이 아이와 나에게서 잊히길 바라는 마음도 맞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정말이다.

그간 만든 스퀴시북과 그 안의 다양한 속지들. 마라탕 가게와 슈퍼마리오 북 만들기가 제일 어려웠다.

새해에는 흘러가는 시간을 잠깐 멈추어 세워 나의 '일상을 살피는 마음'을 가지려고 합니다. 의미 없이 지나친 순간도 그러모으면 하루를 사는 비타민 한 줌이 될 거라 믿어요. 아무리 바빠도 매일 글 쓰는 작가 다섯이 꾸려가는 공동매거진 <일상을 살피는 마음>을 구독하고 당신의 일상에도 영양을 듬뿍 주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