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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규 Feb 10. 2019

나체주의자 L씨

L씨는 대체로 말이 없는 편이지만 가끔 대화를 나눌 때는 상당히 재미있는 사람이다. 발언 하나하나가 폭탄급으로 재미있다. 그러나 그게 웃기려고 하는 농담이라기 보단 진지한 삶의 태도 같은걸 피력하는 거라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치고 듣게 된다. 으흠, 꽤 자유로운 걸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생각하는데 평소 옷차림은 말끔하기 그지없기 때문에 역시 사람은 겉보기만으로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알 수 없다고 느낀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L 씨는 집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로 지내길 좋아한다고 한다. 이 얘기 역시 같이 점심 식사를 하는 도중에 튀어나왔다. 점심 식사와 나체 생활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연관성이 희박해서 도무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화장실을 갈 때마다 매번 물로 씻는 수고를 감수하며 다 벗고 지낸다고 합니다. 독신이기 때문에 남의 눈이야 아무래도 괜찮겠죠. 음, 그래도 여러 가지 곤란한 상황이 떠오르는데. L 씨가 너무 진지하게 알몸으로 지내는 건 너무 자유롭다-라고 말해서 골똘히 생각하다가 그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최근엔 나도 해볼까 고민을 해보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역시 실천에 옮기기까진 망설이게 된다. 알몸으로 라면을 끓이거나 빨래를 널다가 어머니가 들어오시면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하나. 이렇게 지내면 기분이 조크 든요-라고 설명한들 믿어주실 리가 없지 않을까. 이런저런 이유로 여태 실행은 못 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불가사의할 정도로 여자 친구의 말을 잘 듣는다는 점이다. 그녀가 살을 찌우라고 했기 때문에 매 끼니를 찍어 보내며 보고하는 것부터, 담배를 끊으라 했다고 줄담배를 피우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딱 끊지를 않나, 실용적이지 않으니 정리하라 했다는 이유로 운전이 취미인 사람이 차를 팔아버렸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지 궁금해했더니 답을 알려주었는데 "그 대신 침실에서 원하는 건 모두 할 수 있게 해 준다"라고. 이 사람들 대관절 침실에서 무슨 짓을 하는 걸까요. 차마 거기까진 물어보지 못했지만, 어쨌든 대단한 커플이다. 남자란 역시 엄청나게 단순하고 다루기 쉽다고 해야 하나. 나라면 뭘 하게 해 줘도 그렇게까진 할 수가 없는데 말이죠.


내 경우는 이걸 금지하는 대신 이걸 하게 해 줄게-라는 식의 거래는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내게 있어 중요한 것들을 존중받고 싶으므로 너도 이런 부분을 날 위해서 포기해줘-라고 요구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채식 식당을 같이 안 가는 대신 내내 라멘을 먹으러 혼자 가고, 보고 싶은 영화가 달라 각자 따로 보러 간다거나, 좋아하는 햄버거 브랜드가 달라서 롯데리아를 테이크 아웃해 맥도널드에서 같이 먹은 것까진 좀 지나친 것 같긴 합니다만. (실화) 어쨌든 무엇이든지 같이 해야 한다는 강박만 버리면 그 연애는 꽤 편안해진다. 편안하다는 것은 보다 서로를 오래 곁에 둘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이다. 각자의 영역은 각자의 영역으로 두고 우리는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있는 공간을 넓혀 나가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어째서 나체 얘기하다가 이런 소릴 하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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