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수 <광마잡담>
<광마잡담>은 전기 소설 이야기에다 마광수만의 관능적 상상력을 더한 모습을 띄고 있다. 책에서 9개의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과거의 유명한 전기소설들을 패러디한 것이 대부분이다. 마광수는 그런 전기 소설의 특징과 함께 현대적 감성도 넣었다. 그래서 <광마잡담>을 현대판 전기소설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마광수는 전기소설이 고전 소설의 조건이 다 갖춰져 있다고 생각했다. 고전은 시간이 지나도 그 가치를 잃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보편적 공감을 줘야만 한다. 그래서 당시에는 큰 인기와 공감을 얻었던 것이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리고 사람들의 의식 구조가 변화함에 따라 공감을 얻지 못하면 고전이라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에게 공감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인간의 보편적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 고전인 셈이다. 영화로 예를 들면 <사랑은 비를 타고> 또는 <오즈의 마법사>가 그렇다. 두 영화는 사랑과 행복, 좌절과 극복이라는 감정을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고전이라고 칭송받는 것이다.
또한 마광수는 고전은 탈현실적인 소재나 주제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인간의 보편적 감성을 어느 시대이건 독자에게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상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상징'을 통해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근원적 관심에 접근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고전인 <사랑은 비를 타고>와 <오즈의 마법사>도 일맥상통한다. 두 영화는 환상적 연출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고 분명 현실적이지 않다. <사랑은 비를 타고>의 상징은 춤과 노래이며 <오즈의 마법사>는 (춤과 노래도 있지만) 도로시가 오즈에 가서 만난 여러 캐릭터들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고전의 가치를 바라본다면 전기소설은 충분히 그 값어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광수가 전기소설을 높이 사는 이유는 전기소설이 인간의 신비를 환상적 이야기와 상징을 통해 캐내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리얼리즘 소설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 이론에 근거를 두고서 쓰인 '재현의 문학'으로 바라봤다. 그 반면에 전기소설, 즉 현실을 뛰어넘는 소설은 '표현의 문학'으로서 바라봤다. 그래서 전기소설에 등장하는 천상의 세계와 용궁의 세계 그리고 선경의 세계는 표현의 세계인 것이고 이런 세계를 바탕으로 인간의 근본적 관심을 탐구하려 했다는 점에서 마광수는 전기소설을 높이 샀다. 리얼리즘의 추세로 접어들고 있는 영화나 소설 속에서, 마광수는 <광마잡담>이라는 현대판 전기소설을 통해 탈현실적 이야기의 가치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전기소설의 또 다른 특징은,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세계관을 통해 힘겨운 삶에 위안을 얻자는 것에 있다. 소설은 카타르시스의 기능을 가지는데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꿈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꿈은 무의식의 세계이며 본능적 상상의 세계이다. 그래서 진정 표현의 세계이기도 하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감정과 상상의 집합체가 꿈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꿈을 꿀 때는 억압받던 감정들이 마음껏 뛰어놀수 있는 시간이다. 그래서 꿈도 일정부분 감정의 대리배설이다. 꿈이 없다면 우리 안에 있는 감정은 곪아서 터질것이다. 인간은 어떤 방식이든 간에 배설을 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꿈은 초현실적이고 몽환적인 세계여서 현실의 세계와는 다르다. 우리가 꿈 속에 들어가고 싶은 욕망은 현실의 힘겨움을 꿈으로 극복하고 싶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꿈은 도피성을 가진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밤일 때만 수동적으로 꿈을 꾸는 것은 꽤나 감질나기 때문에 인간은 아침에도 꿈을 꾸려 한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소설과 영화 같은 이야기의 예술이다. 전기소설은 꿈을 비슷하게 글로 옮긴것이다. 우리가 꿈을 꿀때 느끼는 황당무계한 사건들과 초현실적인 사건은 전기소설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기소설이야말로 아침에도 꿈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꿈의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집필할때 마광수는 '즐거운 사라 필화 사건'으로 우울감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소설 속에 나오는 이야기도 자위(手淫)적이다. 인간은 힘들면 환상 속으로 숨고 싶어 한다. 환상으로 들어가 현실의 고통을 잠깐 잊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도피를 많이 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도피는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그 세계에서 잠깐 동안 발을 붙이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다. 우리가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는 가장 큰 이유는 여기에 있다. 현실과는 다른 세계로 들어가 위안 아닌 위안을 얻는 것. 결국 도피는 비겁한게 아니라 고된 현실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