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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Kyoo Lee Feb 15. 2021

“콜로라도 아스펜 가서 살래요”


결혼 전에는 잘 몰랐는데, 아내는 눈(snow)을 참 좋아합니다. 눈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을 테지만, 아내가 눈을 좋아하는 정도는 남다른 것 같습니다. 눈 구경하기 힘든 시애틀의 겨울을 한해씩 보내면서 아내의 눈 사랑을 점점 더 진하게 깨닫게 됩니다. 어찌 보면 오늘의 이야기는 이렇게 눈을 사랑하는 아내가 해마다 이 시애틀에서 겨울을 살아낸 환희와 아쉬움의 기록입니다.




1. 2009 - “Let it snow”


우리 부부는 2009년 7월에 결혼을 하고, 저는 8월 아내는 10월에 각각 시애틀로 오게 되었습니다. 10월에 시애틀에 처음 도착한 아내는 하루도 빠짐없이 내렸던 비에 놀라며 하루하루를 채워가고 있었습니다.


겨울이 될 무렵 아내가 소소한 장식품을 파는 가게에서 현관문에 거는 door sign을 하나 사 왔습니다.

딱 이모양은 아닌데 이와 비슷한 사인이었습니다. (Photo credit: Pinterest)

“Let it snow.”


평소 이런 장식에 별로 관심이 없던 아내가 처음으로 사서 걸어 놓은 사인이 “눈 오게 해 주세요” 라니.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눈 오면 분위기도 신나고 좋으니까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이때 알아차렸어야 하는데, 이 분은 정말로 심각하게 눈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시애틀에서 맞이한 첫겨울에, 아내의 간절한 기다림과는 다르게, 눈이 한 번도 안 왔습니다.


겨울을 지내보니, 무슨 해양성 기후에 속한다 하는 시애틀은 비는 정말 많이 오지만 눈은 거의 오지 않는 독특한 기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겨울은 대체로 따뜻해서 가을과 별 차이 없었고, 주로 비가 내렸습니다. 어쩌다 기온이 확 떨어지면 그때는 비 (추운 날에는 눈으로 바뀔 수 있는) 안 오는 맑은 날씨가 계속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참 눈과는 거리가 먼 날씨 패턴이었습니다.




2. 2011 or 2012


2011년 혹은 2012년에 저희 둘 다 학교를 다니고 있었던 때로 기억합니다.


추수 감사절 연휴 앞인지 뒤인지 웬일로 11월에 폭설이 내렸습니다!


아마 이때가 시애틀에서의 눈 경험을 한 첫 번째 시기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눈이 쌓일 정도로 내리면 시애틀은 도시가 마비됩니다. 뒤에 서술하게 될 2019년의 폭설을 계기로 도로의 눈을 치우는 차량이나 염화칼슘이 많이 보급되었지만, 이때만 해도 그런 준비가 전혀 안되어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게 도시가 마비되면 학교가 문을 닫습니다. 눈이 치워지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서 차량이 운행하는데 어려움이 있고, 대중교통이 그렇게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눈이 녹을 때까지 며칠이고 학교에 갈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이런 경우에는 학교에서 아침 일찍 전체 학생들에게 이메일을 보내서 그날 학교가 문을 열지를 알려줍니다. 그렇게 그 해 11월의 어느 하루 학교의 수업이 모두 취소되었습니다. 다음날도 수업 취소. 또 다음날, 우리 부부는 새벽같이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아 학교 웹사이트의 공지란을 계속 확인합니다. 아직은 공지가 없습니다. 마음이 약간 조급해집니다. 오늘은 학교에 가야 하나? 학교 웹사이트 공지란 어딘가에 학생들이 코멘트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오늘도 수업이 취소되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집 근처에는 눈이 아직 안 녹았는데 언덕이 경사가 가팔라서 운전하기에 안전한 것 같지가 않아요.”


결국 오전 8시 즈음에 이날도 수업이 취소되었다는 공지가 뜨고, 우리 부부는 환호하며 늦잠을 청합니다.


간절함으로 요런 공지를 기다립니다 (Photo credit: UW Daily)


그렇게 일주일 정도를 잘 놀았습니다. 얼마나 꿀 같은 시간들이었던지!


이때 학교 신문에 정말 공감되는 카툰이 하나 실렸었는데, 사진으로 못 남긴 것이 정말 아쉽습니다. 아쉬운 대로 설명으로 대신해보겠습니다.


Day 1: 학교에서 눈싸움

Day 2: 눈사람 만들기

Day 3: 커피 마시며 한 없이 눈 바라보기

Day 4: 늦잠자기. 한 없이 행복한 표정.

...

Day 7 (수업 재개 전날): 벽에 걸린 시계는 새벽 2시. 에너지 드링크 Monster 몇 캔이 뒹굴고 있는 책상에 앉은 눈이 한껏 충혈된 어느 학생이 노트북에서 눈을 못 떼고 있는 모습.


너무 공감이 되었던 일주일이었습니다.




3. 2017 - White Christmas


이렇게 겨울에 눈 한 번 보기 힘든 시애틀이다 보니, White Christmas는 정말 꿈꾸기 힘든 상황인데요, 2017년에 거짓말같이 눈 내리는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보니 함박눈이 펑펑 내린 것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환상적이었습니다.




4. 2019 - 2월의 폭설


2019년 2월의 어느 날 폭설이 예고되었습니다. 눈 조차 드문 시애틀에서 폭설이라니. 금요일로 기억합니다.

퇴근길에 아내를 만나서 집에 오는데 정말 굵은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예보대로, 심상치 않았습니다. 며칠을 집에 갇혀있을 수도 있다고 하길래, 집에 오는 길에 grocery store에 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좀 사두었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며칠을 집에서 쉬었습니다.


누구도 대비 못했던 폭설에 도시 전체가 잠시 멈추었던 3일이었습니다.


화제의 뉴스 하나 - 이때 이웃 오레곤 주의 한 청년이 자신의 차를 눈 치우는 차로 개조? 한 후 시애틀로 와서 동네 길의 눈을 치워주는 사업을 해서 정말 많은 돈을 벌었다는 소식이 화제였습니다. 눈이 거의 내리지 않아서 제설장비 등이 턱 없이 부족했던 시애틀에서만 있을 수 있었던 틈새시장이었지요. 이러한 뉴스가 계기가 된 건지는 잘 몰라도, 이후로는 시 정부에서 제설 차량 등 제반 설비를 보다 많이 갖추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5. 그리고 아스펜


2019년 2월의 폭설을 경험하며 맘껏 눈을 만끽했던 아내는 2020년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렸지만, 2019-2020 겨울에는 눈이 거의 내리지 않았습니다. 눈을 기다리던 아내는 이제 “Let it snow” 사인 대신에 매일 눈이 올 것 같은 다른 지역으로 희망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언젠가부터 콜로라도 주의 아스펜이라는 도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 가서 살고 싶다고.


“콜로라도”라.. 한 번 가 본 적도 없는 콜로라도와 아스펜입니다. 록키 산맥의 U.S. side를 품고 있는 산악지대. 고산지대 특성상 산소가 부족하기도 하다는 MLB 콜로라도 록키스의 홈.


이해할 것도 같았습니다. 이벤트성으로 눈 내리는 시애틀에 희망을 걸기보다는 매일같이 눈이 오는 다른 지역에 살고 싶다는 아내의 소망을요. 뉴욕과 같은 동북부의 도시들에 가도 매일같이 눈을 볼 수 있겠지만, 거긴 또 복잡해서 좀 그렇고. 듣기에도 한적한 콜로라도가 아내에게는 딱이었나 봅니다.


아스펜은 이런 분위기라고 합니다. 스키로 유명하다 하네요. (Photo credit: vogue.com)

사진을 보니 아스펜 정말 좋습니다. 아스펜에 살자 하니 시애틀만큼 job 이 있을까 염려가 되긴 하지만요. 이 글을 준비하며 아내에게,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아스펜의 사진이 있으면 몇 장 달라고 하니, 그런 건 없고 그냥 눈이 매일 내릴 것 같아서 가서 살고 싶은 거라 합니다.


시애틀을 참 좋아하는 아내가 아스펜 가서 살자고 할 때마다 갸우뚱하면서도, 짐짓 진지한 그 모습에 한 번 더 “진심인가”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6. 2021 - 오늘만큼은 여기도 아스펜


2020-2021 겨울에는 그래도 눈도 한두 번 오고, 폭설 예보도 있었습니다. 사실 지난주에도 눈이 2~3일 동안 많이 온다는 예보가 있었는데, 결국 비로 바뀌어서 아내의 맥을 빠지게 했습니다.


눈 예보에, 수시로 기상 체크를 하던 아내가, 결국 비로 바뀌자, 이건 일기 “예보”가 아니라 실시간 일기 “보고”라며 다시 아스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딱 그러던 찰나에 어제 정말로 눈이 펑펑 왔습니다. 저는 사실 이번에도 눈 예보가 비로 바뀔 줄 알았는데, 정말 눈이 왔습니다. 그것도 펄펄.



눈이 쌓인 것을 확인한 아침에 부츠를 신고 바로 나갔습니다. 아이들과 강아지들이 신났습니다. 정말 많이도 쌓인 눈 위를 뽀드득 걸으니 좋았습니다.


아내가 snow angel 이란 것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뭔지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따라 했는데, 아무도 밟지 않은 쌓인 눈 위에 대자로 누워서 팔다리를 휘저으라고 합니다.


스노우 엔젤

사진을 보니, 팔다리를 휘저은 흔적이 천사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복장과 비슷합니다. 재미도 있었습니다 ㅎㅎ


본인도 스노우 엔젤을 한껏 한 다음에, 이제 따뜻한 무언가를 마셔야 한다며 동네 스타벅스까지 걸어가자고 합니다.


한참을 재밌게 걷다가 집에 들어왔습니다.


아내는 갑자기 등장한 이 눈 세상이 금방 녹아 없어질까 노심초사입니다. 그러다가도 계속 눈이 내리는 것을 보며 안도합니다. “일희일비”의 진수를 몸소 보여주고 있습니다. 눈발이 굵어지자 아주 기뻐하며 그 모습을 촬영하러 베란다로 나갑니다.



아내의 바람대로 아마 며칠 동안은 눈 세상이 그대로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이전과 다르게, 이제는 재택근무가 일상이 되어서, 눈이 많이 와서 차가 못 다녀도 아랑곳없이 우리의 일은 계속 이어질 것 같습니다. 2년 전의 폭설 때와는 달라진 모습입니다.


어제와 오늘 몇 번씩 스키장 복장으로 나가서 뽀드득하는 눈을 밝고 동네 곳곳을 누볐습니다. 아내가 아이들과 강아지 못지않게 뛸 듯이 기뻐해서 덩달아 즐거워지는 주말입니다. 그리고 콜로라도 아스펜 부럽지 않은 시애틀의 어느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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