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 할머니의 다섯 번째 자식
"딸딸이~"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이 호칭은 우리 할머니가 나를 부르는 애칭이다.
말 그대로 '딸'의 '딸', 손녀를 부르는 그녀만의 방식이다.
어느덧 주름이 자글한 것을 넘어 쭈글하고 정강이에 멍이 잘 드는 나이가 되었지만 60대 때까지만 해도 눈빛이 생생했던 그녀는 그 눈빛으로 나를 쓰다듬기도, 혼쭐 내기도 하며 열심히 길렀다.
이제 막 개업해서 은행 빚을 갚아나가기 바빴던 대견한 의사 '딸'을 대신해서 '딸딸이'를 위해 매일 밥을 짓고, 놀이터에 나가고 천기저귀를 만들어 입혔다.
그렇게 두 명 분의 사랑을 받은 나는
물에 밥을 말아 김치만 얹어주어도 아주 잘 먹고,
놀이터에서 온 동네 남자애들을 부하로 부리고,
보드라운 천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택이 달린 옷만 입으면 살을 벅벅 긁기 바쁜
통통하고 호탕한 아이로 자랐다.
그러다 말 안 듣는 남자애들을 꼬집거나, 태권도 학원에서 배운 발차기를 시범 보인다고 할머니 눈앞에서 발을 이리저리 휘두르는 둥 너무 선머슴처럼 굴어 혼이 나면 또 나름 성깔을 부린다고 입을 마구 삐죽이면서 세모눈을 떴는데, 그럴 때면 할머니는 말했다.
"나는 다른 할머니들이랑 달라. 응석이란 응석은 다 받아주다 어디 가서 버릇없는 아이 소리 듣게 하는 꼴은 못 본다."
거기다 말대답으로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나도 버릇없는 아이가 되는 건 싫었으니까.
그렇다고 막 겁나는 마음이 들지도 않았다.
나를 혼낼 때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호피무늬, 쨍한 색 아우터, 선글라스, 금가락지로 멋을 부리고 걸걸한 목소리를 내는 할머니를 남들은 '호랑이 할머니'라고 불렀지만, 나는 그녀의 다정함을 모를 수 없었다.
매일 밤, 내복만 입고 할머니가 덥혀놓은 온돌침대에 기어들어가 내 다리를 할머니 다리 위에 턱- 걸쳐놓고 자다 일어나면 모락모락 뜨끈해진 몸 앞에 아침밥이 놓였다.
맨손으로 좍 좍 찢어주는 김치를 잘 받아먹으면 씩 웃으면서 "신토불이~" 하는 목소리를 듣고도 어떻게 사랑을 의심할 수 있을까. 겨울에는 거기다 가끔 특식으로 말랑한 홍시가 나왔다. 숟가락으로 감을 갈라 안을 퍼먹다 보면 입안이 온통 주황빛 달콤함으로 물들었다.
초등학생이 되어 더 이상 같이 살지 않게 된 후에도 할머니 집에 놀러 가면 그녀는 항상 나에게 가장 편한 내복을 입히고 온돌침대의 가장 따뜻한 자리에 눕혔다.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대학원생...
이 모든 학생 신분을 벗은 지금은 공부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도 댈 수 없는데 할머니를 보러 가기가 힘들다.
"취업 비자를 받기 전까지는 웬만해서 한국에 들어가지 않는 편을 추천드려요..."
정돈된 목소리로 변호사 님이 해 주시는 말을 담담히 받아 적으면서 나는 그녀를 가장 먼저 생각했다.
지금이 6월이니까, 여름이면 할머니 방 창문을 넝쿨잎이 다 가려 노란색이 아닌 초록색 햇빛이 드는 걸 볼 수 있었는데.
볕을 쬐며 빈둥대는 내 옆에서 할머니가 핸드폰만 너무 보면 눈 상한다고 잔소리하며 붓글씨를 쓰면 풍기는 먹 냄새도 은근히 좋았다.
그것도 방학 때 하루나 이틀, 잠깐씩 들른 거라 너무 짧아 아쉽게만 느껴졌는데 이제는 당분간 '방학' 같이 확실하게 그녀를 방문할 수 있는 계절이나 시기 자체가 없어져버렸다.
너무 늦기 전에 다시 할머니와 함께 여름을 맞아 감나무 가지가 만든 처마 아래 땀을 식히고 물에 만 밥을 나누어 먹을 수 있을까? 새로 나온 아이스크림이나 어르신들께 생소한, 퉁퉁 불은 타피오카 펄이 들어간 밀크티도 사 가서 드셔보게 하고 싶은데.
앞으로 몇 번이고 더 할머니와 떨어져서 사계를 나도 어릴 적의 기억은 변함없이 포근할 것이다.
그렇지만 때때로 그 포근함이 나를 조금 슬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