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결코 단순하지 않음에도
작년에 마음이 조금 힘들었을 때, 교내 심리 상담사 분과 이야기하다 들은 말이 있다.
"진경 씨는 스스로의 감정을 1인칭으로 다 느끼거나 묘사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네요?"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정말 그랬다.
선생님께 최근 있던 일들에 대해 말씀드리면서도
"그때는 그런 기분이 들었던 것 같아요."
"~해서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던 것 같아요."
"그런 걸 보면 저는 ~한 성향이 있는 것 같아요."
하고 마치 다른 사람을 관측을 넘어 분석하는 듯한 말투를 쓰고 있던 것이다.
이유가 무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나는 특히 부정적인 감정에 100퍼센트 몰입하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한다는 자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갈등상황을 마주하면 각자의 감정에 취해 날카로운 말을 뱉는 사람들이 너무 싫었기 때문일까? 어떤 이유에서든 있는 대로 화를 내고, 우울해하고, 짜증 내는 게 너무 싫었다. 특히 그것이 특정한 누군가를 향해 있다면. 그전에 내가 얼마나 긍정적인 감정에 힘입어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든 간에 그 노력이 모두 무효화될 만큼 '나쁜 사람'이 되어버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부정적인 감정이 들면 큰 알약을 삼키는 것처럼 목구멍 아래로 꾸역꾸역 내려보낸 다음 혼자 있을 때 풀어헤쳤다. 하나도 정제되지 않은 글을 막 써 내려가거나 엉엉 울어버리는 식으로.
그러고 시간이 지나 친한 친구에게 얘기할 기회가 생겨도 화, 슬픔을 느낀 대목은 짧게 언급하고 "근데 생각해 보니까 ~한 것 같더라고. 이제는 정리가 돼서 정말 괜찮아!"로 대화를 마무리짓곤 했다.
거기다 몇몇이 "넌 진짜 성숙하다, 속이 단단하다" 같은 말로 응수하면 정말 그런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은연중에 모든 감정에 솔직한 사람들에 비해 내가 나은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반대로 "진심이야? 난 네가 괜찮은 척을 하는 걸까 봐 걱정돼" 말하는 친구가 있으면 당황스럽고 뭐라 답할지 모르겠는 마음이 들었다.
"진짜야, 괜찮아. 나 튼튼해! 아주 잘 지내고 자주 행복해."
단순히 거짓말을 들킨 기분이라기엔 거짓말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나는 실제로 사소한 것들에서 자주 행복을 느꼈다. 항상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잘 웃었다. 그렇지만 그것과 별개로 안 좋았던 일들을 겪고 느낀 안 좋았던 감정들이 해소가 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에는 확실한 답을 할 수가 없어서 왠지 모를 찝찝함이 남았다.
선생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면서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좋은 사람'이라는 이상에 닿는 게 너무너무 중요한데,
그런 사람이 막 정신을 놓은 것처럼 화를 내거나 본인의 슬픔에 취해 남의 슬픔을 무시하고,
심지어 그 슬픔의 이유가 되기도 하는 모습은 잘 그려지지가 않아서 그렇게 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같다고. 그런데 그게 아이러니하게도 나와 같은 노력을 하지 않는 듯한 사람들을 비웃는 못된 마음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고. 그럼 또 '진짜' 좋은 사람이 아니라 그냥 그런 척하길 좋아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어서 괴롭다고.
또(!) 나름의 분석 내용을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잠깐 생각하시더니, 이렇게 물으셨다.
"진경 씨, '진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왜 중요한가요?"
그러고 여러 말씀을 이어가셨지만 요는 '진짜' 좋은 사람 같은 것은 결국 허상이고, 내가 거기에 집착할수록 괴로움의 굴레는 길어지기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덧붙이신 말에 나는 선생님 앞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그리고 만약 '좋은 사람'을 가려내기 위한 기준이 정말로 존재한다고 해도 진경 씨 같은 사람은 조금 마음대로 굴고 감정들을 풀어놓아도, 거기서 많이 멀어지지 않아요."
여기서부터 인사이드 아웃 2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뒷얘기가 있어서,
얼마 전에 개봉한 인사이드 아웃 2에서 라일리의 첫 번째 자기감(Sense of Self)이 'I am a good person' ('나는 좋은 사람이야')인 것을 보고서부터 쭉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것에 가장 크게 일조한 기쁨이가 부정적인 기억이라면 전부 무의식 너머로 숨겨버리는 모습도 이해가 됐다.
그 자기감이 불안이의 영향으로 변했다가, 첫 번째 자기감과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말과 행동으로 이어져 혼란을 야기했다가, 폭주하는 불안이를 기쁨이가 구해주고 그토록 꽁꽁 숨겼던 부정적인 기억들이 비로소 라일리의 자기감에 입체감을 더하는 모습을 보면서는 그야말로 오열했다.
'나도 이기적이고, 서툴고, 우습고, 게으르고 질투가 많은 사람인 동시에 온정이 많고, 다정하고, 유쾌한 사람일 수 있구나. 그리고 그 모든 모습을 갖춘 채로도 사랑스러울 수 있구나.'
그래서 생각해 보니 기쁨이 말고도 슬픔이와 버럭이가 내 안에 아주 큰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만 슬픔이가 늘 나를 잠겨 죽을 만큼의 슬픔에 던지거나, 버럭이가 나로 하여금 누군가를 상처 입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슬픔이는 내가 다른 사람들의 기쁨 말고 슬픔에도 공감할 수 있도록, 공감하지 못하는 슬픔은 그 깊이를 가늠하려 애쓰거나 이런저런 말을 건네기보다 조용히 옆을 지키도록 했다. 버럭이는 어느 한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의 부당한 일들에 꾸준히 화를 내고, 감사하게도 교육의 특권을 누린 내가 그것들에 관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지 고민하게 했다.
물론 앞으로도 그동안 열심히 찍어 누르던 내 감정들과 친해지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은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고, 남들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데 나는 그와 다르게 스스로가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고, 남들은 단순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려 노력했던 것 같다. 이제는 나도, 남들도 모두 그저 '복잡한' 사람일 뿐 좋거나 나쁘다고 이름 붙여질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그저 나에게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모습들을 마음껏 사랑하려 한다.
#인사이드아웃
#인사이드아웃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