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잘 사는 진리 May 03. 2021

아재미를 장착한 20대의 건배사 A to Z

주의. 청자 중 아재가 80% 이상일 때 쓰시오.

 다른 회사에서 건배사를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 회사는 종종 한다. 팀 회식에서는 거의 하지 않고, 주로 영업 최전선에서 거래처사장님(대체로 연세가 많으시다)과 술자리가 있을 때, 흥이 어마무시하게 돋는 자리에서 우리 쪽 어른이 시키셔서 하게 된다. 나는 모든 술자리에서 대체로 가장 어리기 때문에 '오늘 느낌이 쎄한데?' 싶으면 하나 정도는 미리 준비한다.


 다양한 건배제의 방법이 있겠지만 삼행시를 종종 선택하는 편인데, 그게 가장 호응을 얻기 쉽고 정성을 들인 티가 나기 때문이다. 선창-후창은 부연 설명이 들어가야 해서 오글거릴 수 있다. 부연이 길어지면 본론에서 맥이 빠진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 어린 사람이 하면 끝을 존댓말로 하기도 뭣하고 반말로 하기도 뭣한 묘한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예를 들어, 네이버에 검색했더니 바로 나오는 것들 중에 "해피-", "투게더-"가 있는데, 이런 건 상투적이지만 이것 말고는 표현할 길이 없는 것처럼 설명을 잘해야 하고 이 설명이 의미가 있지 않으면 재미와 감동이 둘 다 없기 딱 좋다. "다시 한 번-", "뛰어보자-" 이런 것은 막내인 내가 하면 가끔 이상한 사람들이 "반말 하는 거야?"라고 물어오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사회부적응자를 거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N행시도 오글거리지만 경험상 선창-후창에 비해서는 덜 오글거린다. N행시를 할 때는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건 쓰지 않는다. 부장님들 앞에서 '청바지~', '당나귀~' 같은 건배사를 하자니 이제 질릴대로 질려버린 건배사 제작자들 앞에 선 엉망진창 연습생이 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적당히 오늘의 소회를 함축적으로 밝히면서, 적당히 참여를 유도하고, 적당히 이 자리에서는 흥을 돋우면서, 다음날 회자되지는 않는... 그런 삼행시 어디 없나 머리를 굴린다. 업무를 할 때보다 더 데굴데굴 굴린다. '나는 도대체 이런 걸 왜 하고 있지'하는 생각이 들면서 어이가 없다가도 그 어떤 때보다 몰입해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소재를 선정하는 것부터 해본다. 주로 거래처 상호, 거래처 회장님, 사장님 성함, 그 자리의 가장 큰 어른의 성함 또는 평소 본인을 희생하여 재미를 주는 사람의 이름, 지역명, 식당 이름,  메뉴 이름, 당일 행사를 진행했을 경우 행사와 관련된 세 글자 단어 등을 선택한다. 두 글자는 짧고 네 글자는 길다. 적당히 기승전결을 넣으면서 지루해지지 않는 게 세 글자 정도인듯하다. 후보군을 정해두고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하며 괜찮은 삼행시가 나올만한 소재를 확정한다.


 삼행시는 청중이 운을 띄워주고 내가 내뱉는 음절 몇 개에 바로 반응이 오기 때문에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에 임팩트가 있어야 한다. 중-약-강 정도? 첫 글자를 어떻게 방향을 잡느냐에 따라 두 번째, 세 번째 글자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경우다. 역으로 세 번째 글자에 임팩트를 강하게 줄 만한 게 생각났다면 약-약-강으로 세팅해서 첫 글자, 둘째 글자는 어영부영 지나가도 괜찮았던 것 같다. 할 수 있다면 강-강-강도 괜찮은 듯하다. 각 글자에 대한 내용은 길지 않게, 웬만하면 일곱 글자 이내로 준비한다. 그 이상이 되면 텐션이 떨어진다.


 술자리는 3단계로 구성된다. 그 분위기를 타야 한다. 초반에는 업무에 찌들어있던 몸을 푸는 단계기 때문에 아직 다들 회사원 모드다. 어느 정도 체면을 차리고 차분한 편이다. 다음은 코미디언 모드다. 이 순간만큼은 회사에서 죽이고 있던 창의성을 극대화시킨다. 이때 삼행시로 웃음과 감탄을 준다면 업무시간에는 들어보지 못한 격한 칭찬을 받을 수도 있다. 한국인은 역시 흥이제! 마지막으로는 자리가 정리되면서 신데렐라 모드가 된다. 다음날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이 뎅뎅 종을 친다. 이때는 약간의 감동, 정리 느낌을 담은 건배사를 하면 분위기 파악을 잘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쯤에서는 공동체의식을 다지거나 오늘의 소회를 감동적으로 풀어낸, 또는 이 자리에 계신 어른께 감사하다는 내용을 담는다. 사람 이름으로 할 때는 그 사람의 특성이나 그 사람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를 어느 정도 담아야 한다. 실컷 그 사람의 이름을 빌려와서 해놓고 전혀 상관 없는 삼행시를 하면 어리둥절해질 수 있다.


 런닝맨에 블랙핑크 제니가 나와서 '권지용' 삼행시를 했는데, '권지용 선배님, 지금 제가 이걸 못 살리면, '용 먹을지도 몰라요'였다(제니의 귀여움에 좌심방을 얻어맞고, 센스에 우심방 벽이 무너졌다). 그러나 이처럼 한 음절을 비슷한 음절로 교체하는 것은 어른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는 위험할 수 있다. 잘 못 알아듣거나 "아니, 세 번째 글자가 '용' 아니었어? 왜 '욕'이 됐지?"하고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분들이 계신다.


 그간 내가 한 것 중에 가장 반응이 좋았던 것은 아재 냄새가 대책 없으리만치 강하게 풍기는 거였다. 한 번도 뵌 적이 없던 거래처 회장님 두 분, 아래 직원들과 우리 부문 사람들이 함께 등산을 한 후 진행하는 뒤풀이 자리였는데, 등산 하는 동안 사색에 잠겨 삼행시를 몇 개나 만들어내고 폐기했는지 모른다. 이후 뒤풀이는 알콜섭취량이 역대급이었다. 무서운 분들.... 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상석으로 호출을 받았다. 드디어 오늘 등산코스의 진정한 정상에 오르는 겐가... 앞 두 글자는 제대로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다만 마지막 글자가 '스'였는데, '쓰릉합니다-' 했더니 그 술자리의 텐션이 미친 수준이 되었다. 센스 있는 내 동기가 또 '스'로 끝나는 소재를 선택해서 '쓰릉합니다-'를 써먹었더니 더 오를 수 없을 것 같던 텐션이 또 올라갔다. '쓰릉합니다'는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정말 낯부끄럽고 가끔 이불킥하게 되는 일이지만 거래처회장님이 아주 만족하셨고, 온몸으로 부딪혀 영업을 하시는 부장님들을 위해 그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지원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 정신승리해본다.


 사실 삼행시를 할 때는 무엇보다 내가 지은 삼행시에 대해 자신감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본인이 못 미더워하면 청중들도 힘이 빠진다. 그럴 만한 분위기가 된다면 출사표를 던지는 것도 좋다. 오늘 이 자리를 위해 준비했다며 비장함을 보여주면 막내에서 막내 두 번째 정도까지는 열렬한 응원을 받을 수 있는 것 같다. 구린 삼행시라도 당당하게 외치면 다들 호응을 해주신다. 그렇다. 주저리주저리 적었지만 사실 들어주는 사람들이 나에게 호의적이어야 뭘 해도 통한다. 상무님, 팀장님, 부장님들께서 바람을 잡아주셨기 때문에 대단한 삼행시가 된 거지 "에이~ 그게 뭐냐?" 하실 수도 있었던 거다. 현타가 종종 오지만 사랑 받는 막내는 그런 분들 덕분에 힘든 회사생활도 조금은 할 만하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회식을 한 기억이 거의 없어서 '이런 때도 있었지' 싶다. 영업 현장과 가까이에서 일했을 때는 예능과 다큐를 오가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인간미가 넘치는 부장님들이랑 놀 때는 웃기기도 했지만 술을 자주, 많이 마셔서 너무 힘들었다. 꽤 인상적이지만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은 시간들이었다.

 그나저나 '적을 게 있나?'하고 시작한 글인데 실컷 이야기한 게 어이가 없네.



매거진의 이전글 면접관님, 그.. 근데 저는 참을성도 많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