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집에 살면서 느꼈던 것들
강남에는 오피스텔 말고도
집이 많습니다
최악의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낸 다음날인 크리스마스날, 동일한 지역에 집을 알아볼까 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회사가 있는 강남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인천에서 엄마와 이모까지 모시고 택시를 타고 강남의 부동산 중개사무소로 갔습니다. 어머니께서 고향에 계시면서 서울에 집을 알아볼 때 연락한 적이 있는 대리님이 있는 곳이었는데, 크리스마스 당일은 대리님이 쉬는 날이라 동료인 D 과장을 소개 받았습니다.
전날 무슨 일을 겪었고,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니 D 과장님이
"흔치 않은 일인데 나쁜 주인을 만나셨네요."
"그런 곳들은 도의적으로 중개수수료를 그렇게 높게 받지 않는데, 불법은 아니긴 하지만 좀 그러네요."
"진짜 고생 많이 하셨네요. 좋은 집 찾으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귀찮은 내색 없이, 침착하게 매물 리스트를 보여주고, 마음에 든다고 찜해둔 모든 곳에 데려가 주었습니다. 만난 지 몇 분 되지도 않은 사람의 말을 몇 마디 들었을 뿐인데 전날의 상처 받은 마음을 치유받을 만큼 좋은 집을 구할 것 같다는 기대가 몽글몽글 피어났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조금 웃기기도 합니다.
부동산 어플로 확인할 수 있는 강남지역의 집은 오피스텔밖에 없었기 때문에 강남에 다른 선택지는 거의 없을 줄 알았는데, 대로에서 벗어난 뒤쪽으로는 5층 이하의 다가구주택(빌라), 다세대주택(*) 등이 아주 많이 있었습니다. 안 와봤으면 어쩔 뻔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D과장님이 말했습니다.
"직접 안 와보시면 알 수가 없는데, 오히려 수요가 많은 대학가보다 넓고 살만한 집이 많은 편이에요."
예산을 짜봅시다
물론 강남의 집은 대학가의 집보다 월세가 싼 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충분히 강점이 있기 때문에 대학가에 집을 구할 때에 비해 얼마의 지불용의가 더 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서울대입구역 혹은 봉천역 근처에서 살았다면 출퇴근 시간으로 편도 30~40분 정도를 잡아야 했고, 한 달에 5만 원 내외의 교통비도 들기 때문에 강남에서 집을 구한다면 5~10만 원을 더 지불할 용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남에는 회사와 가까울 뿐만 아니라 면적도 넓고 베란다까지 갖춘 집이 많았습니다. 집순이 성향이 강한 저로서는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밖에 나가서 쓰는 돈을 집에 쓰는 셈 치고 5만 원은 더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다만 강남의 빌라들 중 일부는 옵션은 부족했고, 대체로 오래된 집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관리비를 포함한 월세 상한을 75만 원 내외로 설정하고, 보증금 조정이 가능하다는 전제 조건 하에 월세 80만 원까지 알아봤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전세 보증금을 묶어두고 아파트 매입의 기회를 보려고 했기 때문에 월세 보증금 대출을 받기로 했습니다.
강남의 오피스텔은 전입신고가 안 되거나 전월세 보증금 대출이 안 된다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나, 빌라나 다세대주택의 경우 월세 보증금 대출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D 과장님이 설명하기로는 강남에서 빌라나 다세대주택을 소유하고 있는 임대인의 경우 아무래도 자금력을 갖춘 경우가 많고, 큰돈이 필요해서 전세를 내는 경우보다는 현금 흐름을 만들기 위해 월세를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부럽습니다.
직접 가본 다섯 군데는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아래에서 제가 서울대입구역, 봉천역 일대에서 본 집 두 군데와 강남에서 본 집 세 군데를 비교해보겠습니다. 지역마다 집을 구하면서 직접 가본 10여 군데의 집 중 '이 정도면 살 만하다'라고 생각했던 집과 그 이상의 집에 대해서만 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모든 집 사진을 담지는 못했습니다. 각각 집의 보증금과 월세 등 정보가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경우에는 설명을 생략했습니다.
<사진 및 설명 참고사항>
- 서울대입구역~봉천역 일대의 집은 대부분 원룸과 오피스텔이었고, (보증금)/(월세+관리비) 기준으로 1000/65 이내, 강남 일대의 집은 빌라를 중심으로 알아봤으며, 월세는 1000/80 이내입니다.
- 보증금 1000만 원에 대출이자 3%를 적용하면 월 2~3만 원 수준이므로, 보증금 1000만 원을 올릴 때마다 월세는 2~3만 원이 떨어지고, 보증금 2000만 원을 올릴 때마다 월세는 5만 원 정도 낮아지는 정도의 조율을 했습니다. 강남에서는 보증금을 높이기보다는 월세를 높이고 싶어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보증금 상한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 부동산 중개사무소에 따라 월세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모든 집은 직접 방문해보아야 합니다.
1) 서울대입구역~봉천역, 계약을 파기했던 바로 그 집
1000/60
지하철역 도보 5분 이내
발을 디딜 수 있는 면적을 기준(계약서에 명확히 면적이 나와있지 않고 '일부'라고 되어 있었으며, 현재 기준으로 나와있는 매물이 없어 정확한 면적 확인 불가)으로 현관, 화장실, 주방 부분은 다 합쳐 3평이 안 되어 보였고, 이를 제외한 방은 3평 정도였습니다.
부동산 중개업자의 말에 따르면 방의 세로는 침대(길이 2m)를 창문 쪽을 머리로 두면 옷장이 겨우 열리는 정도이고, 가로는 3m 정도라고 했습니다.
옵션으로 빌트인 냉장고, 옷장, 에어컨, 책상, 세탁기, 인덕션 등이 있었습니다.
창밖으로 바로 벽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뻥 뚫려있었고, 남서향이어서 대학가의 집 치고는 햇빛이 잘 들어왔습니다.
2) 서울대입구역~봉천역, 건너편 건물에서 내부를 볼 수 없도록 창밖에 구조물이 있는 오피스텔
1000/68(현재 일자를 기준으로 나와 있는 매물은 2000/60)
지하철역 도보 10분 이내
전용면적 23.14 제곱미터(7평)에 서향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창밖을 중시하는 저는 창밖 구조물에서 마음을 돌렸습니다. 그 외에는 모두 좋았습니다. 하지만 회사에서 다소 거리가 있는 대학가에 살면서 굳이 이 가격을 주고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옵션으로 냉장고, 세탁기, 책상, 에어컨, 옷장, 인덕션 등이 있었습니다.
집을 보러 갔는데, 다른 사람을 데려와서 집에 머물게 하면 1인 1박에 1만 원을 납부해야 한다는 내용 외에 23가지의 특약사항이 적힌 종이를 줬습니다.
3) 강남, 가정집에 가까운 빌라
얼마였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하지만 절대적인 가격이 꽤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하철역 도보 15분 이내
북향이었지만, 집이 기본적으로 넓었고, 방과 주방이 문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베란다도 있어서 가정집의 형태에 가까운 모습을 띠고 있어서 좋았습니다.
옵션으로 가스레인지와 세탁기, 에어컨이 있었습니다. 냉장고는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4) 가장 마음에 들었지만, 가장 비쌌던 집
4000/80이어서 깔끔하게 포기했습니다. 집에 누워서 '아~ 집 좋다~'라고 하면서 위안받고 살 수는 없습니다.
지하철역 도보 10분 이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만큼 번듯하고, 넓고, 창문이 많고 베란다 밖으로 하늘이 많이 보여서 좋았습니다.
옵션으로 냉장고, 가스레인지, 세탁기, 에어컨이 있었습니다.
언덕에 있었던 것이 아쉬운 점이었습니다. 물론 서울의 많은 집들이 언덕에 있습니다만, 그런 것 치고도 경사가 가파른 편이어서 눈이라도 오면 기어올라가고 데굴데굴 굴러 내려와야 할 것 같았습니다.
5) 지금 살고 있는 집
3000/73, 하우스푸어로 살고 있습니다.
지하철역 도보 10분 이내
방 자체가 원룸 치고 굉장히 넓었고, 매우 넓은 베란다가 있었습니다.
베란다를 기준으로 남향이며, 서쪽을 향하는 벽에도 창문이 있었습니다.
냉장고, 세탁기가 없었고, 가스레인지는 폐기 처분해야 할 정도로 낡았습니다.
에어컨, 콘센트, 스위치가 너무 누렇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단점을 감안해도 회사와 매우 가깝고, 집의 느낌이 매우 좋아서 엄마, 이모, 제가 만장일치로 이 집을 선택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가장 마지막에 봤던 집을 선택했습니다. 계약금 150만 원을 부쳤고, 집주인과는 차주 화요일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인천에 돌아가서 어머니와 이모께 맛나는 저녁을 한 턱 쐈습니다. 두 분은 월세 파국 사건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 것이라며, 새로 계약한 집은 어쩜 그렇게 넓고 반듯하고 집 분위기가 좋냐며 좋아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습니다. 월세 파국 사건 때문에 집주인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큰 퀘스트로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 다가구주택은 건축물의 종류 상 단독주택이며, 단독소유입니다. 임대인 한 명에 임차인은 여러 명입니다. 세대별로 구분등기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다가구주택의 전기요금 통지서를 보면 모든 호실의 전기료가 집주인 분의 이름으로 나옵니다. 다세대주택은 건축물의 종류 상 공동주택이고, 여러 세대가 사는 주택으로 각 호실의 집주인이 모두 개별적으로 존재합니다. 물론 여러 호실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외에 건축물의 구성으로 구분되는 특징도 있으며, 소유 및 임대에 대한 세금관계가 달라지기 때문에 구분하고자 하는 것이고, 저처럼 전세나 월세 임차인으로 다가구주택과 다세대주택을 바라볼 때에는 크게 신경 쓸 내용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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