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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잘 사는 진리 Oct 18. 2023

책 리뷰 | 심판 by 베르나르 베르베르

다른 사람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감정을 느낄지 모르는데 제 감정을 또렷하게 드러내는 건 좀 그렇지만, <심판>은 제가 올해 읽은 책 중에 가장 재밌었습니다. ‘책’이라고 쓰고 보니 그건 적합하지 않은 표현 같아요. ‘이야기’가 적당하겠습니다. 이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는 꽤 뻔합니다. 하지만 그래서 인물들의 말과 행동 아래 자리한 마음을 읽게 되어 더욱 흥미롭습니다.


<심판>은 연극 형식을 띠고 있고, 주인공이 죽은 후 받는 심판의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등장인물은 넷입니다.


• 아나톨 피숑
심판의 피고인이자 주인공입니다. 삶이 마감된 후에 지난 생을 돌아보고 다음 생을 결정하는 심판을 받습니다.

• 카롤린
아나톨의 변호인이자 수호천사입니다. MBTI로 따지자면 F일 거예요.

• 베르트랑
이 심판의 검사입니다. 자기만의 판단 기준이 뚜렷하고 냉철합니다.

• 가브리엘
심판의 재판장입니다.


제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 세 군데 있습니다.


* 직접적인 스포가 되지 않도록 노력했지만! 책을 읽지 않은 분들은 유의해주세요!



최애 파트 1 삶의 감각


소설의 가장 마지막에서, 가브리엘은 이 심판의 메시지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행동을 합니다. 그 메시지는 '미워도 싫어도 결국은 삶' 정도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여느 이야기들과 다름없는 뻔한 메시지, 심지어는 심판을 참관하는 내내 흐릿하게 감쳐물고 있던 메시지가 가브리엘에 의해 아주 또렷해집니다. 가브리엘은 이런 말을 해요.


좋아요. 내가 가죠.


그 이후에 이어진 묘사는 삶에 대한 감각은 책을 읽는 순간에도 느낄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고동치는 심장, 송송히 맺히는 땀,
입 안에 고이는 침,
자라나는 머리카락……


저에게는 책을 읽으며 기다리는 순간이 있는데, ‘나를 인식할 때'입니다. 가장 익숙한데 이 순간 가장 생경한 그런 느낌이죠. 가브리엘이 묘사한 삶의 감각들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최애 파트 2 신의 존재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내 인생의 관객이 나이기 때문에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내가 잘하고 있나, 잘 살았나 봐줄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제대로 된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요. 뭐, 좀 중 2병 같긴 합니다만, 나름대로 좋은 깨달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심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베르트랑 : (진지하게) 믿으세요? 모든 걸 관장하는 위대한 신의 존재를?

가브리엘 : 날마다 바뀌어요. 이쪽으로 와봐요.

그녀가 관객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간다. 멀리 관객석 끝에 있는 뭔가를 쳐다보는 듯하다. 뒤따라온 베르트랑은 햇빛을 가리듯 손을 이마에 대고, 실눈을 떠서 구석의 관객들을 바라본다. 그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본다.

가브리엘 : 가끔 그가 저기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우리를 관찰하는 듯이요.

베르트랑 : <그>라면?

가브리엘 : 저들 머리 위에 떠 있는 거대한 눈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든 적도 있어요.

베르트랑이 뭔가를 발견하려고 애써 보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가브리엘 : (비밀을 들려주듯) 그가 몰래 와서 영혼의 무게를 다는 걸 지켜보는 것 같아요. 순전히 호기심으로 말이죠. 훔쳐보기를 은근히 즐기는 것 같아요.


이 대목에서 가브리엘은 신의 존재를 관객에게서 찾습니다. 즉 '관객 = 신'이라는 공식이 성립합니다. 아마 <심판>을 연극으로 보게 된다면 무대 위 인물들과 눈이 마주친 나는 제법 당황하겠죠. 그런데 눈이 마주치기 이전의 나는 어떤 상태일까요? <심판>을 읽는, 다시 말해 <심판>이라는 연극의 관객인 저는 늘 그렇듯이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아래의 공식이 성립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주인공 = 나
나 = 관객
관객 = 신

결론. 나 = 주인공 = 관객 = 신


나는 내 인생을 주관하는 신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최애 파트 3 삶의 형


제가 아는 한 이 <심판>은 판결이 내려지지 않고 끝납니다. 물론 이런 대목이 있긴 합니다.

가브리엘 : 따라서 피고인 아나톨 피숑을 삶의 형에 처합니다.

하지만 심판의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삶의 형'을 피해 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유전 25%, 카르마 25%, 자유의지 50%라는 공식이 몇 번 나오는데요. 삶이 유전대로, 카르마대로, 자유의 지대로 흘러갈 확률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유전, 카르마 같은 것들은 이기려면 이길 수 있는 요소들, 이기지 않아도 누구도 탓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 자체가 자유이기도 합니다. 자유의지를 발휘할 자유, 자유의지를 발휘하지 않을 자유 둘 중 하나를 발휘한 것이니까요. 그 공식이 맞다면 재능을 살리고 자유의지를 죽이든, 자유의지를 살리고 재능을 죽이든, 카르마를 감당하고 나머지를 죽이든 심판의 판결은 '삶의 형'으로 귀결될 것입니다. 판결이 선언되지만 누구에게나 적용될 답정너라 판결만으로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 심판에서 선언보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삶을 돌아보는 작업 그 자체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책을 읽는 동안 '내가 죽으면 어떤 판결을 받을까?'라는 질문을 하기보다는 '저 심판에서 회고하게 될 나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또 그런 질문을 하게 되었어요.

"어떻게 살까?"


베르트랑 : (생략) 그래서 사형…… 아니, 다시 말해 삶의 형을 구형합니다.

이 대사도 흥미로웠어요. 죽음의 상황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는 건, 죽음의 죽음을 의미하고 그것이 곧 삶이니까요.




저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이야기들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만난 이 책이 다른 책도 궁금하게 만들어서 몇 권 더 읽어보려고요. 추천해 주실 만한 게 있다면 추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D


오랜만에 재밌는 이야기를 만나 기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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