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잘 사는 진리 Feb 17. 2024

좋은 선배는 회식을 빠져도 된다고 하지 않는다

좋은 선배의 조건

 대기업 영업/마케팅 본부 6년 차, 영업 지원, 전략, 마케팅팀 등을 거치면서 많은 선배님들을 만났다.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영 안 뽑다 보니 내가 막내가 아니었던 적이 딱 1년밖에 없기 때문에 내가 간 팀에는 온통 선배님들밖에 없었다(지금도 같은 본부에 후배가 세 명뿐이다). 그러다 보니 나이, 성별, 전공 무관 다양한 선배님들과 함께 일했다. 그 와중에 내가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좋은 선배는 절대로 회식을 빠져도 된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번은 회사에서 귀빈 대접을 받는 사장님의 접대 자리가 만들어졌는데, 팀 선배이신 A 대리님이 말했다.

"내가 커버 칠 테니까 너는 회식 오지 마!"

"아녜요. 저도 가야죠!"

 그래도 그분의 사업장 중 하나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 정규 근무 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팀장님과 대리님이 술자리를 하러 조용히 자리를 뜨셨다. 나를 데려가지 않은 대리님께 나쁜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내가 술을 많이 마시는 걸 막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렇지만 스스로가 꼰대라고 이야기하셨던 팀장님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셨을지, 옛날 스타일의 접대에 익숙한, 본인의 부름이라면 모든 회사 일원들이 쪼르르 달려오는 경험만 했던 사장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셨을지 걱정이 됐다. 이때는 뭔가 찝찝했지만 갸우뚱하고 넘어갔는데, 몇 년 후 다른 선배님을 보면서 그때의 찝찝함이 무엇이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B 대리님은 내가 회사에서 본 사람 중에 가장 훈훈한 분이었다. 누님들보다 형아들이 훨씬 더 많은 영업 본부에서 귀염 받고 있는 인재이기도 했고, 오래 만난 여자친구, 이제는 아내가 되신 분과 알콩달콩 사랑하는 모습이 인상적인 분이었다. 어떤 팀장님은 대리님을 우리 본부 최고 미남으로 꼽기도 했고, 후배들은 그 대리님을 자이언트 베이비라고 부르기도 했다. 난 왠지 베이비까지는, 좀, 낯 간지러웠지만 그 큰 체구를 갖고도 넉살 좋은(때로는 애교를 겸비한) 모습을 보이는 대리님께 잘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내가 대리님을 따랐던 건 대리님이 사이다 발언을 종종 하셨기 때문이다. 회사에는 잘못된 리더십에도 아부를 떨거나 차라리 회피해 버리는 사람이 더 많은데 대리님은 이따금씩 본인의 소신을 담아 팀장님, 상무님, 전무님께 간청을 드리곤 했다. 생각한 대로 솔직하게 말하면서도 회사에서의 인간관계가 좋은 대리님이 회사 생활을 진짜로 잘하는 거라 생각했다.


 팀장님이 대리님과 나에게 집에 일찍 들어가라고 하신 적이 있었는데, 나는 '진짜로' 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회사 분위기도 그렇고, 다소 고지식한 영업 본부의 특성상 아무리 좋고 선한 팀장님이라도 팀장님이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쪼르르 집에 들어가면 우리를 안 좋게 보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대리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크로스백을 메며 말씀하셨다.

 "팀장님, 감사합니다. 유진아, 나 먼저 들어간다!"

 나는 순간 미어캣에 빙의했다.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오잉? 진짜 가도 되는 건가? 팀장님이 피식 웃으시며 대리님께 손을 흔들어 주셨다.

 "그래, 내일 보자!"

 나도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의자를 조신하게 밀어 책상 아래로 넣었다.

 "팀장님, 저도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리님 같이 가요!"

 성큼성큼 긴 다리로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는 그 모습에 후광이 비추었달까.

 '아, 찾았다! 내 인생 선배!'

 물론 팀장님이 워낙 좋은 분이라서 가능했던 것이고(팀장님도 인생 팀장님이심), 표현이 좀 오버스럽긴 하지만, 몇 년 전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커버를 당했던 그때가 퍼뜩 떠오르면서 당시 찝찝했던 기분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깨닫게 되었다.


 회식을 빠져도 된다고 집에 가라고 등 떠밀어준 선배는 나의 간을 배려해 주셨지만 회사원으로서 잘 해내고 싶은 나는 조금 덜 생각해 주신 거다. 회식 불참이 평판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어쩔 수 없는 걸! 어떠한 조직이나 공동체의 생리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회사 사람들의 90% 이상이 80-90년대 직장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곳에서는 회식 불참이 악영향을 미친다고 봐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회사에서 평판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을 선택하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나는 신경을 쓰는 사람이다. 그런 나에게 회식을 빠져도 된다고 했던 대리님은 진짜 좋은 선배라고 하기엔, 적어도 나에게는 1%가 아쉬웠던 것이다.


 차라리 '가기 싫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같이 갔다가 눈치 봐서 일찍 들어가자'라고 이야기해 주는 선배가 좋은 선배다. 본인도 안 갈 테니 너도 가지 말라고 하는 선배가 좋은 선배다. 회식은 회사에서 가장 호불호가 갈리는 행위 1순위라 비유격으로 말한 거고, 다른 모든 일이 마찬가지다.


 무한상사에서 유 부장이 '눈치 없이 신년 초부터 직장상사 집에 선물 같은 거 들고 찾아오고 그러지 마세요'라고 이야기했지만 박 차장은 꼭두새벽부터, 나머지 팀원들도 줄줄이 유 부장 집에 찾아갔던 것처럼, 그러는 유 부장이 한복을 차려입고 있었던 것처럼, 회사 생활에서 윗사람의 말은 앞뒤가 다를 수 있다. 후배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좋은 사람이고 싶은 자아도 있고 복종하는 이들을 보며 본인의 권위를 확인하고 싶은 자아도 있을 테니, 어쩔 수 없다. 거기에 어떻게 대응할지는 부하직원의 가치관에 따른 선택이다. 그럴 때 좋은 선배는 후배가 선택한 포지션을 존중해 주는 것이 아닐까.


 사실 회사에서 나의 평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말을 늘어놓기가 무색하게, 요즘은 체력이 예전 같지 않은 데다 역류성 식도염이 수시로 찾아와서 예전 같으면 갔을 회식 자리를 '에라, 모르겠다' 하고 내빼기도 한다. 야근을 하더라도 팀장님을 따라 하는 건 옛날이야기고, 지금은 그냥 일이 있으면 하는 정도이고. 예전과 달리 밝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을 잃은 채 자리를 지킨다. 나는 그렇다고 해도, 후배가 자아를 가지는 데에 방해를 하지는 않는다. 팀에 후배가 있었던 건 고작 1년밖에 안 되고, 후배라고 하기엔 나보다 고작 1년 늦게 들어온 친구이다. 회사 일을 잘 해내고 싶어 하는 후배가 고지식하지만 그래서 더 사랑받을 만한 행동을 하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내가 눈치 보느라 못하는 일을 너는 하라고 말하지도 않았고, 내가 눈에 들고 싶어 하는 행동을 너는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고지식하다고 조금 놀려주긴 했다. 지방 근무 선배로서, 현장 영업을 위해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는 그 녀석에게 비즈니스 캐주얼을 꼭 차려입고 가라고, 그러면 부장님들, 거래처 사장님들이 답답한 녀석이라며 좋아하실 거라고, 만약 그런 걸 원한다면 좋은 방법이랍시고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나름대로 커버 대리님과 자이언트 베이비(?) 대리님을 보며 익힌 선배로서의 미덕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었다.


근데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나는 좋은 선배가 되고 싶었던 건데, 좋은 선배가 아니라 젊은 꼰대인 걸까...




같이 읽으면 재밌는 글!


매거진의 이전글 첫 미팅 이후 다음에 또 만나고 싶은 업체 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