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님, 주말, 등산 01
부장님, 주말, 등산
2020년 11월, 남부장님과 등산을 다녀왔다. 부장님, 주말, 등산 세 개 중에 어떤 두 개를 같이 붙여도 이해를 못할 판이라 다들 자발적인 거냐고 묻는데, 자발적인 것 맞다. 부장님들은 요즘 애들이 싫어할 게 분명하니 후배가 먼저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절대 먼저 제안하지 않으신다.
나는 연고가 없는 부산에서 잠시 지방근무를 하는 중이었고, 우리 팀 6명 중 나를 제외한 5명이 부장님이었다. 나는 철저한 막내 사원이었고, 내 바로 위의 선배는 나보다 15살이 많은 부장님이셨다. 가족도, 친구도 없다보니 부장님들 아니면 놀 사람도 없었고, 떠날 때 떠나더라도 부산에 살았다고 주장할 수 있을 만큼 알고 떠나고 싶기도 했다. 산에 관한 한 우리팀에서 부장님을 능가할 사람이 없으니 부장님께서 금정산이 좋다는 이야기를 하셨을 때,
"평일이 안 되면 주말도 괜찮은데 저도 데려가주세요, 부장님!"
했다. 사실 모든 부장님께 이럴 수는 없고, 우리 팀 부장님들은 다 좋은 분들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다른 팀 부장님들한테는 무조건 비밀이다. 합류 인원을 모집하고자 팀 카톡방에 등산 일정을 올렸으나, 고작 3일 뒤 일정이라 다들 상경을 비롯한 개인적인 일정이 있었고, 부장님과 둘이 등산을 하기로 했다.
부장님의 등산 철학
부장님은 산을 오를 때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는 산에 오르는 것 그 자체를 목적으로 두는 편이라 하셨다. 나는 아무거나 상관없었다. 대체로 나는 아무거나 상관없는 편이긴 하다.
"부장님, 여기 바위틈에도 꽃이 피어있어요."
"햐, 그걸 발견했네."
"하늘 좀 봐. 너무 좋지 않나?"
"그러니까요, 부장님. 오늘 날을 너무 잘 골랐어요."
"부장님 저것 좀 보세요. 색이 너무 이쁜데요? 저런 거는 사람이 못 만들어내는 색일 거예요."
"그래, 이런 걸 보면서 산을 타야지 진짜 등산을 한 거야."
부장님과 나는 이런 감성적인 대화를 해가며 산을 올라갔다. 내가 찍어준 장면마다 사진을 찍고 계신 부장님께 문득 감사한 마음이 들었는데, 부장님이 우다다다 정상을 향해 달려가는 분이었다면 이 등산이 아주 힘들고 다음을 기약하기 싫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거나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늦더라도 이렇게 주변을 살펴가면서 올라가는 걸 나도 좋아하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정상에서
정상에 올라서 부장님과 나는 부산과 김해, 양산이 다 보이는 곳에 앉아 금정산성 막걸리를 한 잔 하면서 30분 넘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앉아있었다. 해운대에 있는 장산에 혼자 올라갔을 때는 사실 머물러 있을 곳이 마땅치 않아서 잠시 어물쩡거리다가 내려왔는데, 금정산은 그래도 판판한 곳이 많았다. 내려오면서 맛있는 걸 먹을 거니까 대충 과자를 사서 올라갔는데, 컵라면을 챙겨 와서 정상에서 먹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부장님, 우리도 컵라면이랑 뜨거운 물 챙겨올 걸 그랬나요?"
"그러게... 아냐, 우리 파전에 국수 먹어야 돼."
"네, 크크."
금정산 정상의 이름은 고당봉이다. 고당봉은 할머니의 집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이날 할머니의 집에서는 어느새 사람들이 많아서 고당봉 비석과 사진을 찍으려면 꽤나 기다려야 할 지경이 되었는데, 사람이 나오든 말든 정상을 한 번 찍었다는 증거만 갖고 돌아가고 싶어 하는 노인 한 분이 계셨다. 어르신은 부장님께 사진 촬영을 부탁하셨다.
"거 양반, 사진 잘 찍는 것 같은데 나 여기 뒤에 아무렇게나 나오기만 하면 되니까 대충 찍어주소."
나름대로 둘러보며 사진사를 고르셨나 보다. 그러고 나서 어르신은 고당봉이라는 글자가 보이긴 하려나 싶은 낮은 곳에 얼추 자리를 잡으셨다. 사람이 많아서 다른 사람이 사진에 나왔다. 아무도 없는 배경에 정상석과 본인만 나오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날 나는 사람이 많은 사진에서 나오는 감성을 발견했다. 혼자 산을 타는 중년 여성, 알찬 참을 챙겨 온 가족을 보며 산을 오른 저마다의 이유를 상상하게 되기도 했다.
나와 부장님은 어르신을 찍어 드린 다음 아래로 내려가서 고당봉이라는 글자가 보이는 곳에서 멋드러진 사진을 찍었다. 아무도 없는 적막한 정상보다 더 멋지게 나왔다. 흔치 않은 사진이 되었다.
등산의 정수
부장님께서 내려오는 길에 파전과 두부김치, 국수를 사주셨다. 세상 완벽한 등산이 됐다. 제가 산을 타는 이유는 앞으로 파전과 두부김치, 국수다. 그거 없는 곳은 산이 아니다. 땀 흘린 뒤의 막걸리와 파전, 무심하게 내온 국수는 환상적이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부장님과 또 등산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