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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di Mar 20. 2016

아가들의 투쟁 10

여행은 시작이자 끝-에필로그이자 프롤로그


 2010년 2월  ㅡ뉴욕에서  인도를 경유해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동선은 좋지 않은 비행 코스였지만 어쩌면 내게 마지막 여행이 될것이므로 굳이 뭄바이에 들르도록 무리를 한 것이다.


  당분간 나는 어디도 가지못하게 될 테니까, 하고싶은 것들을 할 수 있는한 하고싶었다. 그리하여 필라델피아에서  Beck institute의  cognitive therapy course (인지 치료 과정) 를 수료하고, 동시에   미국 의사 시험 중 일부 치르고 오는 길이기도했다.


 나는 다시 한국에서 레지던트를 하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다. 영영 에 돌아오지 않을까봐 걱정이 된 아빠가 직접 병원에 레지던트 지원 원서를 내셨고, 면접까지  일사천로 진행되었다.  면접 보는 교수님이 "도망가지 않을꺼지? " 하고 물어보셨다. 힘든 소아청소년과 수련인만큼, 수련 기간에 도망가는 선배들이 많았던 탓이다. 나는 좀 생각하다, " 제가 도망가면, 아빠가 슬퍼할 것같아서 도망가지않을 겁니다. "  라고 대답 다.  나와 나이가 비슷한 딸을 가지신  교수님은,  어쩐지 면접에는  부적절한  대답이   마음에 드신 것 같았다.  사실 6년이나 지난 지금 생각해도 , 그보다 더 진심인 대답도 없는 것 같다. 레지던트 기간도 그랬다. 부모님이 슬퍼할까봐 , 그다음엔 동료들이 힘들어까봐, 그다음엔 내가 없으면 왠지 죽을것같은 미숙아 신생아들 때문에,  어디론가 다시 떠날 마음을 접고 다른 동료들이 도망갔다 돌아올때도  아가들이 죽어가고 살아날때도  나는 떠나지않고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곰 여자는 1월11일 , 2012 년도에 이런 메모를 끄적이게 되는 것이다.


< 곰은 백일동안 동굴에서 마늘을 먹으면 사람 여자가 되는데...그래서 사람 여자가 된 곰은 240일동안 지하nicu에서 ....아픈아기들을 돌보고 생활과수면과 사회적 관계들을  박탈 당한 후..아기들이 담보라 날아가지못하는 선녀가 된다 . >


    어쨌든,다시 레지던트 시작하기 직전의 그 마지막 여행으로 돌아오자.

뭄바이에서  인천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는 새벽발이었다.  하루에 한 편 밖에 없어서  사람들이 북적였다.  내  좌석엔 감이 좋은  정장에 매끈한 넥타이까지 단정히 맨 나이 든  인도인 신사가   앉아 계셨다. 그는 내가  창가석인  자리로  들어가 양해를 구하자 ,되려 무릎을 굽히며

"미안해요, 내가 장애가 있어서..... " 하고 자신의 굼뜬 행동을  사과했다.  이후  나와 말을 튼 신사는,  뭄바이에서 서울로 가는  내내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 내가 왜 뭄바이에 있었으며, 무얼 보았는지 ,  어떤 생각을 했는지 등등..... 나는  주로 답하는 입장이었는데, 인도를 한번도 가보지 못 해서 뉴욕에서 서울로 돌아갈때 한번은 꼭 들러보고 싶었다고, <그래서 저는 겨우 하루반을  인도를 경유하게 되었고, 1박2일의 짧은 거리 관람을 했어요 > 한번은 인도가 어떤 곳인지 잠깐이라도 가보고싶었다고ㅡ 짧은 시간 동안 아름다운 것들을 보았다고 답했다.  사치스럽거나 유명한 것들보다는,  더위에 계속 거리에 누워있는 개들 이라든지, 나를 순진한 눈으로 보면서 따라다니던 소들,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친절한 얼굴들 같은 것,  어느 곳에 가던지 유니크한 인종적인 캐릭터가 보이는데, 미국인들은 손으로 만드는 따옴표 제스츄어( " " ) 를 많이 쓰는데, 인도인들의 경우 고개를 살짝살짝 좌우로 시계추처럼 흔드는 제스츄어를 많이 쓴다, 등등의 이야기.


" 내 아들이 너와 생일이 똑같아"

그가 말했다. 내 생일까지 호구 조사를 마친 끝이었다. 그는 인천을 경유해서  다시 LA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 곳에서 기다리는 아들의 생일을 축하해줘야한다면서.

 그리고 그는 내가 인도에  인연(connection) 이 있다고 말했다.

" 가족중에서 너처럼 인도나,명상이나,사람들에게 관심있는 사람이 너 하나뿐인가? "

그는 내게 물었는데,

" 그렇죠. 나를 제외하고는 내 직업군이나 가족 중에서, 나와 비슷한 사람은 아무도 어요.나는 실용적인 학문을 택해서  몽상가적 기질을 보상고 있구요."


하고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믿는다고 말했다. 이처럼 이방인인데 믿어주는 것이 신기했지만, 또 어떻게 보면ㅡ 이방인인데 믿어주는 것이 무엇이 해가 되랴.

 그는 내가 아는 누군가를 닮았는데,  비슷한 누구도 떠올릴수가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내게 매우 친근한 느낌을 주었는데 나는 그 느낌이 어디서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과 그의  70평생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이야기  주었다.


" 나는 4년전에 아내를 잃었단다. 마누라는 브라흐만 계급(인도 카스트계급 중 최상위층)의 여성이었는데, 장인 어 결혼하기 전에 내게  조건을 내걸었어.<너 스스로 네 힘으로 자립해야 한다.> 하고.  "

그리하여 그는 원래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나긴 했지만 , 장인말대로,  사랑하는 와이프와 함께 하기위해서 열심히 일해서 집안을 벗어나 자립했고, 장인의 허락을 얻어 결혼할수 있었다고 했다.그는 아내를 많이 사랑했고 그리워하고 있었다.


"다리는 언제 안 좋아졌어요?" 내가 물었다.

"2007년이지,그게. 당뇨가 아주 심해졌거든."

그의 다리가 안 좋아진 시 그가 아내를 잃은 시기 겹쳤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질병에 대해 좀 더 말했다.

"인생은, 사랑과 행복에 관한거야.(life is all about love n happiness).나는 뭄바이며, 런던이며, 미국, 독일, 프랑스, 대부분의 유럽을 다 돌아다녔는데, 질병이 나를 덮치고나서, 세상을 보는 내 눈이 많이 바뀌었지. 난 더 이상 자유롭게 다닐수 없었을거야 .내 다리는 괴사가 진행되서 절단해야했으니까.  그런데 신이 내다리를 구하셔서,그래서 자르지않을수 있어 아직도 여행할 수 있지. 나는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이제 다른 젊은이들에게 내 지식을 베풀며 살아가려해. 나는 로펌을 가지고있고, 젊은 법률인들,변호사들에게 내 지식과 know how를 알려주고 있다네.  "


그는 계속 말했다.

내 손을 바라보면서, 그는 내가 예술가의 손을 가졌으며 내 재능으로 사람들을 도울 것이고, 남들을 도움으로 인해  나도 도움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그랬으면 좋겠네요... "

나는 답했다. 그리고 왠지 겸연쩍어져 화제를 돌렸다.


"오쇼 라즈니쉬 아세요? 그가 내가 인도에 대해 들러보게   이유에요."

  사실은 뭄바이가 아니라,국내에서도 유명한 명상가인 오쇼라즈니쉬의 명상센터가 있는  Pune(푸나)에 들려보고싶었던 차였다. 그러나 그곳이 며칠전에 테러로 위험해진터라,마음을 접고 뭄바이만 살짝 보고 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마지막 여행이다 싶은 만큼, 가보고싶은 곳은 다 잠깐씩이라도 들러고 싶었다.

" 아 그럼.. 알다 마다. 그가 명상가로 시작할때(start up)  내 집에서 몇 달을 머물렀는걸. 그의 눈매는 총알같았어. 영혼까지 뚫어버릴  같았다니까. 그가 어찌나 진실을 말하던지."


" 당신의 집에 그가 머물렀었다니 신기하네요.."


"그렇지.. 그게 신비고 기적이지. 1000명의 사람들 중에, 우리가 서로의 진동을 지각하고 뭔가 인연이 있는 사람을 찾아낸 다는것이 말야. 그래서 내가 너와  대화를 해야겠다고 느꼈었어. 여러가지 질문들로 너를 괴롭혔지만, 나는 네 여행에 대해 이야기 해주어야한다고 느꼈거든."


"정말로 신기해요"

내가 대답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가 알게 된다는 것은, 인연은 신기하지.. . 나는 뉴욕에 두고 온 나의 친구들과, 한국에서 나를 기다리는 친구들을 떠올렸다.


"여행이 널 가르치는 거아. 책에서 알 수없는 것들을 사람들과,여행에서 배우게되지."

"맞아요...경험이란게 중요하죠. "

" 결혼 할거니?"  그는 내게 다시 물었다.

" 네, 뭐,  내 부모님은 제가 빨리 결혼하길 바라지요."

"누구를 만나든,  네 가치를 감사히 여기고, 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그가 따르든 아니든, 그는 너의 신념과 네가 가치있게 생각는것을 반드시 존중해야 한단다. "

"네..."

"너는 곧 그를 만나게 될거야, 그리고 내 생각에 너는 여행중에 그를 만날 것같구나. "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이제 여행을 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당분간은.."


그는 그의 검지 손가락을 내 이마에 올려놓았다.

" 너는 초월적인(transcendental) 상태에 있어."


그러나 그의 말은 나를 좀 슬프게 만들었다. 여행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은 것들을 배우고 느꼈건만, 이제 다시 겪어 나가게  한국 병원의 부정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올바르게 느끼고 성장해 나갈수 있는지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비행기는 무사히 인천에 도착했다.

그는 도착지에서 나와 생일이 같은 아들을 무사히 만나고  사람들에게 그의 지식과 노하우를 전달해주면서 가르칠 것이고, 나는 병원에 있을 것이고. 아마도 다시 우리가 만날 일은 없겠지.

이런 느낌이 내게  안녕히 가시라고 여러번, 그리고 오랫동안 그에게 인사하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은 다리가 불편하니 먼저 가라고 했고, 나는 계속 뒤를 돌아보며 그가 비행기를 빠져나는지를 계속 확인했다.


 

*

  레지던트 시작하기 전 , 뭄바이에서 서울로의 짧은 비행동안 다른 여행자와 잠시 겹쳤던 마지막  여행의 에필로그이다.  영어로 기록해 놓았던  이 노인과의 대화를  다시 정리하면서,이 노인과의 대화를 나누었던 이때가   어떤  의 마무리였던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이제 든다.


  육체적인 피로보다는, 항상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져야하는 직업특성에 어울리지않는 내 심장때문에 힘들어, 늘 다시 떠나고 싶어하면서도, 나에게 있었는지도 몰랐던 책임감때문에 그러지 못하였다. 그러다보니,어느사이  어느정도 더 단단해진 내가 여기에 있었다. -노인의 충고처럼  - 나의 가치를 존중해 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났고 이번에는 함께,인생이라는 거대한 여정을 함께 하고있다.

나는 나의 여행에서  내가 떠나오고 떠나보낸 모든 이들에게 ㅡ그리고 아가들에게 , 안녕ㅡ이라고 말하지않고, 언젠가 다시 안녕?ㅡ하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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