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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di Mar 12. 2016

아가들의 투쟁 7

안녕이라고 말하지마

 2011.12.1


이번에 죽은 아가는  IVF   24주 차였다. 쌍동이였는데, 남아가 먼저 죽었다.쌍동이일경우, 대개는 여자애들이 살게된다. testosterone 이라는 남성호르몬이 생존엔 큰 도움이 되지못하고, 여성호르몬인 Estrogen은 폐를 성숙시키는데 도움을 주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아가는 , 570g 이었다.

570g. . .

이렇게 지구에 닻을 내리기엔 너무 가벼워서,

제 몸무게만큼도 사랑받지못하고 떠난 아가.


심폐소생술을 멈추고,이제 가느다란 몸에 이어낸 모든 튜브를 빼고 시신을 정리한다. 인튜베이션 튜브를 빼자

꼭 마지막 영혼의 한자락이 이제 빠져나가듯  배와 가슴이 폭 꺼지며  아가가  한숨을 쉰다.

사실 이미 아가는 죽어서, 숨을 쉰다기 보다는 인튜베이션 튜브로 들어갔던 공기가 나오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 한숨이 마지막 숨같이 애처로웠다.


  힘들게 얻은 애기를 뱃속에서 키우고 또 너무 빨리 태어나버려서 다시 자신의 손에 닿지않는 곳으로 보내야하는 엄마의 눈물을 본다. 곁에서

그 남겨진 사랑을 주지못해서,

자신도 몸을 풀지못하고 조리도 못한채 엄마는 그저 죄인처럼 울고있었다.

어쩌면 떠나버린 아가가 가질수있었던 어떤 사랑,어떤 가능성.

미안해,미안해,

  삶을 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 눈물을 보면서, 내가  너무 어려서,   주지못한 사랑들을 함께 떠올리지않을 수가 없었다.

주지못해서 내 안에서 저렇게 사그라든 사랑들과 가능성들.

저 아가에게 있었을지도 모르는 무수한 가능성들. 아직 무엇도 못되었지만 무언가 될 수 있었기에 아름다운

그 가능성들이 이렇게 쉽게 한숨을 폭 쉬고 떠나버린다.


이러한 광경들을 아무리봐도 그 타인의 슬픔에 익숙해지지가 않아  울음이 목끝까지 올라오곤했다.

그리고 이럴때는  자동반사적으로 이 몇년 전 인턴때   병원 수련 교육 부장이 몰아붙이던 말이 생각난다.

 -사람 죽는거 처음봐?환자죽는게 뭐 별일이야? -

그러고는, 곧 뒤따라오는 기억의 편린이 다시 나를 괴롭힌다.

 -좀 억울할수도 있지... 난 일부러 내 아들 아무 이유없어도 때리기도 해,세상 억울한거 좀 알으라고.

너도,그런거야. 그래,네가 ** 지점 인턴 점수 1등이고 전체등수에서도 5등안에 들었어. 그건 사실이지만 병원 프로그램상 너무 한 지점에서만 점수가 높게 나오면 타 지점병원의 인턴들과 형평성에 어긋나서 점수를 깎기로 한거야.  받아들여. 세상에 좀 불공평한 일들은 받아들이라고.-

자세한 사건은 각설하겠지만  그 무감각한 말들은 이제 와 생각해도 변명에 불과했던 것같다. 아마도 본원출신을 우대하는 일들일것이었겠지. 혹은 학교성적이 안 좋은 내가 본원 애들보다 인턴점수가 너무 좋게나와 트집을 잡으려고 그랬겠지.  그러나 그 변명은 여전히 내 기억에 남아있어서, 슬픔에, 억울함에, 무감각해지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으로 언제까지나 '나를' 부끄럽게 만들곤했다.

  당시 나는  그 무감각함에 충격을 받았었는데, 내가 충격을 받는다는 사실에 나는 또 부끄러움을 느꼈다.  어린왕자에서 술을 마시는것이 부끄러워서 술을 마시는 술꾼처럼, 나는 부끄러워서 또 부끄러웠다.

억울한 일을 당하는 내가 부끄러웠고,  억울한 일이 없었던 것처럼, 누구도 나를 헤치지않았던것처럼,

슬퍼하지않는것처럼 굴었다.

   인턴이 끝나고 레지던트를 시작하기 전까지,나는 한국에 살고싶지않다,고 생각하게까지 되었다. 미국에 달라이라마를 만나러가고, 명상센터에 가기도 하며 스스로 아무일도 없는것처럼 상처따윈 없었던것처럼  즐겁게 지냈다. 뉴욕에서 만난 모두들 나를 좋아했다. 즐겁고 평화로왔다. 그곳에서 살고싶었다. 명상을 할 때 사람들을 용서하는 연습을 하고,누구나 잘 해주고, 아무나 믿을 수 있어 행복했다.

  그런데 다시 한국,지하 어딘가에서 다시 그 부끄러움에서 빠져나오지못하고 여전히 부끄러워하고있는것이다.

내 마음속에 뿌리박혀있는 깊은 부끄러움은 생각날때마다 나를 더 부끄럽게 했다.그냥 나 혼자 삭힌 슬픔은 당직실에서나 풀어헤치면 되는데, 가끔 헤일이 치면,가끔  눈물이 울컥 치밀어오르는것까지는 막을 수는 없었다.


내 앞에 죽음과 삶이 교차해서 지나가고 있는 순간들을 끊임없이 목도하는 것은 마음이 약한 나를 정신력의 끝까지 몰아붙였다. 둔감해져야만 하는데 그게 잘 안된다. 그러나 이것은 나 자신의 상처나 슬픔에 몰두하지 못하게하는 순기능도 있어, 나를 끊임없이 겸손하게 만들고 신앞에 고개 숙이게 만들기도 했다.  


  제태 연령 24주, 태어나자마자 함께 자라왔던 동생을 잃었지만 누나는 아직 살아있었다. 폐계면활성제(미성숙한 폐를 성숙하게 해주는 약제)를 몇차 쓰고,심장의 구멍을 닫히게 하는 약을 쓰고, 인공호흡기를 조절하면서 생존을 하더라도 미성숙한 장기하나하나가  성숙해지는 과정은 지리하고도 멀다. 곧 한번씩은 지나가는,그러나 고비마다 몇명의 아가들을 잃곤하는, 괴사성 장염을 또 잘 넘겨야한다. 쉽게 말하면 장이 아직 미숙해서 감염이 쉽게 와,배가 썩는 그 고비.  

아가의 조그마한 배가 1cc의 모유도 받아먹지못하는데 풍선처럼 빵빵하다.  소변도 약의 힘으로 보고 ventilator(인공 호흡기)가 없이는 폐를 펴지도 못하는 한 줌 밖에 안되는 작은 아가. 목구멍에 관을 꽂아 놓은 탓에 울고싶고, 울고 있어도우는 소리를 낼 수 없어  눈물만 그렁 그렁 고이고 있다.

   저 작은몸도 저렇게 삶을 견뎌내야만한다.

엄마품에 마음껏 안기지도못했고,마음껏 숨을 쉬어보지도 못하고,피검사를 끊임없이 찔리고 붙들려서 고통을  받으면서도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기위해 저렇게 조그만 손발을 움직이며 살아보겠다고 한다.


 ... 힘들게 태어났는데 왜 이렇게 힘들기만 해야해,하고 불평할수도 없게..  기한도 없잖아,기약이 있다면, 고통스럽지않아질때까지, 이 고통이 끝은 난다는것을 아가가 알 수 있을까?


미안했다. 나는 숨쉬는거는 고통스럽지않은데...  내게 당연한게 그 아기들에게 당연하지않아서 미안했다.

내 고통스러운 기억은, 나의 고통은  작은 아가의 제 몸보다도 커다란 고통안에서  너무도 미약했다.


아가의 손가락을 잠시 만져보면...살이 닿지않는 인큐베이터안에서 정받지 못하고 안겨보지못한

그 작은 몸의 작은 손가락이 반사적으로 내 손가락을 꼬옥 잡는다. 장갑사이로 온기가 닿는다.

 

' 아가야,지지마,힘내. 살아남아서 사랑받고 사랑하고 살아야지. 그래야지 이 이야기가 성립되는거야...

유리벽밖에서 네게 자장가를 불러주던 엄마 손을 잡을수있을때까지,안겨볼수있을때까지,그래야지만 끝나는 이야기인거야.

그러니까...힘내.힘내. 힘내... 하나님 꼭 도와주세요.이 아가에게 내 수명 대신 하루라도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제 수명 1년정도만 드릴테니까 이 아가가 한돌만 살게 해주세요. 그러면 적어도 엄마 젖도 한번은 직접 빨아볼테고 엄마가 집에가서 아가를 안아볼 수도 있을거고,

편안한 요람에서 자장가를 들을 수도 있을테니까요.'

 

그 기도가 얼마나 부질없고, 나중에 뇌내 후유증이나 다른 생존후 후유증을 안고 살아야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어떤 부모들에게는 오히려 성치못할때는 포기하는 것이 더 축복일 수도 있는데도, 나는 그런 기도를 끊지를 못했다. 내 욕심이라고 욕해도 그때는 절박하게 그랬다. 제발,안녕이라고 말하지마....


가끔은 단말마같은 낙서를 하기도 했다.

< 왜 자꾸...>

<악하다, 악해>

가끔은 영어로도 .

<Today I strongly require the face to face conversation with God. I have something to talk to.>  (나 오늘 하나님과 얼굴보고 대화좀 강력히 요구한다.  나 할말 좀 있어.)


핸드폰으로도,메모를 끄적인다.

 나와 아가들은 신생아 중환자실의 심연에서  빠져나와,살아남기도 하고, 영원히 꽃피지못하고 씨앗인채로 죽기도 했다. 이 24주의 남은 누나는, 헌신적인 동료  J와 레지던트와 교수님들과 간호사들의 잠을 계속해서 설치게 했지만, 그러나 그 길디긴 겨울을 살아남았다.

그 동생이 못다 간 길을  누나는 이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나는 동안, 내 마음속의 오랜 상처들도

죽을 것은 죽어 묻어버리고, 어떤 묵은 상처들은 치유되고, 새 살이 돋아 명랑해진다.

내 마음은 NICU의 어린 아가들과 함께 죽어가고 살아났다. 그 나를 상처입혔던 무감각함, 때로는 그들의 것이었고 때로는 나의 것일 수도 있었던 그 무감각함 속에서 나온 상처는 땅속에, 지하 NICU 어딘가에,

언젠가 그 것들을 거름으로,무언가 새생명이 돋기를 바라면서,죽은 아가들 곁에 외롭지말라고 두고 왔다.

그리하여 아가들이 살아나면  내 마음도 꽃밭이 되었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건방지게 요구했던,신과의 대면상담의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i will be here, beside of u while sleeping. for u not to be afraid when u wake up.


"사람 죽는것 처음 봐?"

지금 물어도 내 마음은, 부끄러움없이  똑같다.

 또 무수히, 무수히 봐도 아직도 나의 마음은 ... "안녕이라고 말하지말아요."

 

드디어 몸무게 1000g이 된 기념적인 날, 아가는 내게 웃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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