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어떤 궁금증이든 아이들이 아무리 어려도 이해할 때까지 문답합니다. 이를테면 “유튜브는 왜 엄마, 아빠 허락받고 봐야 해?”, “일기는 꼭 써야 해?”와 같은 투정부터 “아기는 어떻게 생겨?”, “엄마, 아빠가 밤에 보는 드라마를 왜 우리는 보면 안 돼?”와 같은 민감한 문제, “인간은 하나님이 만든 거야, 아니면 원숭이가 진화한 거야?”,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건 나쁜 거야?”, “전두환은 정말 그렇게 나쁜 사람이야?”, “그럼 박정희는? 노무현은?” 따위 복잡한 주제까지 시공을 가리지 않고 툭 던지는 질문에 단 한 번도 “너흰 아직 어리니까 시키는 대로 해”, “몰라도 돼” 또는 “크면 알게 돼” 한 적이 없습니다. 아이들과 문답할 때 지키는 하나의 원칙은 대척점에 있는 반대 의견들을 반드시 제시하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의 선택,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은 마지막에, 아이들이, 스스로 세웁니다. 오래된 가풍이며, 변하지 않을 원칙입니다.
아이들은 언젠가 반드시 물을 겁니다. 인종차별에 대하여…… 아내와 저는 그 시기가 오면 아이들과 나눌 이야기를 준비해야 합니다. 최근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 차별 반대 시위를 보면 그 시기는 예상보다 빨리 올 수도 있습니다.
넷플릭스 한국 지사가 조지 플로이드 살해 사건으로 촉발된 인종 차별 반대 시위와 관련해 비판을 받았습니다. 미국 본사가 트위터에 게재한 “Black lives matter”를 리트윗 하면서 “우리 모두의 삶은 중요합니다”라고 적은 탓입니다. 왜 그 문장이 문제가 됐는지 언뜻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해당 내용을 다룬 기사를 읽기 전까지는 말이죠. 넷플릭스 한국 지사가 리트윗에 덧붙인 문장의 영어 원문, “All lives matter”는 인종차별 반대 시위를 폄하하는 사람들이 수년 동안 내세웠던 구호라는군요. 역사와 맥락을 입어 상징화된 셈이죠.
흑인을 차별하는 법제도는 더 이상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미국조차도 남북전쟁 이후 수정 헌법 13조(노예제 폐지), 14조(시민권 보장), 15조(참정권 보장)을 통해 차별을 금지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섯 세대도 더 지난 아직도 인종차별 반대 시위는 끊이질 않습니다. 슬픈 예감은 우리 세대, 아이들의 세대가 끝나는 시점에도 여전히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100년쯤 뒤에도 '인종차별의 역사' 웹페이지는 (만일 그때까지 존재한다면) 위키피디아에 누군가가 이따금씩 업데이트할 것이며, 오늘 미국의 시위는 그 페이지 2/3 지점쯤에 스냅샷으로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인종차별은 결코 인류사의 독특한 단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적 드문 지하철 역, 다음 열차 시각까지 10분도 넘게 남았습니다. 왠지 모를 썰렁한 공기에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합니다. 승강장 안으로 흑인 두 명이 천천히 내려옵니다. 느릿느릿 제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듯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집니다. 눈치 채지 못하게 뒤로 물러 시야를 확보하고 옆으로 멘 가방을 움켜쥡니다. 열차가 도착할 때까지 두 젊은이의 움직임을 곁눈질합니다. 열차에 올라 여유 있는 흑인 앞자리를 비워두고 백인 옆자리에 앉습니다. 같은 날 저녁, 공교롭게도 집에서 멀지 않은 난민 시설 근처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아무 근거 없이 아랍계 또는 아프리카계 난민이 범인이라 추측합니다. 다음 날 출근 전철을 탈 아내에게 당부합니다. “전철 기다릴 때 레일에 너무 가까이 붙어 있지 마, 알았지?” 걸어서 학교에 가는 아들에게도 말합니다. “내일은 특별히 아빠가 태워다 줄게” 참으로 물색없기 짝이 없습니다. 물론 갑자기 왜 그러냐는 아내와 아들의 물음에 “그냥”이라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
“편견을 버려야겠습니다” 따위 개선 여지없는 반성은 접어두렵니다. 편견은 무리 짓고, 구분하는 인간 사고의 효율성에 따른 부산물이기 때문이죠. 나와 너, 그의 구분은 각각이 가진 개별성보다 속한 집단의 ‘알려진’ 성격에 기초합니다. 피부색뿐만 아니라 성별, 민족과 국적, 언어, 종교, 학교, 직업과 직위, 사는 동네, 집의 크기, 나이, 결혼 여부, 자녀의 유무와 성별 구성, 생김새와 옷차림, 말투, 목소리 따위에 의해 구분된 집단성이 개별성을 대체합니다. 이 가운데 피부색, 성별, 민족과 국적, 종교와 같이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정체성에 따른 차별 문제가 도드라지는 것은, 여러 차별 가운데 그것들만이 옳지 않아서가 아니라 단지 그것들에 따라 구분된 집단 별 규모가 크기 때문 아닐까요? 인종차별의 본질은 다른 차별과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한낮에 지저분한 뒷골목 계단에 앉아 행인들을 음흉하게 쳐다보는 미국 흑인들, 엄마 무릎에 멍하니 파묻힌 깡마른 아프리카 흑인 아이들, 터번에 복면까지 두르고 총질해 대는 아랍인들, 멍한 표정으로 구걸하는 남부 아시아인 들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한 인종차별 반대 시위는 사그라들지 않을 겁니다.
아이들이 차별에 대해 묻는다면 오래된 가풍을 거역할 겁니다. 아이들에게 가치 판단의 선택지를 주지 않을 겁니다. 어떠한 차별도 옳지 못한 것이며 아빠를 포함한 세상 모든 사람들의 탓이라고 말할 겁니다.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과 같은 명백한 차별 행위뿐만 아니라, 빈민가 장면에 흑인 배우만 등장하는 수많은 영화,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흑인 아이만 보이는 천편일률의 기부 단체 광고, 분쟁 지역이 아니면 취재에 인색한 중동 관련 국제 뉴스, ‘소매치기와 구걸하는 사람들을 주의하세요’가 빠지지 않는 동남아시아 여행 일정표 따위와 같이 나쁜 의도 없는 행위 또한 차별의 원인이라고, 그래서 살아가는 동안 차별에 대해 끊임없이 인식하고 말해야 한다고 말할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SNS에 해시태그를 달고 피사체 없는 검은 배경을 싣듯이 그런 작은 행동이라도 해야 한다고, 그래야 아무렇지 않게 행해지는 차별도 드러난다고, 그렇게 대답할 겁니다.
저는 “우리 모두의 삶은 중요합니다”가 차별 반대의 구호로써 더욱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두의 삶’ 대신 ‘흑인의 삶’이라 말하는 순간, 피부색에 따른 인간의 구분이 정당화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