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선언한 바와 같이 아이들과 1980년 5월, 광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10분 남짓 교육용 애니메이션을 함께 본 뒤 식탁에 앉히고 화이트보드 앞에 섰어요. ‘아빠의 우리 현대사 강의’는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아들의 뚱딴지같은 질문이 아니었다면 아마 15분이면 너끈했을 겁니다.
“아빠, 왜 광주 군인들은 그렇게 무서웠어? 태어날 때부터 그랬어?”
뚱딴지 아들은 뚱딴지 아빠로부터 왔을 터, 토요일 아침 뚱딴지같은 생각에 빠져듭니다.
성악설(性惡說)을 믿습니다. 기다 아니다의 이분법에 기초하는 언어의 불완전성은 인간 성정에 대한 선택지 또한 오직 착한가, 나쁜가로 재단하는 탓에 성악설을 믿는다는 것은 궁여지책에 가깝습니다(물론 인간 성정은 백지와 같다는 성무선악설도 있습니다만 워낙 소수 의견인지라……). 따라서 기독교 사상의 근간인 원죄설 같은 신기루는 물론 아니고요, 핏발 선 흰자위와 골 깊은 팔자주름을 떠올리는 것도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부리는 악은 엄마 젖을 무는 입아귀, 향과 맛이 좋거나 재미나 보이는 것들은 제 앞에 죄다 그러모으는 손아귀가 고작이죠. 그 귀여운 몸짓을 어떻게 나쁘다 할 수 있냐고요? 네, 아기의 아귀짓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저 생물로서 생존하기 위한 자기 본위의 행동일 뿐이죠. 불완전한 언어의 느낌이 주는 선입견만 내려놓으면 악은 그렇게 작고 귀엽게 태어납니다. 아무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는, 생명으로서 살아내기 위한, 최소의 이기심으로. 그래서 마음 편히 인간은 나쁘게 태어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그 작은 생명은 자라면서 자신 말고도 다른 생명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마주합니다. 그 생명들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맛있고 아름다우며 재미난 것들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죠. 스스로의 생존에 더해, 생존을 위해 공존(共存)이 필요하다는 진리를 알아갑니다. 비로소 배려, 예의, 공감과 같은 선(善)을 배웁니다. 인간이 성장한다 함은, 교육받는다 함은 타고난 악덕이 선의로 대체되는 걸 의미하기도 할 겁니다.
다만 누구로부터도 배운 적 없는 악의 성정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겠지요. 유전자의 힘은 신비롭고 강력하니까요. 악덕도 자랍니다. 배움의 과정에서 선의를 보고 듣지 못하면 이미 가지고 태어난 귀여운 악덕에 핏발이 서고 팔자주름이 패일 겁니다. 내 생존에의 필요를 지나치게 부풀릴 때, 내 한 몸 부지하는 데 필요한 것들에 망상을 더할 때 악덕은 선의가 자랄 땅을 내주지 않기에 이릅니다. 이때부터 악덕은 더 이상 귀여운 몸짓이 아닙니다. 공존을 모색하지 않으면 공멸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스스로의 생존 또한 위협받는, 그런 시대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신이 지었든, 스스로 진화했든 생존을 위한 필요악의 기질을 지니고 태어난 인간은 착해질 여지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인간에게 유일한 운명이 있다면 ‘착해지기’ 일 겁니다. 미뤄두고 있을 뿐이죠.
착한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착해지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테죠. 일요일 아침 달릴 때마다 마주 오는 사람들 모두에게 엄지를 치켜올립니다. 소파에 앉아 쉬고 있는 아내 대신 얼른 설거지를 해치워 놓습니다. 콜센터 직원에게 화내지 않습니다. 사소한 서운함을 스스로 키우지 않습니다.
생활에 치여, 하루하루 버텨내기도 버거워 틈이 없었는데 주말 아침 예상치 못한 아들의 질문 덕분에 커피 한 잔 감싸 쥐고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아무리 따져보아도 착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게다가 요즘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착하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더욱 강건하게 자랍니다. 아들의 질문에 차마 “응, 원래 무서웠다(나빴다)”고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주변에 무서운(나쁜) 사람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야”라고 했죠.
표지 사진 출처 : https://www.nocutnews.co.kr/news/5353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