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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머리 짐승 Jul 17. 2020

믿음, 소망, 사랑 4

흰머리 짐승 편

          “쉰 되기 전에는 가진 재주가 빛을 보지 못해요”

오래전에 홍대에 있는 사주카페에서 점쟁이가 해 준 말이에요. 그때는 그런가 보다 했어요. ‘직장인이 재주 부릴 일이 뭐 있겠어’ 싶었죠. 제가 가진 그 재주가 글쓰기라면 아직은 점쟁이가 옳아요. 글로 연명할 경지는 아직 요원하니까요. 그런데요. 만약 그 재주가 다른 것이라면, 그 사람은 틀렸어요. 


지금 쓰는 것까지 쉰두 편 묶음 제목은 처음엔 ‘마흔’이었어요. 마흔인 이 남자가 꼭 궁금하지 않은 ‘라떼’ 시절 이야기를 일삼으며 ‘꼰대’ 집단으로 돌진하지만은 않는다는 걸 말하고 싶었어요. 여기 더하여 ‘남자는 마흔이 되어야 비로소 멋이 난다’는 걸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았죠. 한데 쓰는 일은 생각의 정리가 아니라 예기치 못한 고백이고 발견이었어요. 메모해 둔 키워드가 바뀌는 일은 부지기수였고 생활의 일화들이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쓰였으며 마지막 문장은 늘 마지막 순간에 떠올랐어요. 더 이상 마흔의 멋들어짐만으로 채워가기 어려웠죠. ‘검은 머리 짐승은 고쳐 쓰는 법이 아니다’의 반동이자 변용인 ‘흰머리 짐승 고쳐쓰기’는 그렇게 나왔어요. 순 우리말 새치의 ‘새’ 자를 세월 세(歲)로 바꿔야 할 만큼 흰머리가 는 데다 훌륭한 인품을 지닌 인간 아내의 보살핌을 받는 짐승이며 쓰기 위해 눈과 귀를 열 때와 쓰면서 흰 벽을 바라볼 때, 마침내 쓰고 나서 책상 밖으로 한 발짝 내디딜 때 어떻게든 달라져 있어 고쳐쓰기예요.


제게는 뭉근한 끈기가 있어요. 겸손도 아니고 자랑은 더욱 아니에요. 고쳐 쓰고 고쳐지면서 발견한 재주예요. 빛나지 않아도 매일 수천 자의 글을 써요. 어떤 날은 첫 단어와 마지막 문장으로 포장해 세상으로 내보내지만 대개의 날들엔 파본 같은 워드 파일에 던져 놓죠. 그래도, 매일, 써요. 세상에서는 아직 빛나지 않는 솜씨라도 제 하루는 그것으로 인해 빛나죠. 타고난 성정이냐 갈고닦은 능력이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세상에 내보낸 글마다 느낌을 전해주는 사람들, 소위 고마운 고정 독자도 조금 생겼어요. 여하튼 점쟁이는 틀렸어요.


제 미련한 재주가 사라지지 않기를 소망해요. 그 소망이 이루어진다면 점쟁이가 찍은 ‘쉰’부터 연명으로 이어질 새로운 재주가 생기리라 믿고요. 그 사이 제가 생각하고 읽고 쓰는 모든 것을 사랑할 거예요.


쉰두 편 ‘흰머리 짐승 고쳐쓰기’는 여기까지예요. 내일부터는 다른 이야기들을 쓰기 시작하겠어요. 제 영민치 못한 재주를 발견한 또 다른 계기에 대해 쓰려고요. 어조를 바꾸고 구체성을 더하는 시도를 해 볼 작정이에요. 파본 같은 워드 파일을 뒤적여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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