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파리올림픽 탁구 종목에 출전한 신유빈 선수가 경기 중 보여준 바나나 먹방이 화제다. 이어 바나나 우유 광고 모델로 발탁됐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바나나 우유. 부드랍고 달달함은 필수인, 그러나 나에게 바나나 우유는 쌉쌀함 그 자체다.
신입사원 시절, 내가 근무하는 부서는 기획팀 산하 소속이었다. 당시 기획팀장이라는 임원은, 외모를 비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누구 봐도 만화 <개구리 소년 왕눈이>에 나오는 투투를 똑 닮았었다. 쏟아질 듯 큰 눈은 동그란 금테 안경 때문에 더욱 도드라져 보였고 자줏빛을 띤 두툼한 입술, 통통하게 살이 오른 양볼이 그랬다.
나는 수원 본사가 아닌 서울사무소에서 근무했다. 사무실에는 외부 손님들이 꽤 많이 내방했다. 그때는 여사원 중 막내(막내가 남사원이라도 그는 배제한 채)가 커피를 타야 했다. 특히 사무실의 가장 큰 어른인 부장님의 손님이 방문하는 날에는 여지없이 쟁반에 도자기 커피잔을 올리고 믹스 커피를 타서 그들 앞에 대령해야 했다.
사무실 한쪽에 있는 접견실. 그 접견실에는 폭신한 소파가 마주 보고 있고, 그 가운데 기다란 테이블이 놓였다. 문제는 그 테이블의 높이. 커피타는 것도 신경질이 나는데, 어정쩡한 무릎 높이의 탁자 위에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커피잔을 내려두려면 옆으로 비뚜름하게 반쯤 무릎을 굽혀야만 했다. 요즘 일부러 한다는 스쿼트, 바로 그 자세가 되어야 했다. 블라우스 앞섭도 주의해야 하니 영 마땅치가 않았다.
“바나나 우유 좀 사 와.”
본사에서 출장 온다는 기획팀장은 위장병을 앓고 있어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는 후문이다. 대신 달디단 바나나 우유를 즐긴다며 그가 서울사무소에 온다는 날에는 그의 집무실에 있는 냉장고에는 항상 바나나 우유를 채워 넣곤 했다. 본사와는 달리 서울사무소는 건물 밖에 나가면 가판대며 편의점 등이 있어 쉽게 구입할 수 있으니 평소 따로 냉장고에 채워두지 않았다.
나는 커피를 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기뻤다. 임원 덕분에 그렇게 한 번이라도 커피를 타고 쟁반에 나르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런데 바나나 우유도 쉽지 않았다. 본사에서 출발할 때 미리 출장온다고 말을 해주면 준비할 테지만, 그는 서울에 고객을 만나거나 미팅을 한 후 연락도 없이 불쑥 서울사무소로 오곤 했다. 그리고 찾는 바나나 우유. 그것도 배가 불룩하게 나온 모양으로 디자인된 그 옛날 바나나 우유, 반드시 그것이어야 했다,
세찬 바람에 창밖으로 눈발이 가로로 내리듯 쏟아졌다. 춥기는 얼마나 춥던지. 그런 날 그 임원이 서울사무소에 나타났고, 나는 금세 다녀올 생각으로 실내화를 끌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건물 바로 앞에 있는 가판대는 아침 토스트 장사를 마쳐서 그랬는지, 궂은 날씨 때문에 그랬는지 일찌감치 셔터를 내렸다. 조금 더 걸어가 작은 구멍가게로 들어갔다. 구멍가게엔 거의 담배와 복권, 그리고 다양한 껌들이 눈에 띌 뿐 바나나 우유를 포함한 마실거리는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걸어서 편의점.
바나나 우유가 이렇게도 인기가 없던가. 옆으로, 뒤로, 골목으로 바나나 우유를 찾아 걷다 보니 어느새 사무실로부터 꽤 멀리 나와있었다.
실내화 밖으로 나온 양말 사이사이로 한겨울 찬바람은 속절없이 스며들었다. 발가락이 깨질 듯 얼얼했다. 그래도 바나나 우유를 사가지고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여서일곱 번째쯤 가게에서 바나나 우유를 발견했을 때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만큼 반가웠고, 그래서 영롱해 보였다.
바나나 우유를 한 손에 들고 위풍당당! 회사 건물에 들어섰을 때 미처 벗어내지 못한 추위로 나는 온몸을 심하게 떨어야 했다. 아마도 산골 소녀처럼 발그레 해졌을 볼을 하고 엘리베이터 한쪽 구석에 서서 빠르게 올라가는 숫자를 바라봤다.
"여기 바나나 우.."
"야, 이걸 이제야 가져오면 어떻게 해?"
칭찬까지는 아니더라도, '고생했다'라는 말 정도는 들을 줄 알았다. 그런데 부서장은 내가 내민 바나나 우유를 몹시도 매몰차게 탁! 쳐냈다. 내 손에서 벗어난 바나나 우유는 부장님의 책상에 한번 맞고 튕기더니 바닥 위에 데구르르 굴렀다. 그리고 카펫 위로 노오란 액체를 불규칙하게 토해냈다.
왈칵 뜨거운 눈물이 났다.
'잠시' 사무실에 들렀던 임원은 바나나 우유를 기다리다가 수원 본사로 내려갔다고했다. 그런 까닭에 면목이 없어진 부서장은 늦게서야 들어온 내가 땡땡이라도 친 것처럼 화를 낸 거다.
그 부서장도 나쁜 사람은 아니라서 그러고 나서 오후 내내 미안해하며 내 주위를 맴돌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많이 배우지 못한 탓인가.
여자라서 그런가.
퇴근해 집에 가면서 나는 또다시 그 장면을 떠올리며 버스 한 구석에서 울고 또 울었다. 공연히 나 자신을 원망하면서 말이다.
4~5년이 흘러 그때의 임원은 퇴직했다. 그런데 그분의 딸이 회사에 입사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다시 4~5년이 흘러 내가 홈페이지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임원의 딸이자 소문의 주인공인 직원과 같이 일하게 되었다.
회사 내에는 그 직원뿐만 아니라도 전, 현직 임원이나 부장의 자녀들이 여기저기 포진해 있었다. 그러니 꼭 그 사람을 삐딱하게 볼 필요도 없다.
다행히 그녀는 다른 임원의 자녀들과는 달리 나대지(?) 않았다. 오히려 새침데기처럼 조용하고 소극적이었다. 그마저도 밉살스럽게 보였다. 한 마디로 그냥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의미!
TF를 하는 내내 나는 그 직원에게 날카로웠고 종종 무시하기도 했다. 마치 그때의 수치심을 너도 한번 당해보라는 식으로.
알고 있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타격을 입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녀에게 날카롭고 무시하는 언행을 했다는 것도 내 생각일 뿐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아버지로 인해 바나나 우유를 싫어하게 된 내 사연도 당연히 알 리 없고.
JTBC 드라마 <대행사>에 재벌 3세 한나(손나은 분)가 화를 주체하지 못할 때 문호 아저씨(박지일 분)는 바나나 우유를 먹여 그녀를 달래곤 한다.
JTBC <대행사>의 한 장면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은 대개 한나와 문호의 시선으로 따라가기 마련일 테다.
하지만 나는, 대화 도중 전화기를 들어 비서에게 바나나 우유를 사 오라고 시키고, 그 지시를 들은 비서가 지갑을 챙겨 들고나가려 채비하는 모습에 시선이 닿았다.
"이제 진짜 어른이 됐다!"
바나나 우유를 먹으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한나가 아닌, 그 바나나 우유를 사러 다녀야 했던 나는 여전히 자라지 못한 채 동굴 속에 갇혀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