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음식 <분식> 편
밤낮으로 식지 않은 열기 탓에 도통 입맛이 나지 않는다.
(물론 그럼에도 먹을 땐 잘 먹지만 ^^)
계절에 상관없이 "오늘은 뭘 먹나?" 매 끼니마다 고민. 뜨겁고 쳐지기 쉬운 여름에는 그 고민이 더 깊어진다.
"오늘 저녁 냉면 어때? 남은 고기 구워서 같이?"
"와! 저는 좋아요, "
"나도 좋아요!"
다행히 아이들의 찬성으로 어찌어찌 냉면과 구운 고기로 한 끼를 해결했다.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신입사원 시절, 나는 주변인에 꽤 눈치를 보는 타입이었다. 농담으로 한 마디 던진 것일 텐데도, 행여 내가 뭔가 실수나 잘못해서 그런 말을 한 건 아닐까 끙끙 고민한 적이 많았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입이 짧았던 나는, 점심시간도 곤혹스러웠다.
(당시) 직장인들이 주로 먹는 김치찌개나 부대찌개, 곰탕 등등. 날씨가 추웠던 때라 더욱이나 국물 있는 음식을 선호하셨지만, 그런 음식에 들어있는 고기를 나는 잘 먹지 못했다.
그래도 지금처럼 '혼밥'을 하는 게 흔한 풍경은 아니었던 때라 홀로 떨어져 나올만한 용기는 없어 매번 부서 선배님들을 따라 밥집으로 갔다.
잘 못 먹는 걸 누군가 눈치채면 안 되니까, 그러면 "왜 그렇게 못 먹어?"라고 누군가 말하고, 나머지 사람들의 시선이 한 번에 쏠린다. 그러면 내 얼굴을 홍시처럼 빨개지고 더 긴장하게 된다.
그래서 끊임없이 먹는 것처럼 보이느라 입안에 넣은 밥알이 다 으깨지고 뭉개 치고 죽이 되어 단물이 나올 정도로 씹어댔다.
그러다 거북스럽지만 최대한 티 내지 않으며 먹었던 음식들은 그날 여지없이 토해냈다. 노오란 위액이 입안을 시큰하게 채우도록 토해내고 나면 다음엔 위를 쥐어짜듯 통증이 밀려들었다.
그렇게 신입사원 3개월을 지내는 동안 날로 살이 빠졌다. 행복한 거 아닌가? 싶겠지만 불과 석 달만에 18kg이 빠졌는데, 성인이 된 후 최저 체중이었다. 가히 정상은 아닌 것이 틀림없었다.
너무 심각하다 싶을 정도로 위염을 앓게 되자 밥을 먹는 것도, 굶는 것도 모두가 고통스러웠다. 정말 아무 입맛이 없는 그때,
나름 먹어보려고 애쓰며 매일 메뉴를 바꿔가느라 회사 인근의 식당 순례를 다녔다.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니 하얀 셔츠에 넥타이를 맨 직장인들 일색. 주눅이 들었다.
그러다 며칠 지나 작은 밥집을 하나 찾았다.
아주 좁은 실내 안에 기다랗게 놓은 선반 같은 식탁이 있고, 그 앞으로 등받이도 없는 간이의자가 또로로 나란히 4개 정도밖에 없는 작은 곳이었다.
무엇보다 아직은 추위가 남은 때임에도 메뉴는 달랑 물냉면과 비빔냉면으로, 단 2가지!
나는 물냉면을 주문했다. 여느 음식점과 다를 바 없는 물냉면의 맛이었을 테다. 그런데 며칠을 굶다시피 한 내 입안에서는 이미 맑은 회색빛 면발들이 출렁대기 시작했고, 서걱서걱하게 갈아진 살얼음 육수와 그 위에 제법 빈틈없이 채워진 들깻가루, 김가루가 고소함을 더했다.
눈이 번쩍! 그래 이곳이다.
그날부터 나는 3개월가량을 점심시간이 되면 그 집을 가곤 했다. 물냉면이 좀 밍밍해질라 치면 새콤달콤한 양념장이 올라간 비빔냉면을 먹었는데, 매워서 땀을 흘리면서도 맛스럽다고 여겼다.
그렇게 신입사원의 첫 해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냉면이라는 단어, 냉면을 볼 때면 그때가 떠오른다. 잔뜩 긴장해서 두리번두리번거리던.
그 해를 넘기기 전 조금씩 뻔뻔함을 장착하며 체중도 점차 찾아갔다. 18kg까지는 너무했고, 지금은 좀 덜었으면 좋겠구나 싶다. 사람 욕심은 이래저래 변덕스럽다.
에어컨이 고장 났다, 일주일 넘도록 에어컨을 돌리지 못하는 가운데 연일 폭염에, 연일 열대야다.
결국 애들은 친구네로 각각 파자마를 싸서 보내고 부부만 남았다. 냉면 한 그릇 시원하게 들이켜고 싶지만, 면을 삶기 위해 물을 끓이는 것도 힘들어 두 손 들고 말았다.
이 폭염이 어서 지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