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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Nov 27. 2020

[서평] 책, 이게 뭐라고

서평을 빙자한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이번 서평은 장강명 작가의 <책, 이게 뭐라고>입니다. 리딩리딩에는 짧(지않...)은 버전의 좀 정제된 서평을 드렸고, 여기에 올리는 글은 개인적인 제 얘기가 많이 들어간 난삽하기 그지없는 버전입니다. 제 삶의 중심이기도 한 ‘읽고 쓰는 일’에 대한 얘기다 보니 수다가 길어졌네요.


[서평] 책, 이게 뭐라고


  “우리 오빠가 글이 많이 늘었어.”
장강명 폰트가 나와야 되지 않나 싶은 사랑스러운 글씨체의 사인이 든 책을 그렇게 또 받고 말았다. 장작가의 동생과 나는 귀애하는 사이다(그녀의 마음이 변치 않았다면). 책 속 표현을 빌자면 ‘읽고 쓰는 인간 종족’인 내가, 평생 읽어만 오다 책 한 권을 갓 써낸 내가, 딱 타이밍 좋게 만난 책이었다. ‘책, 이게 뭐라고’까지는 감히 가지 못하고 ‘책, 이것은 무엇인가’ 그 언저리에 생각이 머물던 시기였다.

장강명 폰트의 도입이 시급합니다

  순수문학은 깜냥이 안 되어 감히 입을 놀리기 어렵지만, 에세이라면 그래도 서평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질없이 밝혀보자면 읽어 본 그의 소설 중 <표백>에 가장 감탄했고 <알바생 자르기>가 가장 좋았다. 마음속에서 감탄과 좋음이 함께 펑펑 발사된 건 <노라>였다.

  책, 이게 뭐라고.
책 제목이자 책의 마지막 문장이기도 한데, 제목으로 읽을 때와 마지막 문장으로 읽을 때의 느낌이 사뭇 다르다. 책이라는 매체에 대한, 그리 무겁지 않은 톤으로 쓰인 심도 깊은 성찰이다. 바삭바삭 스낵 먹듯 가볍게 먹다가 목에 콱 걸리는 부분이 많았다. 그렇게 걸리는 부분은 우물우물, 소처럼 되새김질을 했다. 덕분에 생전 처음으로 책이라는 사물, 혹은 책이라는 관념 자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나는 당당하게 책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활자에 대한 선호가 커서, 실은 저자처럼 영화도 잘 보지 않는다(딱히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영화 습득력이 낮다). 심지어 저자의 이상형에 속하는 부류이기도 하다. 책도 맥주도 모두 좋아하는 사람. 저자와는 달리 나는 음주 독서도 제법 즐긴다. 몇 년 전 블루문 한 병을 따고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읽던 달밤이 얼마나 좋았던지도 생생히 기억한다. 술을 마시며 나눌 수 있는 가장 좋은 대화는 책에 대한 대화라는 말에도 매우 공감한다. 저자도 말하듯 책은 화제를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로 자연스레 번지게 하고, 그 얘기가 삼천포 루트를 타지 않도록 제자리로 부드럽게 끌어당겨 주며, 맨 정신으로 꺼내기 어려운 진지한 화제를 민망하지 않은 얼굴로 할 수 있게 하는 성물(이를테면 천사의 눈물 목걸이라든지 마법사의 돌 같은 것. 이런 아이템을 장착하지 않고 “너는 좋은 삶이 뭐라고 생각하니?” “너는 인생의 가치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해?”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인간은 극히 드물다.)이 되어 준다. 하지만 (아직도 남사스러워 고통받는) 작가란 타이틀을 스스로 달기 전까진 사실 책이라는 매체의 속성이나 운명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안에 든 내용을 허겁지겁 베어 먹기 급급했기에.

  나는 어린 시절 책의 열렬한 신봉자였다가 커가면서 그 신앙에서 벗어난 종류의 인간이다. 여전히 좋은 친구 같은 책, 연인처럼 굉장한 감정으로 만나는 책, 그립고 애틋한 책들도 있지만 이제는 대체로 진한 감정을 한 물 빼고 만난다. 나이를 먹으며 세상엔 참 별별 사람이 다 있구나 하고 느끼듯 세상엔 참 별별 책이 다 있구나 하고 마음이 밍밍해진 탓이다. 모든 책이 성스러워 보이던 눈알에 다행스럽게도 힘이 빠졌달까.


  그러다 책을 한 권 내고 나서는 책을 둘러싼 세계에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세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책 속의 표현을 빌자면 작가도 예쁘고 잘생겨야 하며, 셀러브리티이기만 하면 반려견도 책을 낼 수 있게 된 세상. 진지하고 긴 글을 부담스러워하며 ‘누가 요약 좀’이 붙는 세상. 인지도가 현금이라 작가도 어느 정도 세일즈맨이 되어야 하는 세상. 확실히 책을 둘러싼 생태계가 변했다. 이게 꼭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읽고 쓰는 인간 종족으로서는 꽤 당황스러운 환경이다. 작가뿐 아니라 책도 예뻐야 하는 세상이다. 표지를 인스타그램에 올렸을 때 때깔이 좋아야 한단다. (다행히 내 책은 작가와는 달리 상당한 미인으로 나왔다. 출판사 여러분 고맙습니다.) 참고로 <책, 이게 뭐라고>도 표지가 엄청 사랑스럽다. 소셜 미디어에서 이 책 표지에 대한 애정이 대폭발 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최근 잠시 귀국했을 때 가본 교보문고의 베스트셀러 코너는 돈돈돈, 주식과 부동산 그리고 먹기 편한 인스턴트형 지식이었다. 약간 참담한 마음이었지만 (이걸 참담하다고 느끼는 게 편견일 거라고 생각은 한다) 어쩔 수 없나 싶었다. 사실 책도 돈이 있어야 사는 거고 작가도 돈이 있어야 글을 쓰지. 그리고 돈은 사실 굉장히 중요한 화두다. 책을 읽는 내내 야릇하게 느껴지던 ‘읽고 쓰는 인간’과 ‘말하고 듣는 인간’ 사이의 긴장은 이 지점과도 긴밀히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미치도록 피로한데 재미난 것은 많아진 세상. 읽고 쓰는 인간 종족이 지속 가능하게 차분히 읽고 쓸 수 있으려면, 말하고 듣는 (더 정확히는 아마도 말하고 ‘보이는’) 인간 종족의 기술을 흡수하는 게 필요한 세상이 된 것이 아닐까. 사실 기술의 발달로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모든 것의 경계가 흐릿해지기도 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인간은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읽고 쓰는 인간이든 말하고 듣는 인간이든 아니면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는 인간이든,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일단 입에 뭘 넣어야 살 수 있으니까. 그런데 조용히 틀어박혀 읽고 쓰기만 해서는 입에 뭐가 들어오기가 좀 힘들어진 세상이 된 것이다. 상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현대 기술의 발달은 말하고 듣고 읽고 쓰는 모든 영역 간의 경계를 흐리게 했고, 현대 자본주의는 상품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말하고 듣는 인간형을 더 선호한다. 여러모로 읽고 쓰는 종족의 서식지란 얼음이 녹아내리는 북극곰의 서식지 같은 모양새가 되고 있는 중이다.   

  대화에 서툰 소설가가 40대 중반에 팟캐스트 MC가 되었다. 인지도가 필요했고 고정 수입이 좋더라는 솔직한 이유가 붙는다. ‘읽고 쓰는 장강명’이 ‘말하고 듣는 장강명’이라는, 좀 불편하지만 새로 유행하는 옷을 입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따라가면서 읽고 쓰는 행위와 말하고 듣는 행위 사이의 간격에 대해 생각해 본다. 물론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철인 4종 경기에 자유자재로 능한 사람이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우리는 주로 둘 중 한쪽의 인간형인 경우가 많다. 나도 듣는 건 몰라도 말은 더럽게 못 한다. (발표나 강의처럼 남들 앞에서 말하는 걸 어려워하진 않는데 오히려 사적인 대화에 취약한 타입. 주로 복화술을 시도한다.)


  이 두 종족을 작가의 구분에 따라 나누어 보자면 이렇다.  

읽고 쓰는 인간의 세계에선 의미를 묻고 따지며, 말하고 듣는 인간의 세계에선 현재의 행복에 집중한다.
‘말하고 듣기’와 ‘읽고 쓰기’에는 같은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전자는 예의를 중시하고 후자는 윤리를 중시한다. 예의는 맥락에 좌우되지만 윤리는 보편성과 일관성을 지향한다. 즉, 나한테 옳은 것이 너한테도 옳아야 하고, 예전에 옳았던 것이 지금도 옳아야 한다. (반면 말하고 듣기의 세계에선 오늘은 불금이라서 A가 옳고, 너는 그저께 차였기 때문에 B를 해도 내가 관대히 받아줄 수 있다. 대체 A는 뭐고 B는 뭔지, 지금 이 서평을 쓰고 있는 나도 궁금하다.)
성실히 읽고 쓰는 사람은 일관성을 중시하므로 ‘반성하는 인간, 공적인 인간’이 되지만 ‘약간 무겁고 얼마간 쌀쌀맞은, 진지한 인간’이 된다. 반면 충실히 말하고 듣는 사람은 ‘다정하고, 비언어적으로 매력적인 인간’이 된다. 
말하고 듣는 세계의 거주자들과 달리, 읽고 쓰는 세계 거주자들의 소통 대상은 현재에 있지만은 않다. 우리는 읽으면서 과거와 대화하며, 쓰면서 미래로 메시지를 보낸다. 말하고 듣는 세계의 사람들은 동시대의 타인들이 보기에 매력이 있어야 하는 반면, 읽고 쓰는 인간이 50년 뒤의 독자들에게 존중받으려면 현시대 사람들 다수를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저자가 ‘읽기와 쓰기’가 ‘말하기와 듣기’보다 우월한 행위라고 주장하는 건 결코 아니다. 둘은 마치 이성과 감성처럼 “가끔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여도 어느 쪽이 다른 쪽을 지배해서는 안 되는 수단이고 가치”라 말한다. 그렇다. 보석 같은 문장을 만나면 황홀하지만, 말 잘하는 사람의 살아있는 매력 역시 우리를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하게 한다. 


저자는 글은 어둡고 날카롭게 쓰고, 말은 밝고 부드럽게 하려는데 쉽지 않다고, 가면을 쓰고 있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나도 아마 글로만 보다가 직접 보면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장작가는 말을 할 때 그런 느낌을 받는 듯한데, 나는 주로 글을 쓸 때 가면을 장착한다. 글을 쓸 때 솔직하거나 모질지 못하다. 늘 불투명 유리문 뒤에서 글을 쓴다. (너무 다 벗어던지는 듯한 솔직함에 약간의 거부반응이 있다. 솔직한 글 앞에서 진심으로 감탄하지만, 모든 솔직한 글이 꼭 좋은 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영화에 누드신이 필요하지는 않듯이, 주제에 맞는 적절한 분량의 솔직함이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함과는 별개로, 읽고 쓰는 이진민은 망나니에 가깝고 말하고 듣는 이진민은 꽤 조신하다(...고 믿는다. 지인들이여, 그 입 다물라.).


  책은 이렇게 두 타입의 인간형을 기본으로 깔고, 책이라는 매체와 그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는다. 다독과 서평에 관한 부분에서 개인적으로 많이 공감했다. 갑자기 글이 중구난방 옆길로 뛰어나가는 느낌이지만(언제는 안 그랬냐), 그래도 쓰고 싶어서 그 둘에 관한 이야기를 적고 간다.  


{다독}

  나는 다독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도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전공이 전공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철학책 중에는  뱃살처럼 두툼한 책들도 많았고(이렇게 뱃살이 많을 거면 참치로 태어날 걸 그랬다), 얇지만 문장마다 지뢰를 밟고 헤매야 하는 책도 많았다.   권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는 느낌이 들려면  , 심지어는  년이 걸릴 때도 있었다. 철학서가 아니더라도 그렇다. 책을 덮고 바로 다음 책으로 뛰어드는 것보다, 적어도 며칠은  책이 소환한 마법진 안에 들어있는  좋아한다. 좋아하는 책은  여운을 즐겨야 하고,  번씩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그래서 ‘책을 만 권씩 읽는다는 사람은 어쩐지 이성 교제 횟수를 자랑하는 고등학생을 보는 것 같다’는 저자의 얘기에 위로받았고, ‘그런 사람은 우연히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눈 것조차 데이트로 간주할지 모른다’는 얘기에 크게 공감해 차량 뒤편에 놓인 목 흔드는 인형처럼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런 저자도 한 해에 150여 권을 읽는다는 말에 다시 수줍어졌다. 한 달에 열세 권쯤 읽는다는 얘긴데, 나는 레스토랑에서 읽는 메뉴판(가장 정성스럽게 정독하는 책)을 다 합쳐도 그 숫자가 안 나온다. 그래도 요즘에는 리딩리딩에서 북 큐레이터 역할을 하느라 예전보다는 신간을 많이, 부지런히 읽고 있다.

  1만 명과 교제한 사람보다 평생에 걸쳐 서너 명의 상대와 길고 깊게 연애했다는 사람 쪽이 연애의 다양한 측면을 더 잘 이해할 거라는 말에 밑줄을 긋는다. 누구나 자기 만의 속도와 스타일이 있다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내 방식대로 연애를 즐길 생각이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보다는 그냥 책을 즐기고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다독가가 싫다는 얘긴 아니다. 다만 숫자에 강박을 가지거나 과제처럼 읽어 치우려는 태도, 책을 너무 신성시하는 태도 같은 게 있다면 별로라고 생각할 뿐이다. 책을 부지런히 즐겁게 읽는 사람을 무척 좋아한다. 책으로 취향을 쌓는 사람이면 더 멋있다고 생각한다.


{서평}

  저자는 전문 평론가의 비평보다 일반 독자의 솔직한 리뷰가 필요하고, 이 영역이 활발해져야 문학계 전체가 살아날 거라고 믿는다. 영화 해석력이 탁월하게 떨어지는 나는 종종 문제집 풀다 답지를 훔쳐보는 어린이의 마음으로 영화평을 찾아보곤 하는데, 전문 비평가들의 얘기보다 더 재미있는 건 사실 일반 대중, 즉 우리들의 유쾌한 해석이다. 그에 기반한 놀이 문화는(예를 들면 패러디 같은 것!) 더 재미있다. 전문 평론가들에게만 위탁하는 서평은, 성경을 라틴어로 만들어 두고 우리만 너희에게 신의 말씀을 전해주겠다던 옛 사제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종교개혁과 함께 라틴어 성경이 독일어로 번역된 뒤 많은 사람들이 직접 신을 만나게 되었고, 그 결과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마음 안에 교회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내 서평에는 품위라고는 전혀 없는 것이, 누가 봐도 라틴어 성경을 쥔 사제보다는 술병을 든 주막집 주모에 가깝다. 그래도 나는 나 따위가 유료 서평을 연재하고 있다는 게 여전히 부끄럽기도 한데, 그건 또 나에겐 어쨌든 책을 낸 작가라는 명함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만인의 평등한 서평이 흘러넘치는 세상이 되길 기대한다. 당첨되어 혹은 책을 제공받아 쓰는 서평에도 진심은 담기겠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 기록한 작고 귀엽고 진한 그런 서평들이 더 찰랑찰랑 넘쳤으면.

  저자는 한 줄 감상이라도 많이 올리면 그 사람의 취향이 드러나고, 타인에게 의미 있는 참고사항이 된다고 말한다. 랜선 타고 놀다가 내가 읽었던 책에 대해 누가 포스팅 한 걸 만나면 일단 엄청나게 반가운 느낌, 귀를 쫑긋하게 되는 느낌, 아마 다들 아실 듯하다. 저자는 이를 “읽고 쓰는 사람들 간의 글자를 통한 대화”라고 칭한다. 이 재미있는 대화가 소쿠리 안의 불린 미역처럼 늘어나기를.

여러분 미역 한 봉지는 60인분입니다. 동해 용왕께서 이르시니 건미역 한 박스면 만백성을 먹여살릴 미역국이 나올 것이다.

  이제 다시 책 얘기로 돌아와서.

그런데 책 안에 어느 정도는 단단하게 그어진 두 종족 간의 구분선을 보며 계속 생각했다. 다정하게 대화하며 쓰는 인간이 될 순 없는 걸까. 우리 사회에서 반성하는 인간, 공적인 인간이 되려면 글도 좋지만 일단은 말을 제대로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냥 넷 다 잘하면 되지 이런 전교 1등 같은 얘기가 아니다. 책 안에도 언급된, 카뮈가 <페스트>에서 제시한 평화와 연대의 모범답안 같은 그런 이상적인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말하고 듣는 인간 종족’을 저렇게 하나로 묶기에는 우리 사회에서 말하는 것과 듣는 것 사이의 간격이 꽤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을 못 하는 게 미덕인 사회를 살아왔다. 특히 나이가 어린 사람일수록 더. 말하지 말고 조용히 듣기만 하라고, 말하는 인간들의 파릇파릇한 싹을 교실에서부터 성실하게 잘라왔다. 그리고 글이라는 건 면허를 가진 자들만의 수단으로서, 반성적 언어이기보다 권위와 억압, 프로파간다인 경우도 제법 많았다. 말에 주눅 드는 경험은 공과 사를 딱히 가리지 않는다.


  사실 내가 말하는 이 ‘말’이라는 게 이 책에서 언급하는 ‘말’과는 뉘앙스가 많이 다른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글로 정리해서 표현하지는 않더라도 일단 짧게 소리라도 잘 지른다면 그건 그 자체로 반성하는 인간, 공적인 인간의 소리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한다. 혹은 일상 대화 속에서도 꾸준히 어떤 알맹이를, 세계와 불화하는 에피소드를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건넨다면. 대화의 힘도 그렇다. 소크라테스는 글을 쓰지 않고 대화로만 제자들을 가르쳤다. 글은 “죽은 경전이 되어 펄펄 살아 움직여야 할 깨달음의 순간들을 방해할” 것이므로. 작가 역시 이 부분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근본주의를 우려하는 반면, 나는 ‘근본이 사라지는 현상’을 두려워하고 있다”라는 문장에서 한참 머물렀다. 읽고 쓰는 세계의 거주자들이 빙하처럼 녹아내리는 ‘책’이라는 관념의 근본을 마주하면서, 네 가지 영역에 대한 이해를 좀 더 새롭게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요즘의 나도 멍 때리며 골몰하는 부분이다. 그 근본이 어떤 방식으로 지켜질 수 있을지, 나는 어떤 종류의 말하고 듣고 읽고 쓰는 인간이 되어야 하는지.   


   실은 이 책을 받았던 날 오전, 마침 나도 어느 편집자님으로부터 팟캐스트를 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제안을 받은 참이었다. 그냥 책을 조금씩 읽어주기만 해도 좋을 거라고. 며칠 뒤 다른 편집자님께서는 유튜브를 권하셨다. 내 인스타를 짧게 영상으로 만들어보면 재밌을 것 같다고. 저한테 왜 그러세요, 라는 얼굴로 바라보다 돌아오긴 했지만 요즘 들어 생각이 많아지긴 한다. 그래서 이 책과의 만남이 더욱 타이밍 좋았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하면 영상 제작이라니 그런 건 과학자들이나 이과분들이 하는 거 아닌가(응 아니야), 나 따위가 팟캐스트를 한다고 과연 누가 들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아직 크다. 하지만 누구나 인터넷을 배웠어야 하듯 새로운 시대의 문법을 배워야 하는 걸까 싶기도 하다. 읽고 쓰는 방식이 아니라 그냥 삶의 방식 자체가 바뀌고 있는 건 아닌가, 즐기진 못해도 방법은 알아야 하는 걸까, 이런 생각들. 그토록 애써 외면하던 인스타 세계에 발을 들여보니 (한 놈만 패는 성격. 나에겐 이미 페이스북이 있었다.) 막상 꽤 즐거운 것처럼 의외로 즐거울지도 모르겠다. 편집자님들의 공통적인 의견은 책 이외에도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독자들과 만날 수 있는 창구가 필요하다는 거였다. 나 같은 초보 작가에게도 (혹은 초보 작가라서 더욱) 인지도며 개인의 브랜드화 같은 것들이 필요한 모양이다. 하지만 읽고 쓰던 이진민이 어설프게 말하고 듣고 보이는 이진민이 되려다 보면 분명히 읽고 쓸 시간이 부족할 거라는 딜레마를 직시 중이다. 지금도 술 먹을 시간이 부족해 죽겠는데. 그래서 고민 중이다. 고민을 한 달 정도 더 수제비 반죽처럼 조물조물 치대다가 한 해의 목표를 세우는 새해쯤 뭐라도 결론을 내겠지.

   

  자, 이제 마무리.

책은 오모리 김치찌개 맛 감자칩 같은 느낌이다. (상상 속의 괴식 아니고 진짜 출시된 제품입니다, 지금도 파는지 모르겠지만.)

드셔 보신 분?

바삭하고 고소한데 숙성된 맛도, 알싸하고 새콤한 맛도 있다.(... 고 믿고 싶다, 책 말고 저 과자 안에.) 자주 목에 콱 걸리기도 했다. 저자는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데 솔직하고 거침없다.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 솔직한 글을 읽을 때 느끼는 당혹감을 여러 번 느꼈다. 그리고 밉지 않다고 생각했다. 가장 뜨끔했던 부분은 “힘들게 행동하지 않으면서, 읽고 쓴다는 재미있는 일만으로 자신이 좋은 인간이 되고 있다고 믿고 싶은 사람들”을 언급했을 때다. 책을 내고 나서 요즘 든 생각이 딱 그랬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결국은 아무것도 못하는 타입의 인간이다. 얼마나 우유부단한지 우유가 굳어 버터가 될 지경이다. 이렇게 비겁하게 뒤에서 조용히 글만 쓰는 삶으로 나는 과연 잘 살고 있는 걸까. 책 말미 소크라테스와의 대화에서도 “실제로는 아는 것이 없는데 지식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게 되는 자들” 이야기가 나온다. 살다 살다 이렇게 뜨끔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햇병아리 저자인 나에게는 참 좋은 책이었다. 보다 보면 궁금해지고 읽어보고 싶은 다른 책이 많아지는 건 덤. 이 책을 읽다 보니 찾아 읽고 싶은 책들이 좋은 여름밤 편의점 앞에서 친구랑 마시는 캔맥주 개수처럼 늘어났다.


  책은 ‘말하는 작가의 탄생’으로 시작해서 ‘그럼에도 계속 읽고 쓴다는 것’으로 끝난다. 베버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늘 이렇게 뭔가를 믿는 자들의 공통적인 결론이 되어 준다. 다만 마지막 부분이 묵직한 돌처럼 남는다. 소설이 써지지 않는 것과 모르는 사람들의 악의 가득한 한 말들 때문에 우울증에 걸렸다는. 귀애하는 그녀에게 작가님의 안부를 물었더니 찐남매는 서로 안부 따위 안 묻는다는 오모리 김치찌개 맛 대답이 돌아왔다. 같은 종족으로서 안부를 전한다. 부디 즐겁게 읽고 쓰시고, 간간이 말도 해 주시기를. 글을 쓰며 세계와 싸운다는 기분을 벅차게 느끼시고, 상상했던 ‘책을 중심으로 지역과 지식이 결합하는 세상’의 꿈도 이루시고, 작가님 상상 속의 그 신박한 책 축제도 열어 주시고, 무엇보다 눈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운 인세가 한겨울 함박눈처럼 당신 머리 위에 펑펑 쏟아지기를.





[부록]


리딩리딩에는 리딩맵이라는 서비스가 있다.

책과 같이 읽으면 좋을 다른 책이나, 연관된 키워드라든가, 연상되는 영화든 장소든 그림이든 시든 뭐든, 함께 보면 좋을 것들을 소개하는 서비스다.

이를테면 요렇게

이번 서평을 올리면서 여러 개를 올렸는데, 그중 일부만 골라 여기에도 실어본다.


1. 팟캐스트 [책, 이게 뭐라고?!]
: 이 책의 시작과 끝이자, 책 전체를 관통하며 함께 가는 동명의 독서 팟캐스트. 장강명 작가가 ‘읽고 쓰는 인간’에서 ‘말하고 듣는 인간’으로의 힘겨운 변신을 시도하는 계기가 되는 방송이며, 그 2년여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 이 책이다. 그래서 책이 이 팟캐스트의 내용 요약본이 아니냐는 오해를 가끔 받는다고. 절대 아니다.
대화 형식의 방송이라는 점에서 말하고 듣는 인간의 세계가, 책과 작가들과 독서에 관한 팟캐스트라는 점에서 읽고 쓰는 인간의 세계가 겹치고 어우러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남들이 궁금한 게 뭔지 궁금한’ 요조와 함께 ‘남들이 안 궁금한 게 궁금한’ 장강명이 이 팟캐스트의 시즌 2 진행자로 구독자들을 만났다. 타이틀송의 마성이 강해서 뇌 속에서 반복 재생되므로 주의 바람.

2. 말하고 듣기의 영역: 영화 ‘비포’ 3부작과 <더 테이블>
1) ‘비포’ 3부작
비포 선셋, 비포 선라이즈, 비포 미드나이트. 저자에 따르면 ‘비포’ 3부작 전체가 말하고 듣기에 관한 영화다.
“제시와 셀린은 세 영화 전체에서 비언어적 방식으로 긴밀하게 소통한다. (...) ‘비포’ 3부작은 등장인물들만큼이나 세련되고 다정다감하게 그런 비언어적인 의사소통이 춤추듯 오가는 분위기를 관객에게 전해주는 데 집중한다. 쓰는 인간, 특히 쓰기 위해 듣고 말하기라는 도구를 동원하는 인간은 그런 식으로 대화하지 않는다. (...) 언어를 기록하는 일에 매달리는 인간에게 비언어적인 소통은 중요하지 않다. 그런 것들은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기억 속에서 흐릿해지다가 흩어지고 만다.” (pp. 47-8)


2) <더 테이블> 
“미묘한 분위기와 감정선을 표현하는 데에, 언어는 비언어적인 도구를 따라잡기 매우 어렵다. 문인 중에서는 대단히 실력이 뛰어난 작가들만이 겨우 성공한다. 나는 그걸 김종관 감독의 책 <더 테이블>을 팟캐스트에서 다루면서 절실히 느꼈다. (...) 영화 <더 테이블>은 한 테이블에 앉은 배우 두 사람의 대화로만 이어지는 구성인데, 시나리오에는 별다른 지문 없이 대사만 적혀 있다. 팟캐스트 녹음 전에 영화도 봤는데, 대본과 느낌이 완전히 달라 깜짝 놀랐다. 영화의 핵심은 대사 내용이 아니라 배우들이 얼굴과 목소리와 몸으로 만들어내는 미묘한 무드와 뉘앙스에 있었다.” (p. 43)

3. 책을 둘러싼 세계의 변화: <아날로그의 반격>과 전에 보지 못한 유형의 작가들
1) <아날로그의 반격>은 젊은 세대 사이에서 레코드판, 몰스킨 노트, 필름 카메라 등이 다시 유행하는 현상을 포착, 그 아래 깔려있는 공통의 원인까지 재미나고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책(데이비드 색스 저 / 박상현, 이승연 역 | 어크로스). 저자는 이 책을 다루면서 자연스레 종이책과 전자책에 대한 생각들을 담는다. 그의 결론으로 보이는 문장은 이것.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은 종이책의 물성이 아니라 책이라는 오래된 매체와 그 매체를 제대로 소화하는 단 한 가지 방식인 독서라는 행위다.” (p. 113)


2) 김민섭, 은유, 이슬아 작가
: 저자에 따르면 “스스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전에 보지 못한 유형의 작가들.”
대학원생이자 시간강사이던 김민섭 작가는 인터넷에 익명으로 지방대 시간강사의 현실을 비판하는 글을 연재, ‘309동 1201호’라는 필명으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책을 펴냈다. 정체가 드러나 대학을 떠났고, 이후로 대리운전을 하면서 보고 느낀 점을 모은 <대리사회>를 본명으로 출간했다. 그 뒤로 1인 출판사 ‘정미소’를 차리고 출판 기획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은유 작가는 책 속 표현을 그대로 따오자면 ‘대학 졸업장 없는 상고 출신 글쓰기 강사’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데, <글쓰기의 최전선>, <폭력과 존엄 사이>, <출판하는 마음>,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등 일련의 책들을 통해 우리나라에서는 희귀한 편인 르포와 인터뷰를 비중 있게 다루는 작가다. 장강명 작가에 따르면 논픽션, 르포르타주는 소설보다 배 이상 쓰기 어렵다고.
이슬아 작가는 구독료를 받고 에세이를 보내는 ‘일간 이슬아’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면서 독립출판계의 스타가 된 작가이자, ‘1990년대생 발칙한 젊은 작가’의 아이콘과도 같은 인물. 이후 <월간 살려줘요 김현진>, <주간 김겨울> 등 ‘직거래 구독경제’ 모델을 채택하는 젊은 작가들이 늘어났다.

4. 욜라보카플로드
: 책을 정말 사랑한다는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만들어낸 문화적 키워드. 아이슬란드에는 크리스마스에 책을 선물하는 전통이 있어서 그 무렵 신간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를 ‘욜라보카플로드’라고 부른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책 홍수’라는 뜻.

“이렇게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과연 있을까 싶은데, 아이슬란드가 그렇다고 한다. 아이슬란드에서는 TV 독서 프로그램이 황금 시간대에 편성되며, 1년 내내 이런저런 책 관련 페스티벌이 열린다고 한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에 책을 선물하는 전통이 있어서, 그 시즌마다 신간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를 ‘욜라보카플로드’라고 부른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책 홍수’라는 뜻이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어떤 책을 선물할지를 놓고 뜨거운 토론을 벌인다고 하는데, 정말이지 판타지 소설처럼 들린다.” (p. 152)



5. 장강명 작가의 ‘내 인생의 책’이자 ‘끝내주는 책’, 제임스 엘로이의 <블랙 달리아 1,2>


: 책에 관한 책이니만큼 책 속에는 다른 책에 관한 이야기들도 꼬맹이들 주머니 속 구슬만큼이나 많다. 그중 초반에 장강명 작가의 인생 책으로 소개된 다섯 권의 책 중 하나이자, ‘끝내주는 책’으로 책 중반에 다시 등장하는 책. 1940년대 후반 미국에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끔찍한 범죄소설인데 자신의 장편소설 작법 교과서였고, 언젠가 이르고픈 목표라고 한다. 읽는 사람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종류의 재미가 있다고. 작가는 심지어 문학 독자를 엘로이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냐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단다.
‘소설은 인간을 위무해야 하고, 소설가는 등장인물의 내면을 어루만져야 한다’는 도그마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을 위한 소설. 그리하여 장강명 작가는 오늘도 추악한 이야기를 궁리한다고 한다.     


 6. 나도 본격적으로 쓰는 인간이 되고 싶다면? <책 한번 써봅시다>
: 저자는 책 속에서 “사람들이 누구나 자신의 문제를 단행본으로 만들어 이야기하는 사회”를 꿈꾼다고 밝힌다(p. 100). 그런 사회를 만들려면 지금보다 저자가 훨씬 많아져야겠기에 ‘책 한번 써봅시다’라는 에세이 겸 작업서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그 책이 약속대로 세상에 나왔다. 누구나 자신의 삶 속 문제를 책으로 만들어 이야기하는 사회에 매력을 느낀다면, 나도 본격적으로 쓰는 인간이 되고 싶다면, 한 번 들여다보는 건 어떨까.  

아내 그림인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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