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진민 Oct 09. 2020

[서평] 이름들의 인문학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이름은 그 집의 주소일 것이다”

  리딩리딩 10월분 북 큐레이션으로 올린 서평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이름이라는 열쇠로 그 안에 든 세계를 여는 일.

다양한 분야의 북큐레이터들이 직접 읽은 (a.k.a. 내돈내산) 좋은 신간들을 추천하는 곳입니다. 저는 여기 들어올 때마다 살 책 리스트가 화산처럼 폭발 -_-

  서평 <이름들의 인문학>


  코스모스의 계절이다. 암술도 수술도 별 모양이라 우주를 담은 꽃이라며 어느 분이 올리신 코스모스 사진을 한참 보았다. 그러고 보니 꽃 안에는 별들이 가득하고, 작은 꽃에 이런 무한의 이름이 붙은 것이 묘하기도 하다. 이름으로 인해 이 한들거리는 꽃 안에는 우주의 조화와 질서가 한층 선명히 담긴 셈이다.

정말 별천지. 하지만 꽃술 모양으로 인해 코스모스라는 이름이 붙은 건 아닌 듯 합니다. (사진 출처: http://blogs.ubc.ca/biol343/asteraceae/)

  오랜만에 들른 언니네 집에는 못 보던 아기 고양이가 있었는데 이름이 구찌라고 했다. 애 이름이 그게 뭐냐고 타박을 주려던 나의 입은 이름에 얽힌 사연을 듣고는 얌전히 다물어지고 말았다. 취객에게 막대기로 학대받고 있던 길고양이를 구조한 건데, 앞으로는 누구에게나 귀한 대접받으면서 살라고 붙인 이름이라고 했다. 함께 구조했던 샤넬이는 안타깝게도 결국 무지개다리를 건넜다고.

안녕하세요. 구찌입니다. 털 색깔에 맞춰 이름을 얻었어요.

   이렇게 우리는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꽃의 이름을, 구조된 아기 고양이의 이름을 곱씹으며 또 하나의 세상과 만난다. 이름이란 그 존재를 응축한 음절이므로 그 안에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 그러므로 이름은 세계다.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그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지 않은가. 이름을 부르면 열리는 세계, 그리고 그 안에 든 이야기들. 바로 이런 이야기들을 모아 엮은 책, “무심히 부르는 이름을 통해 인류 지성사를 단숨에 호출할 수 있다”는 책이 있다. <이름들의 인문학 (박지욱, 2020)>. ‘인류가 쌓아온 교양 속으로 떠나는 지식 여행’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더 멋진 부제는 책 뒷면에 실린 강병철 님의 추천사 속 문구라고 생각한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이름은 그 집의 주소일 것이다”라는.


(중략)


  한 챕터씩 부담 없이 경쾌하게 읽을 수 있다. 읽다 보면 우리를 둘러싼 많은 이름을 다시 보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영화 <매트릭스>의 모피어스가 어째서 꽤 그럴싸한 이름인지, 왜 보잉 747은 점보 여객기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 드론이 왜 애초에 지금의 역할과는 어울리지 않는 드론이라는 이름을 얻었는지. 또 검역을 뜻하는 쿼런틴은 왜 쿼런틴이 되었고, 신입생 오티(O/T)와 찬란했던 동방의 문명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수많은 이름에 둘러싸여 살고 있지만 그중 다수를 그냥 어쩌다 붙은 라벨로만 생각하고, 한 세계를 여는 열쇠로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구나 싶다. 불교 집안에서 자라 어릴 적부터 옆구리로 석가모니를 낳은 마야부인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지만 그게 제왕절개를 의미하는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제왕절개나 파과병 같은 이름은 뜻을 따라가다 보면 그 명칭이 꽤 불쾌해지기도 한다. (파과병은 다행히 진단명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제주도가 켈파트, 울릉도가 다줄레라는 이름을 가진 적이 있었다는 사실에는 힘없던 나라의 쓰린 역사가 겹쳐지고, 앤 셜리처럼 끝에 e가 붙은 콩코드 여객기의 이름에는 영국과 프랑스 양국의 투닥거리는 역사가 흥미롭게 들어앉아 있다.


(중략)


  우주에 붙여진 이름들을 다루는 3부에서 행성이며 위성, 소행성, 항성(오랜만에 지구과학적 소양을 긁어모아 이들을 구분하는 것도 일이었다)들의 특징에 따라 신화 속 이름들을 붙인 이야기를 듣는 것도 참 재미있었다. 그리스 신화의 수로 안내인의 이름이 붙은 카노푸스가 현실 뱃사람들의 항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든가, 공전 주기가 빠른 수성에는 발 빠른 신 헤르메스(메르쿠리우스)의 이름이 붙었다든가, 목성(주피터) 주위를 도는 위성에는 주피터, 즉 제우스의 연인들 이름이 붙어 있다든가. 부모가 아무렇게나 붙여 놓은 이름 때문에 힘든 시절을 겪어야 했을 방귀녀, 석을년, 조진년, 박비듬, 김생선 같은 분들의 사례와는 달리 별 하나에 의미롭고 아름다운 이름을 붙이기 위한 천문학자들의 노력들은 놀라웠다. 달로 가는 프로그램에 태양의 신 아폴로의 이름이 붙은 이유들을 보는 것도 무척 재미있고, 아폴로 10호의 모성이 찰리 브라운, 착륙선이 스누피인 사실에는 슬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그렇게 우리 머리 위에도 수많은 이름들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꽤 오래 잊고 살았다. 하나를 열면 좌르륵 쏟아지는 반짝이는 세계. 

  정치를 맡게 된다면 무엇부터 하겠느냐는 질문에 공자는 가장 먼저 이름을 바로잡겠노라 말한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공자는 사물에 올바른 이름을 붙이는 것이 세상 일의 가장 기본이라고 했다. 그것이 논어에 나오는 정명(正名)이다. 피바람이 몰아치던 춘추전국시대에 “정치는 이름을 바로잡는 일”이라고 대답하는 스승을 두고 제자인 자로는 고지식하다고 핀잔을 준다. 그리고는 평소에 유순한 편인 스승님의 활활 타오르는 격노와 마주하게 된다. 자로의 생각이 짧았다. 전란의 시대에 저런 대답을 했다는 것은 거꾸로 우리가 말 한마디, 이름 하나로 피바람이 부는 것을 멈출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나의 본질을 두고 서로 경쟁하는 이름들, 예를 들면 우리에게는 너무 당연한 동해나 독도 같은 것은 아직도 지도상에 다수 존재한다. 한편 사람을 아프게 하는 이름들도 분명 존재한다. 수많은 병신 앉은뱅이 꼽추 미친년들이 장애인이라는 다소 중의적 이름을 얻고 권리를 주장할 수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분노와 아픔이 있었을 것인가. 그러므로 “정치란 이름을 바로잡는 일”이란 말은 자로가 생각하듯이 그리 간단하고 한가로운 대답은 아니다. 그리고 이름을 바르게 하려면 기본적으로 그 이름이 들려주는 이야기, 이름이 담고 있는 역사에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한때 지도에서 없어졌던 조국 폴란드가 사람들에게 기억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새로 발견한 방사성 동위 원소의 이름을 폴로늄이라고 지었던 마리 퀴리. 우리나라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얼굴이 겹쳐져 마음이 뭉클했다. 저자는 이를 두고 “그녀의 조국애에는 반감기가 없었다”는 짧고 아름다운 문장을 덧붙인다. 뮤지엄이 ‘뮤즈의 집’이라는 설명을 듣자니 뮤지엄이라는 공간이 한층 더 소중해진다. 기억의 여신의 아홉 딸들이었던 뮤즈. 그러므로 뮤즈들의 집에는 우리가 기억하고 후세에 전해 줄 것들이 소중히 선별되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나는 뮌헨 근교에 살면서 바이에른 뮌헨 팀이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알리안츠 아레나를 수십 번도 더 지나다녔지만, 아레나라는 이름이 어디에서 왔는지 이번에 처음 알게 되어 몹시 뿌듯하다. 은하수를 다른 나라와 다른 민족이 어떤 이름으로 불렀는지를 짚어 가다 보면 온 우주가 근사한 동화나라의 베일에 싸인 듯한 느낌마저 든다. 이 모든 것들이, 내가 그들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들이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는 순간들이다.


  문과적 뇌라 그런지 가끔은 연결고리를 못 찾아 헤매기도 했지만 이름들의 이야기는 대체로 어렵지 않았고, 덕분에 짧은 시간 안에 내 지식 세계도 내 흥미의 곳간도 활짝 열린 느낌이다. 아이들은 하루에 수십 번도 더 묻는다. “이건 이름이 뭐야?” 세상에 알고 싶은 이름도 많고, 그게 뭔지, 왜 그런 이름인지도 궁금하다. 하지만 세상의 이름들을 대충 알게 되는 나이가 되면 그때부터 우리는 대체로 그저 이름을 수집하는 일에만 몰두한다. 그 뒤의 이야기를 더 궁금해하는 걸 멈추는 것이다. 하지만 이름에 관한 중요한 질문들은 어린 시절을 넘어 전 생애에 걸쳐 꾸준히 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다. 우리가 수많은 이름에 둘러싸여 사는 게 얼마나 재미있고 근사한 일인지, 그 이름을 건드리고 부르는 순간 어떤 꽃들이 피어나는지 알게 되는 일. 세상 곳곳에 예쁜 이름들이 따뜻하게 피어나기를 바라는 이유이기도 하다.





리딩리딩 사이트: https://www.rglg.co.kr/

리딩리딩 인스타그램: https://instagram.com/rglgbook

기습적으로 끼워 팔아보는 이진민 씨 인스타그램 (훗훗): https://instagram.com/kehet


매거진의 이전글 [서평] 불편한 미술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