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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Mar 08. 2022

음식과 단어들 - 셋째, 환대

지영이네 집에는 늘 그냥 놀러 갈 수 있었다. 편찮으신 어른이나 입시생 언니가 없기도 했지만, "우리 집 오늘은 안 된대"가 거의 없었다. 친구들을 데려가려면 사방팔방으로 눈치를 봐야 했던 나로서는 그 무조건적인 환대도 신기했지만, 거실 한쪽에 늘 놓여있던 과자 바구니도 신기했다. 바구니 안에 이런저런 간식거리들이 다양하게 담겨있었는데,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 들고 들어가서 뜯어먹으면 되는 거였다. 형제자매가 많았던 우리 집으로서는 불가능한 시스템이었다. 과자라는 물건은 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어쩌다 생겨도 조금이라도 동작이 늦으면 그냥 질소를 먹어야 하는 집인데 그런 환대의 간식 바구니가 생존할 리 없었다. 집에 오는 누군가를 위해 늘 챙겨두는 바삭한 마음. 나는 그 바구니가 좋았다.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때 요리 실습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먼저 했던 건 다과상 차림이었다. 마실 것과 주전부리를 보기 좋게 담아 누군가에게 대접하기 위한 상차림. 4학년이었나 5학년이었나, 아직 서툴던 사과 깎기를 그것 때문에 열심히 연습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꼬맹이들도 손님을 위한 환대의 상차림을 가장 먼저 배울 만큼 우리에게는 손님을 귀하게 여기는 문화가 있다. 퇴계 선생님을 배출한 진성 이씨 가문 종부님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는데, 언제 올지 누가 올지도 모르지만 손님을 위해서 항상 갈치 가운데 토막은 남겨 놓으라고 배웠다고 한다. 그래서 어린 자녀들이 왜 갈치 가운데 토막이 없냐고 묻곤 했다고. 옛이야기 속에서도 늘 그랬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청하면 시원한 물 한 잔에 요깃거리라도 내주고, 식사 때라면 숟가락 하나 더 놓거나 밥을 푸짐히 담아 따로 상을 내주고. 어린 시절에 그런 이야기를 거듭 읽던 나는 다소 의아한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자란 80년대는 음료수에 독극물을 주입하고, 팔기 위해 생산하는 먹거리에 이윤을 더 남기려고 몹쓸 짓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엄마는 우리에게 아무 데서나 사 먹지 말고, 특히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건 먹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곤 했다. 먹을 것이 더 부족했을 옛날에 어떻게 그렇게 서로를 믿고 먹을 것을 나누는 문화가 깊이 자리 잡고 있었을까. 부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불어로 친구라는 단어는 copain, 즉 빵을 나누는 사이라고 한다. 내가 먹을 것에 독을 치지 않는 사람, 내 삶을 나눌 수 있는 안전한 관계. 길을 잃고 흘러들어 간 땅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총을 겨누면 적이 되고 빵을 건네면 친구가 되는 세상에서, 음식 안에 든 의미로 환대라는 단어를 꼽지 않을 수 없다. <하멜 표류기> 안에도 1653년 제주에 표착한 하멜 측이 조선인들에게 망원경과 붉은 포도주, 바위틈에서 찾은 선장의 은컵을 선물하자 포도주를 마시면서 몹시 흥겨워했고, 우정의 표시로 그 은컵을 다시 되돌려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로는 조선인들이 그들에게 답례로 밥이며 국 같은 것을 내주었을 테다.


먼 길을 걸어 내 앞으로 온 존재에게 우리는 환영의 의미로 따뜻한 눈빛과 음식을 건넨다. 상대는 내 몸 안으로 들어올 무언가를 건네고, 나는 그것을 받아먹는 일. 음식을 먹기 위해 입을 벌리면서 우리는 마음을 함께 연다. 심장 통증과 위경련을 혼동하는 환자들이 많을 만큼 위가 심장과 가까이 있는 건, 음식이 사람의 마음을 이어주는 가장 중요한 매개물이기 때문이 아닐까.


정현종 시인은 <방문객>이라는 시에서 환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그런 바람을 흉내내는 마음으로 우리는 한 사람의 일생이 오는 것을 기쁘게 맞이하고, 잠시 앉아 쉴 곳을 제공하고, 그 사람의 일부가 되어 다시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될 음식을 낸다.


내게 환대란, 좋은 재료를 다 넣은 김치볶음밥이다. 내가 자란 동네에 친구 부부가 김치볶음밥 가게를 열었다. 몇 해 전 초겨울에 나는 엄마를 살펴 드리러 한국에 가 있었는데, 옛 동네도 친구도 김치볶음밥도 그리워서 하루는 마음먹고 인천에서 대치동까지 먼 길을 찾아갔다. 가장 오래 살았던 동네라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성심성의껏 길을 헤매다 겨우 찾았는데, 진영이는 가게에 없었고 래혁이만 놀란 얼굴로 맞았다. 아무 얘기도 없이, 그것도 브레이크 타임 따위 모르고 무작정 어정어정 찾아간 민폐 손님을 주인장은 따뜻하게 반겨 주었다.

"아니 선배 언제 들어온 거예요? 말이라도 하고 오지!"

아 그러게 말이라도 하고 올 걸. 진영이를 못 보고 가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조금 이따가 올 거라고 했다. "안녕! 밥은 먹었니?"라는 다정한 문장이 반짝이고 아들 도연이가 그린 귀여운 엄마 얼굴이 로고로 붙어있는 아담한 가게는 주인 부부를 닮아 있었다.  


"선배 배고파요? 식사 아직이에요? 뭐 만들어 줄까요?"

쉬어야 할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래혁이가 앞치마를 두르고 포스 넘치게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금방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한 상을 내왔다. 스테이크에 삼겹살에 달걀에 스팸에 김가루까지, 가게의 모든 토핑이란 토핑은 다 들어가서 그릇에서 넘쳐 떨어질 것 같은 놀라운 비주얼의 김치볶음밥이 따뜻한 콩나물국을 옆구리에 끼고 나왔다. 좋은 것들이 모두 올라가 있는 뭉클함.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담은 따뜻한 환대가 거기에 있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화룡점정이 있었으니 거기에 짜잔-, 시원하게 물방울이 맺힌 맥주 한 캔이 곁들여져 나왔던 것이다. 원래는 엄두를 못 낼 일이었지만, 가게 문이 닫힌 브레이크 타임이라 맞춤형(음?) 특별 서비스를 받은 것 같다. 빨간 김치볶음밥에 초록색 칼스버그 캔이 무척 잘 어울렸다. 음식 뒤에 '안주' 자만 붙으면 못 먹을 게 없다고 말하는 소설가 권여선은 <오늘 뭐 먹지?>라는 책에서 이렇게 고백한 바 있다. "<오늘 뭐 먹지?>에도 당연히 안주란 말이 생략되어 있다. "오늘 안주 뭐 먹지?" 고작 두 글자 첨가했을 뿐인데 문장에 생기가 돌고 윤기가 흐르고 훅 치고 들어오는 힘이 느껴지지 않는가." 나는 저 부분을 읽으며 마음속으로 벌떡 일어나 작가님과 건배를 했다. 독일 음식은 대체로 기름지고 짜고 맛이 없다. 국경을 이쪽으로 건너면 프랑스고 저쪽으로 건너면 이탈리아인데 대체 독일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맥주에 곁들이면 잘라놓은 슈니첼에 금세 생기가 돌고 학센에 윤기가 흐른다. 독일인들은 이 안주의 마법을 알고 차라리 맥주라는 한 우물을 판 건 아닐까. 그렇게 맥주가 곁들여지는 순간 김치볶음밥과 콩나물국은 세상 아름다운 안주로 변하고, 세상은 두 배로 아름다워졌다. 밥을 거진 먹었을 즈음에 도착한 진영이가 한 캔을 더 꺼내와 내 옆에 앉았고, 순간 세상은 네 배로 아름다워졌다.


꼭 요리를 해야 하는 거창한 음식이 아니어도 좋다. 아주 조그만 음식에도 커다란 환대가 담길 수 있다. 잠깐 들어오셔서 차 한 잔 하세요. 소박하고 아름다운 환대의 마음이다. 여기에서 편히 마음을 좀 풀어놓고 가라는 의미,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면서 시간을 함께 나누자는 권유. 김소연 시인은 "밥이 사람의 육체에게 주는 음식이라면 차는 사람의 마음에게 주는 음식"이라고 했다. 밥만 먹고 헤어지는 관계, 즉 차 한 잔을 함께 하지 않는 관계에는 온기가 없다고도 했다. 흡연자들이 좀 더 당당히 활보하고 다니던 지난 시절에 나는 담배 한 개비를 권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고 자랐다. 아이들이 호의를 담아 비스킷 한 개를 친구에게 권하듯, 어른들은 서로에게 수줍은 자세로 구름과자를 건넸다. 나중에 "뜨거운 물에 차 알갱이가 풀려나가고 담배 한 모금의 연기가 허공에 풀려나갈 때, 그 풀려나가는 실체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마음의 매듭을 푼다"는 김소연 시인의 문장을 읽고 나는 서로에게 권하는 차 한 잔과 담배 한 모금의 의미를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작은 음식에 담긴 커다란 마음이라면 나에게는 얼린 요거트  팩이다. 잠시 한국을 방문했을  전북대로 강의를  적이 있다. 내가 잠시 귀국한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그곳에서 강의하던 휘와 인태가 내게 특강을 청했다. 내가 전달할 내용이 주옥같아서가 아니라, 그들은 강의 준비를  차례   있고 강의를 마치면 같이 맛있는 것도 먹을  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분쟁이라는 키워드를 담은 강의면 좋겠다는 말에(저는 사실 정외과 출신입니다) 내가 약간 고민하며 주저하고 있을  장휘가 호통을 쳤다. 우리가 빨리 특강비를 받아서 같이 술을 먹어야 되는데 지금 어디서 고민이냐고. 그래서 얼떨결에 승낙했다. 또다시 길을 헤매다 (이쯤 되면 지병이다) 기차를 놓칠 뻔했지만 특급 수송 작전으로 무사히 완료한 강의(예술  전쟁의 모습을 짚어가는 강의를 준비했다) 생각보다 만족스러웠고, 나는 편안해진 마음으로 낯선 도시를 즐기기 시작했다. 지영씨가 전주의 풍취를 느낄  있도록 특별히 예쁜 곳으로 안내해 주셔서 따뜻한 국화차를 마시며 모두를 만날 시간을 기다렸다. 어스름이 내려앉은 시간. 드디어 휘와 인태 부부, 전주에 있던 친구 정환이까지 반가운 얼굴이 모두 만났다. 나는 간만에 영어 강의를 하느라 느끼해진 입에 막걸리를 쪼로록 부었다. 코로나가 우리를 덮치기 직전이었기에 시간도 인원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정말로 행복한 술자리였다.


그날의 엠티 장소는 전주 정환이네 집이었다. 우리는 파채가 미친 듯이 올라간 골뱅이와 대왕 계란말이를 포장하고, 가게에서 이런저런 걸 샀다. 내 친구 중에서 가장 변치 않는 초딩 입맛을 자랑하는 정환이가 마치 장군 같은 기상으로 과자를 골랐는데, 나에게 꼭 먹어봐야 된다고 주장한 마늘바게트 과자를 먹어보고 너무 맛있어서 쌍따봉을 날렸던 기억이 난다. 정환이는 종이팩에 든 마시는 요거트를 몇 개 사서 냉장고에 넣으면서 "내일 아침에 진짜 맛있는 거 만들어 줄게," 하고 두산 베어스 철웅이 같은 웃음을 지었다. 그날 밤은 우리들의 인생 뮤지컬과 영화를 돌려보면서 오랜 친구들과 더할 수 없이 편안한 수다의 밤을 보냈다. 낄낄 웃다가 잠든 장휘를 두들겨 깨웠더니 뜬금없이 노래를 불렀고, 정환이가 새벽 세 시를 기점으로 먹방을 시작하자 장휘가 쯧쯧 혀를 차며 합세했다. 우리는 함께 <오페라의 유령>을 보고, <레미제라블>과 <캣츠> 이야기를 하고, 감겨가는 눈으로 <아이 앰 샘>을 보았다. 나는 반가운 정환이 어머님 글씨가 담긴 액자에 뭉클해하면서, 방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친구가 정성껏 깔아준 이부자리에서 자는 호사도 누렸다.

 
다음날 아침, 얼린 요거트를 받았다. 입구를 찢어서 숟가락으로 퍼먹었다. 그렇게 잔뜩 먹고 잤으니  들어가진 않았지만, 아끼는 친구가 만들어준 특별한 간식을 받아  마음이 행복했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는 아이스크림을 별로 즐기지 않는다. 녹은 아이스크림이라는 놈을 생각하면 입에 넣기 싫은 법인데, 그게 얼은 모습으로 양태를 바꿨다고 해서  본질이 좋아지는  이상하다는, 그야말로 이상한 논리를 갖고 있다.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반려인과 같이 살게 되면서, 그리고 아이스크림이라면 환장하는 작은 인간들을 낳게 되면서 그나마 예전보다는 많이 먹게 되었다. 하지만  얼린 요거트는 맛있었다. (마시는 요거트는 애초에 녹은 아이스크림과는 차원이 다른 물건이기도 하다.) 친구는 자기가 알고 있는 정말 맛있는 간식을 만들어 먹여주고 싶었던  같다. 나는  맛있는 마음을 퍼먹었다.

멀리서  친구에게 따뜻한 이부자리를 내주고 하루가 걸리는 간식을 만들어 주는 . 이게 환대의 마음이다. 영국의 푸드 칼럼니스트이자 제빵사인 루비 탄도는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서서히 파고들어, 위장을 통해 그들의 가슴에 도달한다"라고 했다. 그날  위장은 차가웠지만 가슴은 따뜻했다.  차갑고 서걱거리는 얼린 요거트는 내겐  따뜻하고 쫀쫀한 맛이었다.  


맛있게 먹고 행복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내가 아이스크림을 즐기지 않았던 것처럼, 환대는 사실 쉽지 않은 것이다. 환대에는 마음의 엇갈림이 있을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생각과 따뜻한 마음으로 상대에게 호의를 베푼다고 해도, 타인이라는 특성상 나는 그 상대를 충분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앞서 정현종 시인이 "부서지기도 했을, 그래서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이라고 쓴 것은 아마도 타인이라는 존재와 그의 삶을 이해하는 것의 어려움, 그 근본적 한계를 인정하는 조심스러움의 표현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입장에서 좋은 것을 생각하다 보면 이솝 우화 <여우와 두루미>에서처럼 내 호의가 오히려 상대에게는 곤란이 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위해가 되는 일도 있다. <장자> 지락 편에 바닷새 이야기가 하나 있다.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아름다운 궁궐의 음악을 연주해 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하였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하기만 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결국 죽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은 것이다.

 

노나라 임금은 바닷새를 환대하려고 했다. 바닷새가 사랑스러워 기쁘게  주려고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바닷새는 극진한 환대를 받고도 슬퍼하고 어리둥절해하다가 결국은 죽어버렸다. 새에게 필요한 것은 아름다운 음악과 고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환대라는 단어에는 존재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가만히 조용히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는 . 시인의 말처럼 보이지 않는 공기의 움직임 같은 세심함으로, 상대가 깃털 같은 부담이라도 느끼지 않도록 주의하며 마음을 더듬어 보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쉬울 리가 없다.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선생님은 환대를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행위"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되는데, 사람이 된다는  "자리 혹은 장소를 갖는 " 말한다. 서울역 주변의 수많은 노숙인들, " 곳이 없다" 표현, 이런 것들에서 ‘장소를 준다’는 행위의 의미가 우리에게 닿아온다. 하지만 책에서도 언급되듯이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매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일상적인 대접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환대는 자리를 주는 것과 더불어 최소한의 먹을 것을 주는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내가 조금 움직여서 그도 앉을  있게 해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렇게 앉은 이가 배고파 쓰러지지 않게 조금  신경 써주는 . 인간은 추상적인 자리의 점유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꿀꺽꿀꺽 물을 마시고 우적우적 뭔가를 먹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1795년 유럽에서 프랑스혁명 전쟁이 계속되던 와중에 <영구 평화론>이라는 얇은 책자를 내놓는데, 여기에도 환대의 개념이 언급된다. 칸트에 따르면 이방인이 타지 사람의 땅에 도착했다는 이유로 적대적으로 취급받지 않아야 하는데, 이런 세계시민적인 태도를 환대라고 부른다. 칸트는 이 환대를 그저 시혜나 인류애의 차원이 아니라 인류의 '권리'라고 말한다. 이렇게 적대 없이 머물다 갈 환대의 권리가 보장될 때에만 인류는 영구한 평화를 향해 지속적으로 나가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칸트가 이런 작은 책자를 내놓은 이유는, 칸트의 도덕률에 따르면 전쟁은 악이고 영원한 평화는 인류가 도달해야 할 과제이자 의무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는 독일에서도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피해 들어오는 이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대중교통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해 주고, 난민들이 머무를 수 있도록 방 한 칸을 내줄 수 있는 가정들의 신청을 받고 있다. 따뜻한 쉴 곳과 음식이 필요한 사람들. 독일보다 앞서 전방위적으로 난민들을 돕고 있는 폴란드에서, 한 군인이 갓 도착한 우크라이나 아이에게 인형을 건네는 사진을 보고 나는 얼린 요거트를 먹었을 때처럼 속이 시리면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시인의 말대로 사람이 온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다. 시인의 말대로 이미 산산이 부서졌을 그들의 마음을 헤아릴 길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따뜻한 자리를 내주고 따뜻한 음식을 내어주는 일로 부서진 그들의 마음 또한 조각을 맞춰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어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지음이가 신나는 얼굴로 말했다.
"엄마, 우리 반에 야릭(Yaroslav를 줄여서 이렇게 부르나 보다)이라는 친구가 새로 왔어. 야릭은 밀리오넨(일만)까지 셀 수 있대!"

하루 전에  학부모 단톡방에 우크라이나에서 온 야릭네 가족이 어떤 도움을 구하고 있는지 설명하는 글이 올라왔었기에 사정을 알고 있었다. 야릭과 그의 가족들이 이곳에서 따뜻한 환대를 받기 바란다. 야릭네 아빠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야릭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나기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크기를. 기회가 된다면 친구네 가족을 초대해서 안 맵게 만든 김치볶음밥과 아이스크림을 대접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글에 등장하는 김치볶음밥 전문점이 등장하는 기사입니다. 후속 기사가 궁금하군요 :)

https://www.chosun.com/opinion/touch_korea/2020/12/05/XA2UCLNZVZE73B6GDKW76XXB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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