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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Jan 04. 2022

그 시절 우리의 뉴욕 오빠

음식과 사람들 (3) - 이제는 먹을 수 없는 음식들

이제는 먹을 수 없는 음식들이 있다.

이제는 먹을 수 없는 음식이라 함은 아마도 세 가지 경우. 그걸 요리해 줄 사람이 없거나, 이제는 그 재료를 구할 수 없거나, 아니면 그 시공간을 지나왔기에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그런 음식.


요리해 줄 사람이 없어져서 이제는 먹을 수 없는 음식이라면 내게는 엄마가 해주시던 몇 가지 메뉴가 떠오른다. 가장 그리운 건 엄마표 탕수육. 이걸 탕수육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깐풍육이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극히 맛있었다. 손가락만 하게 썬 돼지고기에 튀김옷을 입혀 폭신하고 동그란 모양으로 튀겨낸 다음, 붉은 기가 도는 소스에 버무려 주셨던 음식이다. 매콤 2, 짭짤 3, 달콤 5의 아름다운 비율을 자랑하는 소스가 고소한 고기 튀김과 찰떡처럼 어울렸다. 얕게 팔랑거리는 단맛이 아니라 단맛이 진중하다고 해야 하나(쓰면서 나도 대체 이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아무튼 깊이가 있는 단짠이었다. 당시에 자매처럼 같이 등하교하던 친구도, 우리 엄마가 학교 가면서 먹으라고 호일에 싸서 손에 쥐어주시던 이 탕수육 맛이 그립다는 얘기를 곧잘 한다. 만드는 법을 좀 배워둘 걸. 재현하기 어려워서 가장 아쉬운 음식이다.


 번째로 약간 다른 의미에서 레시피가 궁금한 엄마표 음식은 야채수프. 솔직히 약간 이상한 토마토 수프였다. 당시에 신문물의 수용에 호의적이었던 엄마는 빵이며 수프, 피자 같은 서양 레시피에 과감히 도전하셨는데  수프는 엄마의 시그니처 메뉴로 남을 만큼 독특했다. 내가 지금 엄마가 되어 엄마의 마음으로 생각해 보니, 각종 채소가 듬뿍 들어갔으니 우리의 표정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신나서 끓이지 않으셨을까. 당근, 감자, 양파 등을 깍둑 썰어 버터에 볶은  육수를 붓고, 아마도 케첩을 조금 넣어 베이스로 쓰셨던  같다. 완두콩을 더해 뭉근히 끓여내면 케첩의 쨍한 맛은 채소의 단맛과 어우러져 그럭저럭 희한하게 맛이 깊어졌다. 엄마는 곰탕 끓이듯 대용량으로  수프를 정말 자주 끓이셨고, 우리는  오묘한 맛에 서서히 길들여졌다. 지금도 손바닥으로 그릇을 감싸 쥐고 따끈한 온기를 느껴가며 다시 한번  희한한 맛을 음미하고 싶은 메뉴.


엄마 음식 중에서 그리운 걸 세 가지 꼽으라면 병어조림이나 연근전이 들어가겠지만 그건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음식이었고, 우리 형제자매들이 입을 모아 그리워하는 음식은 저 탕수육과 수프 말고도 햄버그가 있었다. 햄버거가 아니라 햄버그라고 부르던 것. 말랑말랑 폭신한 모닝빵에 직접 빚어 구운 뚱뚱한 고기 패티를 넣고, 케첩과 마요네즈를 섞은 뒤 양파를 다져 넣은 드레싱을 잔뜩 바르고 노란 체다 치즈도 넣어주시던 미니 햄버거. 손이 큰 엄마는 놀라운 양을 생산(이건 단연코 요리가 아니라 생산이었다)하셨고, 작은 사이즈에 방심하며 그걸 홀랑홀랑 집어먹다 보면 살이 부둥부둥 쪘다.


정채봉 시인은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이라는 시에서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단 5분이라도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 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라고 말했다. 나는 일단 엉엉 우느라 말을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전하고, 그곳에서 지낼 만한지, 혹시 정리를 못하고 가셔서 신경 쓰이는 일은 없는지 물은 뒤에 저 탕수육 만드는 법을 묻겠다.     


재료를 구할 수 없어서 이제 먹을 수 없는 음식은 고맙게도 딱히 생각나는 건 없다. 하지만 나이 들면서 생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있다. 환경 문제든 소비 행태의 문제든, 수급이 점점 어려워져서 가까운 미래에 먹기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는 식재료와 음식들이 있다고 한다. 아보카도와 초콜릿이 그렇고, 품종개량을 통해 단일종으로 만들어 버린 바나나가 그렇다. 기후 변화와 물 부족으로 홉과 포도의 수확량에 문제가 생겨 맥주와 와인도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들었다. 아보카도가 없는 세상을 생각하니 슬프기 그지없고, 맥주와 와인이 넘쳐흐르지 않는 세상을 생각하니 이건 디스토피아가 따로 없다. 망할 놈의 인간들. 뭐든지 적당히 중용을 지키고 망쳐놓은 걸 되돌리려는 절실한 노력이 필요하다. 자연을 위해서도, 우리의 행복한 식생활을 위해서도.


마지막으로 특정한 시공간을 지나왔기에 다시는 먹을 수 없는 음식이 이번 글의 주인공이다. 추억에 재워 뒀기에 맛이 생생하고 그리운 음식. 하지만 다시 맛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음식. 몇 가지 생각나는 음식들이 있는데, 오늘의 메뉴는 뉴욕 오빠가 동생들을 집에 불러서 먹여주던 통삼겹 구이다.
 

같은 학교 같은 과 대학원에서 정치사상을 공부하던 무리가 있었다. 정치사상은 정치학과 내에서도 늘 소수 내지는 비주류를 담당하는데, 우리는 나름대로 다수와 주(酒)류를 담당했다. 지금은 우리 과에도 정치사상 전공자가 그리 많지 않다고 하는데, 내가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는 제법 많은 수가 사상에 매력을 느껴 불나방처럼 찾아들었다. 황금기인 줄도 모르고 함께 황금기를 만들었던 사람들. 그렇게 모인 우리는 늘 같이 밥 먹고 술 먹고 책 먹으며 패밀리처럼 지냈다. 만권 오빠는 그 사상 패밀리의 수괴(?)였다. 우리 중에서 나이도, 공부한 날도, 낸 저서도, 말도 제일 많았다.


사상 패밀리는 대체로 유학을 꿈꿨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정작 유학을 가게 된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가 원하는 곳에 둥지를 틀고 새롭게 공부를 이어갈 수 있기를 한마음으로 응원했다.


오빠가 1년 먼저 뉴욕으로 유학을 떠났다.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에 우리는 풀(full) 브라이트(bright)한 얼굴로 물개 박수를 쳤다. 내가 어쩌다 그 모습을 보게 되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유학 가기 전 학교에 마지막으로 인사를 왔다는 오빠가 연희관 앞 벤치에 혼자 앉아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걸 봤다. 원래도 여기서 눈물 저기서 콧물 쏟고 다니는 울보인 건 알았지만, 그날의 울음은 뭔가 느낌이 달랐다. 그저 뒷모습을 볼뿐인 나에게도 형언할 수 없는 다층의 감정이 고스란히 닿아왔다. 먹먹하게 쳐다보다가 살짝 옆에 앉아서 무슨 대화를 나눈 것 같은데, 대화는 기억이 잘 안 나고 쨍한 햇빛을 받으면서 엉엉 울던 그 하얀 얼굴만 기억난다.  


나는 뒤이어 보스턴 근교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그때의 나를 돌아보면 약간 미쳐있었다. 겉으로는 씩씩하게 어허허 웃고 다녔지만, 정서적으로 불안했고 힘들었고 외로웠다. 원래 외국에 산다는 건 그냥 숨만 쉬어도 에너지가 들기 마련인데, 한국말로도 힘든 책들을 그들의 속도로 읽어내고 알아듣고 토론하고 써내려니 죽을 맛이었다. 인정받던 익숙한 공간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새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몇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고국에 연인을 두고 나온 사람들은, 특히 여자의 경우에는 결혼과 이별이라는 인정머리 없는 선택지 안에서 대체로 이별을 택해야 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을 듯 하지만, 유학생 부인이라는 말은 제법 들어도 유학생 남편이라는 말은 듣기 힘든 시절이었으니까. 위로해 줄 사람은커녕 당장 읽어야 할 책들이 가득 쌓인 조그만 방에서 이별을 맞는 사람들은 축축해진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애써 활자에 눈을 고정하고 책장을 적셨다. 늘 그렇듯 이별에도 공부에도 시간이 약이었다. 차차 생활에는 익숙해졌지만,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연인 없이 유학생으로 산다는 건 쓸데없는 에너지가 더 들었다. 가끔은 그게 더 힘들었다. 같이 유학 나온 사람들과 간간이 생존신고를 나누며 버텼다. 사상 전공 말고도 각 분야에서 유학을 나오는 후배들이 차곡차곡 늘어났다.


그렇게 꾸역꾸역 학기를 쌓아가던 어느 겨울, 휴스턴에서 유학 중이던 성희가 크리스마스를 맞아 놀러 왔다. 우리는 뉴욕 여행을 계획했다. 성희는 캐리어를 끌고 나는 그냥 조그만 가방을 들고 갔던 걸 보면, 성희는 좀 더 머무르거나 다른 곳으로 여행을 지속할 예정이었고 나는 당일치기였던 것 같다. 우리는 곧 반가운 얼굴을 만나게 될 거라는 말랑한 마음으로 공원에 울려 퍼지는 피아노 선율을 즐겼고, 거리의 예술가가 하나씩 조그맣게 그려 내려가는 얼굴들을 구경했다.

그날의 사진들

밀푀유를 하나 사서 그놈의 천 겹짜리를 잘라 공정하게 나눠먹고 있으려니 수척해진 오빠가 나타났다. 한국에서 별명이 토토로였던 만권 오빠는 뉴요커가 된 이후로 반을 뚝 잘라 오천 권이 된 외형으로 많은 인간들을 놀라게 했는데, 살이 빠진 탓인지 아니면 뉴욕이라는 환경 탓인지 아무튼 두부도 썰 수 있을 것 같은 날렵한 턱선을 뽐내며 각종 패션 아이템을 장착하기 시작했다. 그날도 얇은 반코트에 크로스 백을 매고 끈 목걸이를 하고 나타난 오빠는 빙글빙글 웃으며 성희의 캐리어를 끌고 앞장섰다. 연말이었지만 뉴욕의 날씨는 온화했다. 거리의 사람들도 성희도 가벼운 차림이었다. 그때부터 수족냉증으로 고생하던 나만 두꺼운 니트에 털 달린 코트를 꾸역꾸역 꿰어 입고 뒤를 따랐다.


햇살이 넉넉한 길을 한가롭게 걸었다. 저 커피샵은 누가 커피를 마셔서 유명해졌고, 저 라멘집은 언제 생겼는데 맛이 어떻고, 라이브를 연주하는 어떤 바를 알게 됐는데 진짜 대박이고. 오래간만에 김만권의 조잘조잘을 들으니 좋았다. 걷다가 재미있어 보이는 곳이 있으면 쏙 들어갔다. Ten Thousand Villages라는, 세계 곳곳의 선물 아이템을 파는 공정무역 가게가 눈길을 끌었다. 독특한 감성의 신기하고 예쁜 물건들이 많아서 한참을 구경했다. 읍내 장터 구경 나온 누이들 보듯 흐뭇하게 바라보던 오빠가 우리에게 사주고 싶다며 작은 향수를 하나씩 고르게 했다. 유학생 처지 뻔한데 무슨 돈이 있다고, 하며 시비를 걸자 인세가 많이 들어와 괜찮다고 했다. 당시의 오빠는 세상에 내놓은 책이 이미 제법 있었고, 당시의 나는 인세 수입이라는 것이 (대체로는) 그리도 가성비 떨어지는 것인 줄 몰랐다.


어쨌든 코를 백 번쯤 들이대고 킁킁거리다 각각 라일락 향과 장미 향을 골라 들고 한층 행복해진 우리는, 광장에 펼쳐진 크리스마스 마켓도 구경했다. 서로의 발길을 잡아끄는 가판대들이 달라서 우리 셋은 자연스레 헤어졌다 만났다 했는데, 트리 장식에 홀렸다가 일행을 찾느라 두리번거리니 오빠가 향신료 매대 앞에서 행복해하고 있었다. 가서 툭 치니 멍멍이처럼 웃었다. 자기는 저렇게 향신료가 가득 쌓인 모습만 봐도 너무 좋다고. 색색의 물감을 앞에 두고 행복해하는 화가처럼, 알록달록하게 펼쳐진 향신료들 앞에서 좋아하는 오빠가 귀여웠다. 우리 오빠는 커서 셰프가 되려나. 뭐 필요한 거 없냐고 물었더니 집에 다 있다고 개뻥을 쳤다.

지금 보니 무려 프렌치 라일락과 페르시안 로즈. 지금도 향이 떠오를 만큼 좋아했다. / 우리가 들렀던 유니언 스퀘어 홀리데이 마켓. / 향이 엄청났던 오감만족 가판대.

당시 뉴욕에서 공부하던 영환이가 합류했다. 이름은 알았지만 만나서 이야기를 오래 나눈 건 처음이었는데, 세상에 이렇게 무해한 사람이 있나 싶었다. 돌아갈 버스 시간이 정해져 있던 나 때문에 우리는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전체적으로 노란 조명이 어둡고 테이블마다 촛불을 켜 놓은 아늑한 바에서 우리는 거품이 부드럽게 올려진 기네스와 오렌지 조각을 달고 나온 블루문을 마셨다. 그렇게 행복한 노가리 속에서 저녁이 찾아왔다. 나는 돌아가야 했고, 다른 친구들에게는 오빠가 2차로 집에 가서 삼겹살을 구워주기로 했다.

흐리게 나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것 같아서 막 올리는 사진들. 첫 사진은 어두움 속에서도 웃음의 밝기가 느껴져서 좋아하는 사진.

갈 시간이 된 버스 정류장 앞에서 나는 거대한 회유의 파도에 부딪혔다. 담배 한 대씩을 맛있게 피우고 전열을 가다듬은 그들이 야생 이진민 포획 작전을 시작했던 것이다.
"너도 그냥 같이 술 한 잔 하고 자고 가라."

"누나아-"

"언니이-"
어둠이 내려앉은 버스 정류장에서 메아리처럼 울려대던 다정함들에 포위된 나는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메가버스를 포기하고 뉴욕에 눌러앉았다.


오빠네 집으로 가는 길은 두 배로 신이 났다. 맥주 탓이었을까, 나를 포획하는 데 성공해서였을까, 포획당해서 행복해서였을까, 우리는 가는 내내 많이 웃었다. 오빠는 집으로 가면서 아침에 맛있는 빵을 먹으러 종종 들른다는 노란 간판의 카페를 보여주였고, 우리는 오빠네 근처 작은 가게에 들러 쌈채소와 버섯 같은 걸 샀고 각자 좋아하는 맥주도 골랐다.  


그 뒤로 몇 번 더 오빠가 구워주는 통삼겹을 먹었지만 오빠네 집도, 오빠의 통삼겹도 나에게는 그날이 처음이었다. 뭐할까요 물으니 꼼짝 말고 가만히 있으라며 허허 웃었다. 평소에 늘 주방에서 종종거리는 포지션이던 나는 오랜만에 아무것도 안 하고 마치 친정에 온 누이처럼 오빠가 해 주는 음식을 즐겼다. 그래도 차마 부엌을 떠나지 못하고 오빠네 부엌에 오종종 놓여있던 차들을 구경하던 생각이 난다.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해서 이미 반나절 정도 와인에  숙성시켰다는 통삼겹 덩어리들이 냉장고에서 나왔다. 이놈들을 오븐에 넣어 구워야 하는데, 문제는 오븐이 낡아 몇 도인지 표시가 안 된다고 했다. 대충 이 정도 스위치를 돌리면 돼, 하고 오빠는 현명한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다. 30분 정도 구우면 안이 아직 다 안 익어서 핏물이 촉촉한 상태인데, 이걸 잘라서 동그란 무쇠 팬에 마치 욱일기의 형상으로 (망할, 적당한 비유를 못 찾겠다) 꼼꼼히 늘어놓아 구우면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삼겹살의 이데아가 만들어진다. 그 맛에 놀란 자들이 비결을 청하니 오빠는 반드시 껍데기가 있는 통삼겹을 사야 한다고, 정말 좋은 팬을 사서 오래 쓰는 것도 중요하다고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3년 정도 삼겹살 기름을 머금더니 팬 자체가 맛을 만들어 낸다며 의기양양한 표정도 지었다. 뒷날 어느 여름에 다시 갔을 때는 생강과 계란 지단이 올라간 시원한 메밀국수가 함께 나왔었는데, 이 날은 고기가 오븐에서 땀을 내며 익는 동안 오빠가 부지런히 유부와 두부와 실파를 쫑쫑 썰더니 하트가 떠있는 따뜻하고 맑은 미소된장국을 끓여 곁들여 주었다.

초벌구이, 재벌구이, 하트가 뜬 미소된장국.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을 만큼 가득 먹고 배가 동그래지자, 오빠는 우리에게 따뜻한 차를 한 잔씩 내주고 기타를 들었다. 한국에서도 사상 패밀리의 생일날이면 라이브 연주가 가능한 술집에서 종종 '가질 수 없는 너' 따위를 들려주던 오빠였다. (참고로 그 노래를 듣는 건 남자 후배들이었는데 부디 가지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기타 소리를 듣고 있으니 노곤해지면서 점점 앉은키가 낮아졌다. 유학하면서 다양한 감정으로 수도 없이 술을 마셨지만, 이날 마신 술이 제일 맛있었고 이 날의 술자리가 가장 행복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이 인간이 없었다. 간밤에 너무 행패를 부려 우리를 버리고 도망친 건가 진지하게 참회를 하려던 순간, 오빠가 사냥에 성공한 엄마곰의 얼굴을 하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우유 한 잔을 따라서 아직 따뜻한 크로와상을 주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알 수 없는 약식 한 조각과 함께. 아침에 서둘러 나가서 간밤에 얘기한 그 빵집에서 사 왔다고 했다. 마음 붙일 곳 없던 시절에 그렇게 오빠 마음을 듬뿍 먹고 돌아오면 좋았다. 우리의 수괴는 그렇게 나뿐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 모여드는 동생들을 삼겹살로 따뜻하게 품어줬다.

생긴 꼬라지를 보아하니 저 약식은 내가 만들어 간 것 같은데 기억력 감퇴로 당최 알 수가 없다.

지금 그날의 친구들은 (나만 빼고...) 모두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다. 한국에서, 영국에서, 스웨덴에서, 아마 그때의 우리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는 학생들을 만나고 있겠지. 모두들 가난하고 마음이 움츠러들어있던 시절, 서로의 얼굴을 보며 잠깐 마음의 기지개를 켜던 시간. 구겨진 종이 더미 속에서도 반짝 빛나는 시간이었다.


이제는 그때보다 주머니 사정이 나아져서 같이 만나면 더 비싸고 귀한 음식을 먹기도 하지만, 지친 몸과 마음으로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안은 채 모여든 동생들에게 오빠가 구워 먹이던 그 삼겹살 맛이 종종 그립다. 마음도 내려놓고 위장도 내려놓고 젓가락만 집어 들고 달려들던. 세상에 돼지는 많고 삼겹살도 많겠지만, 아마 다시 먹을 수는 없을 음식이다. 그 맛을 다시 보려면 한 학기 내내 찌그러져 있던 마음이 있어야 하고, 기타 소리와 실없는 농담들이 곁들여져야 하고, 몇 도인지 표시가 안 되는 오븐이 있어야 한다.

 

작년 가을에는 정말 오랜만에 그날의 멤버 중 둘을 만나고 돌아왔다. 시간이 지나 십 년 이십 년 뒤에는 이번 가을에 함께 먹은 음식들을 추억하지 않을까. 시간이 내려앉으면 우리가 먹었던 음식들은 기억 속에서 또 희한하게 맛이 깊어지겠지. 그런 의미에서 시간은 약이고, 시간은 양념이다.


그 시절, 함께 죽어나가면서도 동생들을 어미닭처럼 품어주었던 우리의 뉴욕 오빠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요즘 일이 너무 많아 병든 닭처럼 지내는 오빠. 언제든 독일에 놀러 와서 내가 넣어주는 사식(?)을 먹으며 몸도 마음도 활짝 펼 수 있는 시간을 갖기를, 그렇게 나도 오빠에게 ‘그 시절 나의 독일 동생’이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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