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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Sep 07. 2021

홍익인간

음식과 사람들 (2) - 회 뜨는 뮤지션

나는 요리에 취미가 있는 사람이 좋다.

먹을 것을 직접 정성껏 맛있게 만들 줄 아는 사람들.

입에 들어가는 걸 의무나 권태의 영역으로 여기지 않고 호기심과 행복의 영역으로 가꾸고 유지하는 사람들.


요리를 잘한다는  대체로 나도 행복하고  사람도 행복한 일이다. 적절한 요리 스킬을 갖추는  나의 생존에도  필요한 일이지만 사랑하는 상대의 어깨를 엄청 가볍게  주는 일이기도 하다.  입에 들어올 것을  남에게만 맡기는 삶이란 왠지  그렇다. 한두  들어오고   아니라서  그렇다.


음식을 잘 만드는 사람도 좋지만, 그걸 주변 사람들과 즐겨 나누는 사람은 좋은 걸 떠나 사랑스럽고 존경스럽다. 내 입에만 넣는 게 아니라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의 이념 따라 남의 입에도 부지런히 넣어주는 사람들. 이번 글은 내 주변의 그런 홍익인간들 중 단군 할아버지에 가까운, 홍익인간 왕에 관한 이야기다. 



이 인간이 요리에 취미가 있다는 사실은 대충 알고 있었지만 요리에 정말 진심이구나 하는 건 45kg이나 되는 생참치 절반을 집구석에서 해체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였다. 자기도 참치 해체는 처음이라 당황스러워하는 것 같으면서도 평소에 들을 일 없던 사투리가 막 튀어나올 만큼 굉장히 신나 보였다. 아, 정말 좋아하는구나.


데바칼을 잡고 집에서 생참치를 해체하는 이 사람의 직업은 뮤지션이다. 인우는 자기 이름으로 여러 곡을 낸 싱어송라이터이자 작곡가, 음악감독이다. 과 후배로 인연이 닿았다. 비교적 최근에 인연이 닿았다는 점이 조금 아쉽지만, 신촌 바닥에서 구르던 시절에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분명 지금쯤 함께 통풍에 걸려있을 거라는 데 서로 동의했다.


지인 중에 뮤지션이 있다는 건 엄청난 특권이다. 친구가 다른 언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느낌이랄까. 책 작업을 하면서 적당한 배경음악이 필요할 때 인우의 연주곡을 많이 들었다. 측근의 지위를 이용해 랜선으로 멱살을 쥐고 흔들면 직접 만든 기타 연주곡 파일이 툭툭 떨어지는데, 그걸 주워 먹는 맛이 꿀맛이었다. 그는 다루는 악기가 많다. 최근 화제가 된 MSG워너비의 <바라만 본다> 기타를 인우가 쳤다. 심지어 가야금까지 뜯을 줄 안다는데, 언제 한 번 가야금으로 메탈리카의 <Creeping Death> 같은 거 해달라고 하고 싶다.


친구들이 쓴 글을 보는 것도, 친구들이 그린 그림을 보는 것도 참 좋아하지만 친구가 만든 음악을 듣는 건 또 다른 느낌이다. 음악에는 공간을 채우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글이나 그림은 내가 의식적으로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음악이란 건 넋 놓고 가만히 있는 나를 안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능력이 있다. 눈은 감을 수 있고 입은 다물 수 있지만 귀는 슬램덩크의 강백호가 아닌 이상 스스로 닫기 어렵다. 그렇게 음악은 가만히 있는 우리에게 스며든다. 나는 주로 새벽에 글을 쓰는데, 세상 만물이 고요할 때 그가 만들고 연주한 나직한 곡들을 듣는 느낌이 참 좋았다. 잠시 쉴 때 볼륨을 조금 높이면 음들이 마음에 스몄다가 달랑달랑 방울져 맺히는 것 같았다. 거기다 따뜻한 차 한 잔을 곁들이면 유난히 맛이 좋았다. 내가 아는 사람의 머리에서, 손에서, 마음에서 나온 음악이라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기하고 친밀한 느낌을 준다.


인우는 그렇게 곡 작업을 하는 작업실 테라스에 긴 테이블을 놓고 거기에 작은 부엌과 업소용 냉장고, 각종 조리 장비들을 들여 예쁜 살롱을 개장해 놓았다. 누가 보면 진짜 작은 가게 수준이다. 겨울에는 거기에 진짜로 포장마차를 만들어 지인들을 초대했다.

Super Salon 하절기 에디션과 동절기 에디션. 사진은 그의 인스타그램(@inoopark)에서.

폰 화면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 싶게 만드는 놀라운 음식 사진들이 올라오면 사람들은 저요 저요 손을 들었다. 그런데 댓글을 다는 그 모든 이들의 열망을 하나씩 다정하게 받아주는 모습이 나는 다소 의아했다. 아니 이걸 다 받아 준다고? 그런데 그는 친절했다. 정말 그 친절함이 몹시 흥미로울 정도로 친절했다.


다시 말하지만 본업은 뮤지션이다. 술 마시고 뻔뻔해진 인간들이 음악을 청하면 군말 없이 기타를 들고 온다. 이건 뭐 수라간 상궁 마마님이 장악원 수석 아쟁러를 겸하는 느낌이랄까. 음식도 잘하는 수준을 진작에 뛰어넘었다. 그 신세계를 한 번 맛본 사람이 또 가고 싶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면 이 인간은 또다시 친절하게 받아주고 어미새처럼 입에 맛있는 것들을 넣어준다. 여간 힘든 일이 아닐 텐데, 자신의 인생을 공공재 인생이라고 칭하며 껄껄 웃는다.


수비드 오겹살에서부터 이탈리아 요리까지 별 걸 다 하지만 자타공인 주종목은 일식, 즉 회를 뜨신다. 한 번은 나에게 생선 사진 여러 장을 보내며 이름을 맞춰 보라고 하기에 잠깐 절교할 뻔했다. (두 번째 절교할 뻔했던 순간은 8분의 13박자를 설명해주겠다며 덤비던 순간이었다.) 빨간 물고기가 둘에 반짝이는 물고기가 여덟이었고 한 놈은 주둥이가 댓발 나와있었다. 아니 이분들의 존함을 다 기억해야 하는 건가. 그런데 물고기들의 그 동그란 눈과 아이 컨택을 하며 생각해 보니까 얘네들 이름을 다 아는 건 기본이고 언제가 제철이고 어떻게 손질해야 하고 어떤 맛인지를 다 알아야 하니, 정말 만만치 않은 취미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기엔 용왕님 같은 식생활을 하는데, 용왕이 해산물 먹는 건 좀 그렇지 않냐고 말하는 따뜻한 감성과 애민정신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익히지 않은 해산물에 그다지 취미가 없는 편이었다. 생굴을 먹을 수 있게 된 것도 최근이고 아직 멍게 같은 건 딱히 도전의식이 생기지 않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용왕님께서 나를 가엾게 여기셨다. 다음에는 멍게를 준비하겠다고, 이제 멍게 먹을 나이가 되었다고. 나는 용왕님께서 오래 기억 못 하시기를 바라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다행히 용왕님은 기억력이 그리 좋지 않으셨다.


회도 회지만 이 집의 진정한 비밀 병기는 레몬 소주다. 낮에는 두 발, 밤에는 네 발로 걷는 건 이 집의 레몬 소주를 마신 사람들이다. 그냥 레몬과 소주로만 만드는데 엄지가 나도 모르게 기립한다. 아니 어쩜 이렇게 소주의 쓴맛은 온데간데없이, 묵직한 포스만 저 밑에 남긴 새콤 청량한 맛이람. 이라고 생각하고 나도 잠시 저세상에 다녀왔다. 그야말로 사람들 얼굴을 불타게 하여 널리 홍(紅)익인간으로 만드는 마성의 아이템이다. 최근에 용왕님께서 레몬 소주의 상위 버전으로 라임 소주를 출시하셨다. 레몬보다 라임을 세 배쯤 좋아하는 나는 홍익인간의 결심으로 세 번 절하고 나아가 마셨는데 그 맛이 일품이었다. 토끼가 용왕님 앞에서 간을 그냥 빼놓고 올만한 맛.


인우랑은 유머 코드가 유독 잘 맞는다. 잘 맞는 정도가 아니라 가끔 같은 드립을 동시에 내뱉어 소름이 돋을 때가 있다. 유머 코드가 잘 맞는다는 건 그냥 같이 깔깔거리는 관계라는 단편적인 말 이상의 의미가 있다. 툭툭 던지는 서로의 말에 더할 수 없이 유쾌해지는 관계가 되려면 일단 갖고 있는 지식의 총체 같은 게 얼추 비슷해야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가치관이 비슷해야 한다. 서로가 던지는 말을 바로 이해하고, 웃어야 할 곳에서 같이 웃고, 웃지 않아야 할 곳에서는 함부로 웃지 않는 사람. 사실 만나기 쉽지 않다.


그렇게, 늘 만나면 즐겁다 보니 그늘이 보이는 일이 드물었다. 항상 여유 있어 보이고 생각에 딱히 가시가 돋거나 모난 데가 없고, 얼굴도 다크서클만 빼면 해사한 편이라 (다크서클은 피로도와 관계없이 늘 그 자리에 있는, 몽고반점 같은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큰 줄 알았다. 크게 고생 안 하고, 유쾌하고 포근하게. 그런데 열두 살부터 하숙을 하며 혼자 살았고 열다섯부터 자취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오늘 뭐 해 먹지, 끼니를 걱정하던 사람이었다고. 자기가 스스로도 말하듯 도박과 같았던 자유방임에서 용케 반듯하게 살아남은 그는 그렇게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들을 베푸며 산다. 가끔 어린 그가 혼자 먹었을 끼니들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렇게 엄마처럼 따뜻하게 베푸는 존재가 된 그의 마음이 걸어왔을 시간들도 생각해 본다.


그가 오랜 지인의 결혼 선물로 정성을 담은 상을 손수 차려 준 걸 본 적이 있다. 그 놀라운 비주얼에 충격을 받은 몇몇 지인들은 결혼을 다시 해야 하나 위험한 고민을 하기도 했다. 좋은 것, 맛있고 귀한 걸 가득 담은 그 음식 사진들을 보면서 나는 마음도 울컥하고 위도 울컥했다. 회를 내오면 이게 무슨 생선이고 어떤 부위고 어떻게 먹으면 좋은지,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다양한 맛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냥 솜씨만 좋은 게 아니라 음식에 마음을 담는 법까지 아는 사람이다. 결정적으로는 우리 엄마와 병어조림에 관한 내 글을 읽고 마음이 짠했다며, 그걸 기억했다가 병어조림을 해주기도 했다. 음식은 가끔 그냥 그 자체로 언어를 대신한다. 먹다가 촌스럽게 조금 울고 말았다. 살살 녹는 병어조림과 함께, 내가 다른 글에 소원이라고 썼던 새우튀김의 소원도 같이 들어줬다. 원래 그 글에 등장했던 새우 요정은 다른 친구였는데, 그 친구의 말에 마음으로 배불렀고 인우의 실행력에 현실로 배불렀다. 나의 글을 읽고 내 버킷 리스트를 기억했다가 따뜻하고 솜씨 좋은 손으로 이렇게 지워 주는 친구들이 있다니, 인생이 이 정도면 정말 행복한 거 아닌가 싶다.

정신을 잃고 먹느라 새우튀김 사진이 없군요

하지만 반전 아닌 반전이 있었으니, 아무리 그런 베풂의 포지션에 스스로를 기꺼이 밀어 넣는 사람이라도 역시 남이 자기를 위해 해준 음식을 먹을 때가 행복한 법이다. 오랜만의 귀국을 앞두고 잠시 얘기를 나누다가 ‘나도 누나가 해 준 맛있는 거 먹고 싶어.’라는 말에 나는 그만 마음이 짠해지고 말았다. 병어조림과는 형평성이 맞지 않게, 멋대가리 없이 그냥 독일 소시지를 가져다 데워주고 말았지만 그래도 맛있게 먹는 모습이 참 예뻤다. 대신 독일에 놀러 오면 맛있는 거 많이 해 줄게.


세상에 늘 대접만 하게 생겨먹은 사람은 없는 법. 그러니 베풀길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가끔은 그 사람에게 베풀기를 바란다. 솜씨는 좀 부족하고 맛은 오묘해도, 남이 해 준 음식 자체가 주는 기쁨과 위안이 있는 법이니까. 누가 나를 위해 정성스럽게 음식을 만들어준다는 건 그렇게 배가 차오르기 이전에 마음부터 차오르는 행복한 일이다.  


대접받는 사람의 책무는 일단 맛있게 먹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더. 대접해 주는 사람의 입에도 음식이 잘 들어가고 있는지, 그 사람의 등은 따습고 배는 든든한지 잘 관찰하는 일이 바로 대접받는 사람의 책무가 아닐까. 그 마음을 잘 기억했다가 적절히 돌려주는 것 역시 받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일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홍익인간이 되어 빨간 볼로 웃어주는 삶, 좋지 않은가.

나는 오래오래 그와 빨간 얼굴을 하고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의 음식 세계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동영상 하나를 놓아두고 갑니다. 매력덩어리 여동생과 함께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테라스 식당>을 찾아보시면 그가 근사한 목소리로 헛소리를 하는 많은 요리 영상들을 보실 수 있어요.

https://youtu.be/_K3xztsCFmQ


그리고 아래는 엄마와 병어조림에 관한 제 이전 글입니다. 혹시 읽고 싶으실까봐. 저는 다정하니까요.

https://brunch.co.kr/@jinmin11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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