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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Aug 31. 2021

고독한 미식가

음식과 사람들 (1) - 혼밥과 콜라

그와는 대학원 신입생 모임에서 제대로 인사를 했다. 학부 때 서로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지만 반경이 겹치지 않게 서로 술을 (처) 마시며 지냈다. 그렇게 딱히 피하려는 의도는 없이 서로를 최영 장군이 황금 보듯 하다 졸업했고, 대학원을 가지 않았다면 평생 모르고 지낼 뻔했다. 그랬으면 내 인생이 지금보다 한 10% 정도 재미없었을 거다. 지금의 나는 스스럼없이 그를 인생 절친이라 여긴다.


대학원에서는 정치사상 전공을 하는 사람들끼리 매일 밥 먹고 술 먹고 책 먹으며 패밀리처럼 지냈다. 휘는 그중에서도 특히 죽이 잘 맞아 격 없이 지낸 친구다. 나이는 그가 한 살 많고 학번은 내가 하나 위인데, 평소에는 날 하찮게 보다가 불리할 땐 굉장히 공손한 말투로 선배님이라고 부른다.


같은 공부를 했고, 나이가 거의 같고, 삶의 태도 같은 게 꽤 비슷하다는 점이 우리를 끈끈하게 한 것 같다. 뇌에 들어찬 게 비슷한 사람끼리 대화하는 즐거움에다, 웃음 코드가 잘 맞는 사람과 깔깔대는 재미, 거기다 오랜 시간 알고 지냈기에 서로의 선을 잘 아는 이해심까지, 삼종세트가 잘 갖춰진 사람과의 대화가 즐겁지 않을 리 없다. 내가 잘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고 들려주는 능력도 탁월해서 나는 그에게서 항상 많이 배운다. 가족을 제외하고는 내 인생의 가장 좋은 의논 상대다. 현명하고 다정하고 편견 없다. 눈치도 빠르다. 정말 마음만 먹으면 아무 얘기나 편하게 꺼낼 수 있는 사이다. 엔간해선 서로 마음을 잘 안 먹는 게 문제긴 하지만.   


덕분에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나는 망나니 같은 성격에도 불구하고 수줍음이 있는 편이라 먼저 말을 거는 편도, 말을 잘 놓는 편도 아니다. 필요할 때는 어렵지 않게 외향적으로 굴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내향형인 '사교적 내향형' 인간이다. 아는 선후배보다 모르는 선후배가 많은 게 원래 당연한 일이지만 내 경우에는 그 불균형이 굉장히 심했다. 반면에 휘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 과에서 거의 걸어 다니는 인명사전 같은 존재다. 누구나 그를 편안하게 여기기 때문일 거다. 휘가 “이 분을 알고 지내면 좋을 것 같아.”하고 소개해 준 사람들은 예외 없이 참 좋았다.


덕분에 맛있는 음식들도 많이 만났다. “여기에 가서 꼭 이걸 먹어야 해.”하고 소개해 준 음식들은 예외 없이 정말 맛있었다. 휘만큼 음식에 진심인 사람도 드물지 싶다. 그는 먹는 얘기를 할 때 가장 빛이 난다. 좋아하는 음식을 설명할 때의 장휘는 눈이 반짝이고 볼이 발그레하며 귀여운 제스처까지, 뭐랄까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가 이렇게 사랑스러웠을까 싶다. 그의 인스타그램은 음식의, 음식에 의한, 음식을 위한 공간이다. 평소의 둥글둥글한 모습과는 달리 음식에 있어서 만큼은 식당 사장님들 눈물이 쏙 빠질 만큼 냉정하고 단호한 평가를 내리곤 한다. 휘슐랭 가이드를 꼭 펴냈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많은 식당, 많은 메뉴들을 섭렵하며 돌아다닌다.

배고플 때 보면 혈압 오르는 그의 인스타그램. 지금도 알 수 없는 화가 치미는 중.

맛에 대한 단호함은 고기를 구울 때 이미 알아봤다. 같이 공부할 시절에는 삼겹살에 소주를 마실 경우가 많았는데, 나를 포함하여 멋모르는 인간들이 촐싹대며 고기를 깔짝깔짝 뒤집으면 눈으로 호되게 욕하곤 했다. 맛있는 고기를 그렇게 쓸데없이 자꾸 뒤집어서 맛없게 굽는 자는 예외 없이 장휘에게 고기 굽는 집게를 빼앗기고 참교육을 받았다. 무릇 삼겹살이란 불판에 어여쁘게 얹어두고 기다렸다가 가장자리가 어느 정도 익으면서 육즙이 올라오고 안쪽은 살짝 연한 분홍빛을 띨 때, 바로 그 순간에 한 번만 뒤집어야 한다던 그의 엄한 목소리는 아직도 집에서 고기를 구울 때마다 내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된다.    


그와 만나기로  모임에서 그가 늦으면 그가  때까지 아무도 감히 메뉴 고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신성을 침범하는 느낌이어서 왠지 그렇게 처먹다간 천벌이라도 받을  같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지인들 사이에서, 미식의 분야에서 범접할  없는 권위를 지닌 인물이다. 뭔가  끗이 있는 그만의 레시피도 제법 된다.  요리 노트에는 ‘장휘 제육볶음(장휘가 제육이라는  아니다)'이라든가 ‘장휘가 알려준  스테이크같은 제목의 레시피들이   들어 있다. 참고로 그의 제육볶음은 굉장히 맛있다. 프라이팬에 삼겹살을 올려 바짝 굽고, 고기에서 기름이 나오면 잘게  파를 넣어 파기름을  뒤에 설탕을  숟갈 넣어 눌어붙게 만드는  포인트다. 거기에   컵을 넣고 불을 살짝 줄인 뒤에 양념장과 각종 채소를 넣어 볶으면, 채소들이 물을 흡수하고 매콤 달콤한 양념이 고기와도  어우러져서 그야말로 밥도둑이 된다.


‘고독한 미식가’라는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일본 드라마가 있었다. 맛있는 걸 골라서 너무 맛있게 먹는 아저씨의 모습을 보여주는 드라마. 그걸 보면서 미식은 역시 고독한 혼밥과 어울리는 걸까, 생각했었다. 우리의 미식가 장휘도 혼밥을 많이 먹는 편이다. 친구도 지인도 제자들도 많아 늘 곁이 북적북적하지만 오래 보아온 사람들은 안다. 이 자식이 외롭구나. 요즘의 그는 생기를 많이 잃은 느낌이다. 속 얘기를 더럽게 안 하는 편인데도 최근엔 외롭다는 얘길 곧잘 한다. 사람은 원래 외로운 거니까, 그게 기본이니까, 외로운 줄 몰랐는데 혼자 사니까 외롭단다.


혼밥은 외로움과 동의어라는 그런 촌스럽고 옳지도 않은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혼밥은 누구에게는 꿈이기도 하다. 젖먹이 아이들이 내 신체의 일부분인 것처럼 들러붙어 있을 때의 내가 그랬다. 밥을 코로 먹고 반찬을 눈으로 먹어야 하던 시절, 혼자서 우아하게 맛을 음미하며 먹는 식사를 나는 얼마나 갈망했던가. 사람은 밥을 혼자서 먹을 수도, 둘이서 먹을 수도, 집단으로 먹을 수도 있는 거다. 밥을 먹는 인원으로 뭔가를 판단하는 쓸데없는 일로 누군가를 소화불량에 걸리게 하는 건 참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혼밥도 혼술도 무척 좋아한다. 아이들의 조그맣고 귀여운 입에 밥이 들어가는 모습(...과 밥알이 부엌 바닥에 벚꽃처럼 흩날리는 모습...)을 보며 웃는 얼굴로 함께 먹는 밥도 좋지만, 모두 나가고 아무도 없는 고요한 집에서 보글보글 라면을 끓여놓고 좋아하는 웹툰을 보면서 느긋하게 후루룹거리는 시간은 그야말로 꿀 같은 시간이다. 피톤치드 부럽지 않은 라면의 향기. 나는 그 시간을 학회가 끝난 후 겁나 불편한 낯선 이들과의 파인 다이닝과 절대 바꾸고 싶지 않다. 집에서의 혼밥 혼술은 레벨이 너무 낮다고 말씀하신다면 나는 중국집에 혼자 들어가 시끌벅적한 일행 바로 옆테이블에서 자장 소스 안에 든 완두콩과 양파를 하나하나 소중히 여기며 입안 가득 면을 밀어 넣는 것도 잘하고, 목마르면 아무 데나 들어가 맥주 한 잔 시키는 것도 좋아한다. 여럿이 먹을 때는 음식에다 웃음이며 분위기를 소금 후추 치듯 쳐서 먹지만, 혼자 먹을 때는 오롯이 음식의 맛을 탐구하듯 느낄 수 있어 좋다.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눈길이 있다면, 왜요 제가 마음에 드세요의 눈길로 받으면 꽤 높은 승률로 승리를 거둘 수 있다.     


혼밥도 혼술도 좋다. 하지만 그냥, 나는 그가 좋은 사람과 자주 맛있는 음식을 함께 만들고 나누어 먹었으면 좋겠다. 인간이란 원래 외로운 존재지만, 조금 덜 외로웠으면 좋겠고 외로워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자유롭게 식당들을 도장깨기 하듯 하고 돌아다니는 삶이 부러울 때도 있지만, 또 밥에 고추장만 비벼도 사랑하는 사람과 먹는 밥이 맛있지.


미국의 작가이자 시인인 프랭크 오하라(Frank O’Hara)는 “당신과 함께 콜라를 마시는 것이 산세바스티안, 이룬, 엔다예, 비아리츠, 바욘에 가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다”고 말했다. (여기서의 당신은 캐나다 출신의 발레 댄서이자 연구자였던 빈센트 워런(Vincent Warren)을 말한다.) 나는 휘에게도 그런 아름다운 장소들을 제치고 같이 콜라를 마시는 게 훨씬 재밌을 그런 사람들이 더 많이 나타나면 좋겠다.

여러분, 사랑 고백은 이렇게 하는 겁니다

2000년 전에 에피쿠로스가 그랬다. 우정이 행복의 가장 큰 원천 중 하나라고. 우정과 관련된 고통은 우정이 주는 행복으로 상쇄되고도 남는다고. 최근에는 글항아리의 이은혜 편집장님이 쓰신 "마지막까지 남는 관계"라는 글을 읽었다. 인생이 진창으로 떨어질 때 보통 마지막까지 자신을 신뢰해줄 사람 한두 명을 찾아가게 되는데, 저자와 편집자로 만난 사이인 K 선생이라는 분을 떠올리셨다고 한다.


인간관계는 시간의 압력을 버텨내지 못하기도 하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부단히 인연이 쌓여 단단하고 깊어지기도 한다. 우리 개인의 삶에는 그런 관계가 하나둘씩 있을 것이다. 당신에게는 잠시나마 당신을 구해주고 뒷사람들에게 당신과의 기억을 전해줄 이가 있는가.


내게도 있다. 무슨 짓을 하셔도 안 미워합니다, 라고 말해주는 친구. 나의 대나무숲.

그와 나 둘 중 하나가 진창에 빠지는 일이 있더라도 그 진창이 우리를 흔들지 못할 것임을 나는 믿는다. 사람 사이의 관계를 함부로 단언하는 건 그다지 현명한 일은 못 되지만 그래도 그가 지금껏 준 시간과 말과 마음들이 있기에, 그것들이 너무도 충분히 쌓여있기에 그가 행여 어떤 실수나 잘못을 저질러도 (실수와 잘못, 이 둘은 구분해야 한다고 배웠다) 나는 그에게 변함없이 미소 지을 것이고 그 역시 아마 나에게 그래 줄 거라고 믿는다.


잠시 한국에 왔다. 휘랑 맛있는 걸 먹을 예정이다. 기쁘다.





제가 오래 전에 쓴 장휘 헌정 동화. 게으름과 먹부림이 행복한 나라의 임금님으로 등장시켰습니다.

 

https://brunch.co.kr/@jinmin1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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