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진민 Apr 05. 2022

[서평]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나는 그녀가 쓰는 문장들을 사랑한다.

고백하건대 그녀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때 약간 부정맥이 왔다. 꾸밈도 많고 구구절절한 데다 시답잖은 뻘소리로 가득한 나의 문장과는 달리 그녀의 문장들은 단정하고 적절했고 아름다웠다.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대체 누구지. 궁금증이 일만큼 그의 문장들이 좋았다.


언유진이의무궁(言有盡而意無窮).

말은 다했으되 뜻은 무한히 뻗는다는 뜻의 이 문장을 좋아한다. 종을 치면 소리가 퍼져나가면서 긴 파장을 내고 여운이 오래 남듯, 문장들의 여운이 길고 소리가 예뻤다. 글을 몇 편 읽고 알았다. 나와 같은 ‘내향형의 쓰는 인간’ 종족이라는 것을. 감정의 진폭이 크지 않고 만사에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만트라를 외워대는 무덤덤한 나와는 달리 내면의 파고가 깊고 감정이 끈끈한 분인 듯한데, 그 깊고 끈끈함에서 건져 올린 문장들이 사람을 깊이 찌르고 끈끈하게 달라붙는다.


“슬픔이 언어가 되면 슬픔은 나를 삼키지 못한다. 그 대신 내가 슬픔을 ‘본다.’ 쓰기 전에 슬픔은 나 자신이었지만 쓰고 난 후에는 내게서 분리된다. 손으로 공을 굴리듯, 그것은 내가 가지고 놀 수 있는 무엇이 된다.”

 

나는 이 문장의 뜻을 정확히 알고 있다. 머릿속이 어지럽고 마음이 울렁거릴 때, 손가락을 움직여 몇 문장 달각거린다. 희한하게도 그 순간 바로 나아진다. 말을 고르고 배열해 문장을 만들어 내고 있으면 나는 내 감정을 강아지처럼 앞에 두고 살살 쓰다듬을 수 있다. 내 안의 어떤 것을 언어화하는 순간에 내 감정과의 거리를 확보하기 때문이다.

작가님이 사인해 주신 페이지를 찍고 싶었지만 부끄러워할 것이 예상되어 관뒀다. 종족은 서로의 마음속을 아는 법이다.


이 책은 '글 쓰는 방법'에 관한 책이 아니라 '글 쓰는 삶'에 대한 책이다. 책 속의 표현을 빌면 "간장게장 대신 글쓰기를 선택한 일상에 대해서" 쓴 책이라는 점도, 제목에서 자칫 불러일으킬 수 있는 오해와는 달리 쓰는 일이 나의 전부가 되는 간절함을 원하지는 않는다는 점도, 즉 "글쓰기뿐 아니라 그 무엇도 내게 그런 거창한 의미가 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라고 밝힌 점도, 너무나 나의 주파수와 평화롭게 들어맞는다.


글쓰기의 노하우에 대한 책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원초적으로 중요한 글쓰기의 자세에 관한 사유라면 차고 넘치게 들어있다. 자신의 서사를 고백하려는 사람이 자신을 어디까지 드러낼 수 있는지, 자아가 너무 비대해지지 않기 위해 글 쓰는 자아의 체중은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언어를 가진 먹물들의 의무는 무엇인지, 말과 글의 한계는 무엇인지. 글과 책 속에서만 사는 삶이 가지는 구멍도 솔직히 드러낸다. 이를테면 다섯 수레의 책'만' 읽은 이와는 아주 간단한 의사소통이 안 될 수 있다는 사실 같은 것.


거리가 필요해서, 고통에 지지 않으려고, 나쁜 어른이 되지 않기 위해, 작게 실패하기 위해. 그리고 더 이로운 연결을 꿈꾸며, 고독의 즐거움을 알기 위해, 잊지 않으려고 쓴다. 책의 목차이자, 이윤주 작가님이 글을 쓰는 이유들이다. 그녀에게 글이란 하지 못한 말들이고, 아파서 먹는 약이고, 고인(故人) 앞에 조용히 놓아두는 꽃이고, 관계의 오솔길이고, 기억의 집이다. 무엇보다 삶을 계속 살아가게 만드는 작고 편안한 위로다.


원래 누군가에게 약을 먹이려면 약 먹는 방법보다 약의 효능에 대해 설명하는 편이 효과적이다. 게다가 약을 복용하는 방법은 대체로 정해진 편이지만, 글을 쓰는 방법은 누가 알려줄 수 없다. 그게 알려줘서 될 일이면 세상에는 글쓰기 고액 과외를 받아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사람들이 넘쳐났게. 작법서들은 하나의 좋은 예일뿐 자신의 문장과 문체, 자신만의 글쓰기 방법은 이런저런 시도를 하며 스스로 찾아가야 한다. 그 와중에 글 쓰는 삶이 이렇게 좋더라, 하는 것이 마음속에 촛불처럼 들어있다면 우리는 황량하고 거친 글쓰기 월드에서 길을 잃어도 다시 파릇한 싹이 꼬물꼬물 돋는 오솔길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촛불이다.


에헤헤주의자인 내게 조금 낯설었던 부분은 글이란 꼭 이렇게까지 고뇌하며 아프게 써야 하는가 하는 거였다. 나에게 글은 대체로 놀이이자 유희이기 때문이다. 글쓰기가 고통보다 즐거움인 건 내가 오랜 기간 써온 글이 논문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 글들이 조금은 다른 차원에서 나에게 고통이고 무거움이고 회색이었기에, 지금 쓰는 글들은 상대적으로 즐거움이고 가벼움이고 알록달록 무지개다. 즐거움과 무지개까지는 좋지만 너무 가볍지는 않아야겠구나, 내가 글을 쓸 때의 마음가짐을 많이 돌아보게 되었다. 작가님은 ‘여기서 스몰 토크 한 줄만 집어넣으면 이 글은 적어도 미움받지 않겠구나’ 하고 직감하지만 그 한 줄을 기어이 뺀다고 한다. 반면에 내 글은 초반에 밝혔듯 스몰 토크의 왕국이다. 실은 최대한 미움받지 않으며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는 걸 모토로 한다. 글은 일단 재미있어야 읽게 되고, 말은 거슬리지 않아야 끝까지 들어볼 마음이 생긴다고 믿기에. 그래서 변명이 구질구질 붙고 잡소리가 많다. 내가 처음에 그녀의 문장에 반했던 건 이렇게 “그 한 줄을 기어이 빼는” 태도 때문인 것 같다. 문장이 단정하고 적절하고 아름답다는 것은 문장력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 소통에 대한 가치관의 문제였구나 싶다.  


책을 읽다 보면 글쓰기에 관한 모든 주름 사이의 먼지들이 보이는 것 같고 머릿속은 더 뒤엉키는 것 같기도 한데 그 엉키는 느낌이 딱히 나쁘지 않다. ‘모호해지는 것’과 '혼란에 빠지는 것'은 다르니까.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받은 인간들이 혼란을 느꼈듯, 그러나 결국 혼란을 야기한 그 문장을 시작으로 자신의 길을 또렷하게 찾아갈 수 있었듯이. 이 책은 글 쓰는 인간들, 혹은 글쓰기를 어떤 이유로 놓은 인간들을 공감의 혼란에 첨벙 빠뜨린다. 장담컨대 스스로 기어 나와서 자신만의 이유를 뚝뚝 떨어뜨리며 글을 쓰러 갈 것이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책의 작가님은 나의 두 번째 책, <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 이용법>을 같이 만든 편집자님이시다. 하지만 나는 오래 그를 작가로 알고 지냈고 그녀의 글을 귀애해왔다. (여기서 밝히는데 브런치 독자로 처음 만났다.) 어느 쪽이 본캐고 어느 쪽이 부캐인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저는 사실 모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데, 작가님의 이 원고는 혹시 출판 계약이 된 건가요?”라고 물어왔을 때, 그동안 슬쩍 마음에 두어왔던 사람에게 고백받는 느낌이었다. 아니 뭐라고요. 저랑 사귀자고요. (응, 아니야.)  


그녀의 표현대로 “내가 직접 운용할 수 있는 틈과 간격” 때문에 나는 말보다는 글이 편한 사람이다. 누군가 전화를 걸면 그게 누가 됐든 긴장부터 하는 중증의 지병이 있다. 그래서 중국집에 전화를 걸어야 했던 이윤주 어린이의 에피소드를 읽으며 마치 환우를 만난 느낌을 받았다. (이 어린이의 병세가 조금 더 심각하다.) 나는 강의를 해야 하는 사람으로 오래 훈련받았기에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어려워하지는 않지만, 아직도 공적 발화가 아닌 사적 대화는 조금 어려워하는 편이다. 기본적으로는 인간이 복화술로 대화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용하다고 해서 하고 싶은 말이 없거나 대화를 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니다.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교감과 소통에 대한 갈망이 덜한 게 아니다. 다만 빨리, 한꺼번에 하지 못할 뿐이다. 머뭇거리고 주춤거리기 좋은 틈과 간격 속에서 내성적인 사람들은 더 깊고 단단한 통로를 낸다.”라는 말에 나는 삼삼칠 박수를 쳤다. 그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이, 조용한 사람들에게는 깊고 고요한 글의 샘이 된다.


내향형의 쓰는 인간들은 글 속에서 자유롭게 다중이가 되곤 하는데, 나 같은 경우에는 개그본능을 숨기지 못하고 문장들 속에서 날뛰는 경향이 있다. 나를 글로만 보다가 직접 만난 사람들은 내가 실제로 굉장히 작고 하찮은 몸에 작은 목소리로 조용조용 말한다며 신기해한다. (대체로 걸걸한 목소리에 기골이 장대할 줄 알았다고들 한다.) 이윤주 작가님도 글 속에서는 헐거운 인간, 엄청난 개구쟁이가 되는 점이 진실로 사랑스럽다. (냄비밥 에피소드, 그리고 가끔 지느러미를 펼치는 심해어가 되는 에피소드를 읽고서도 이윤주라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나는 내 책 안에서도 까불지만 작가님은 주로 소셜 미디어에서 나를 실성한 사람처럼 웃게 하신다. 통제가 안 될 만큼 화끈한 데다 개그력은 하늘을 찔러 성층권에 닿을 것 같은데, 직접 만나면 나처럼 길을 못 찾아 울며 헤매고, 내 귀의 볼륨을 다 키워야 말소리가 잘 들리고, 먹이도 많이 못 먹고, 인류가 애써 소중히 보호해 줘야 할 것 같은 외관을 지녔다. (이 작고 하얀 책은 주인을 많이 닮았다.) 하지만 나보다 훨씬 커다란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이라 나는 곁에서 그녀를 보는 일이 즐겁다.


글 쓰는 삶에 대한 얘기다 보니, 삶을 예민한 감각으로 포착할 수 있는 사람만이 건져낼 수 있는 주옥같은 말들이 자주 눈에 보인다. (‘주옥’이란 단어는 꼭 적절한 스피드로 천천히 읽어야 한다.) 가끔은 쓰는 행위와의 연결을 굳이 만들어두지 않은, 정말 그냥 사는 얘기가 들어있기도 하다. 때로는 현자 같기도, 철학자 같기도 한 말들이 풍성한 것은 읽는 기쁨을 배가시킨다. 반짝이는 것에 홀린 아이처럼 행간을 폴짝거리며 ‘이것도 예쁘다, 아아 이것도 너무 좋은데,’ 하며 사금 같은 구절과 구슬 같은 문장들을 주웠음을 고백한다. 계속 쓰다보니 서평이 아니라 연애편지가 되는 것 같아 서둘러 마무리를 해야겠다.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로 태어난 것, 텍스트를 읽는 데 아직까지 큰 불편함이 없는 것, 노트북을 유지하고 책을 살 돈이 있는 것, 대상을 인지하고 의식할 수 있는 것. 그 모든 것이 맞아떨어져 누릴 수 있는 글쓰기라는 행운 속에서, 행운에 대해 조금 길게 떠들면, 혹시 행운을 곁에 두고도 눈치채지 못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누구나 글을 쓸 필요는 없지만 글을 쓰면 참 좋을 사람들이 있다."


글을 썼으면 좋겠다 싶은 지인들에게 선물했더니 "이 책을 읽고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라는 답변들이 돌아왔다. 한 지인은 이 책을 괴나리봇짐에 넣어 오일장을 돌며 팔고 싶다고도 했다.


책의 마지막 부분이 특히 좋았다.

글이든 말이든 그것이 '삶'을 넘을 수는 없다고 말하는 부분.

내가 철학 강의를 하면서 종종 드리는 말씀이 있다. 인간 이성에는 한계가 있고 철학이 늘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한다는 말. 비슷하게, 글쓰기가 늘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다. 삶의 모든 순간이 글로 옮겨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글도 말도 존재하지 못하고 그저 마음만 있을 뿐인 순간이 있으므로. 그 순간까지 소중하게 담아낸 이 '글 쓰는 삶'에 대한 조그만 책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작고 슬프고 따뜻한 병아리 같은 책이 나는 참 좋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평] 천 개의 파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