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 들어가기 전에
: SF 자체가 Science Fiction, 즉 (공상) 과학 소설이라는 뜻이니까 'SF 소설'이라는 말은 과학 소설 소설, 즉 역전앞, 운명의 데스티니 같은 말이긴 합니다. 그런데 SF 소설이란 말이 워낙 일반화되어있고 SF라고만 쓰려니 샌프란시스코 같기고 하고, 뭐 아무튼 그래서 SF 소설이라는 단어를 쓰고 말았습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조용하고 따뜻하고 우아한 SF 소설.
소설 속 그 누구도 시끄럽게 떠들고 소리치는 인간이 없는데, 굉장히 묵직하고 커다란 목소리를 듣는 느낌이다.
(생각해보니 1년 사귄 남자에게 “지구의 삶에서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애새끼 주제에 어디서 감히 우주의 생명을 논하느냐”라고 악을 쓰며 쌀 포대를 쏟아붓고 나온 복희가 있긴 하다.)
SF 소설들은 상상을 기반으로 환상을 보여준다. 너무 다른 세계라서 아예 현실과의 끈을 끊은 채 몰입하는 경우도 있고, 현실과의 차이 때문에 거부감에 가까운 불편함을 품은 채 우리 세계를 반추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 소설은 전자도 후자도 아니다. 익숙한 세계에 섬세하게 SF적 요소를 넣었다. 있음 직한 미래라서 다른 결의 몰입을 부르고, 따뜻한 불편함을 적절히 느끼게 한다. 소설 속 세계는 환상이라기보다 환상적이다.
SF 장르가 대체로 생각지 못한 미래의 모습으로 인간을 압도하는 구석이 있다면, 이 소설은 그 안에서 압도되어 가는 작고 힘없는 존재들을 찾아가 파란빛을 비춘다. 금속성의 차가움이 느껴지는 SF 장르가 이렇게 따뜻하고 다정할 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 좋았다. SF 속에도 물론 사랑이 있고 다정함이 있지만, <천 개의 파랑>처럼 상처받고 배제된 존재들이 함께 웃으면서 나가는 잔잔한 연대의 모습을 보는 건 드물었던 것 같다. 물론 나의 독서량이 너구리 라면 속 다시마 수준이라는 점을 고백해 둔다.
말이 여섯 살 수준의 지능을 가진 동물이라는 것을 새롭게 알았다. 여섯 살이면 사람의 표정을 읽고 이야기를 상상하며 전략을 짜서 카드게임을 할 수 있는 나이다. 경주마 투데이의 자리에 이제 다섯 살인 내 아이를 대입하며 읽었더니 마음이 얼얼한 구석이 너무나 많았다. 나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이 싫다. 이 소설은 그놈의 '만물의 영장'들의 행태를 조용히 고발하면서도, 스스로 쌓아 올린 기술과 돈의 권능에 내몰리는 인간의 나약함도 놓치지 않고 그려낸다. 효율성 없는 것은 버리는 인간들. 그런 사고방식으로는 자신들도 결국은 버려지게 된다. 당장 편의점 아르바이트 자리부터, 지각도 결근도 불평도 없는 로봇이 대체하게 되듯이.
작가는 그런 '만물의 영장'류의 위계적 사고방식 옆에, 다른 종 사이의 수평적 교감과 따뜻한 우정을 놓아둔다. 파트너인 경주마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목숨(이라고 쓰고 싶다)을 두 번이나 내던지는 기수(騎手) 로봇이 있고, 그런 로봇이 원하는 대로 하늘을 볼 수 있게 해 주고 마방에서 벗어나 잘 '살아'보라고 말해주는 관리인이 있다. 나노봇 내시경 기술을 동물에게도 쓸 수 있도록 거듭 청원하면서 그 좋은 기술 좀 동물들과 나눠 쓰면 안 되냐고 화를 내는 수의사가 있고, 경주마 투데이는 그 수의사가 자신을 아끼고 아프지 않게 하는 인간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보면 반갑게 인사를 한다. 다리가 아픈 은혜는 비슷한 처지의 투데이에게 공감하며 애정을 쏟는다. 은혜 엄마에게 “오늘은 어딘가 달라 보이네요 … 인간은 아프면 몸보다 마음이 더 힘들다고 들었어요.”라는 말로, 딸들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태를 알아보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건 로봇이다. 말과 로봇, 그리고 인간 사이의 공감과 연대는 그것이 미약해 보일지라도 자본과 기술이 쌓아놓은 시스템에 의문을 던지고 균열을 낸다.
로봇인 휴머노이드 콜리가 하는 말들이 유난히 마음속 깊이 들어온다. 동물들의 눈으로 인간 세상을 말하는 우화의 느낌과 비슷하지만, 그것과는 결이 약간 다른 설렘과 아픔 같은 게 있다. 손가락 사이를 타고 흐르는 말의 갈기를 만져보고 싶어서 고삐를 놓고, 하늘을 흐르는 구름을 만져보고 싶어하는 로봇. 하늘이 그렇게 빛나는데 어떻게 바라보지 않을 수 있나요, 그리움이 어떤 건지 설명을 부탁해도 될까요, 이렇게 물어보면서 정보의 획득을 가장한 ‘대화’를 가만히 엮어가는 로봇. 흐르는 것에 관심을 갖는 이 특이한 로봇 덕분에, 흐르게 하는 법을 잊었던 인간들이 막혔던 것을 조금씩 트고 함께 흘러간다. 인간은 땅보다 하늘을 바라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건 이성이 아니라 오히려 감성이라는 것, 그리고 인간 사이에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공감이라는 것을, 아이러니하게도 이 로봇을 통해 확인한다.
왜 말을 타고 달리는 경기를 열게 됐나요?
재미있으니까.
누가요? 말이요?
아니, 인간이.
인간이 재미있는데 왜 말이 달리나요? 그럼 인간이 달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마음대로 해. 상관없어.
제게 제일 어려운 부탁을 하시네요.
“당신도 저를 그냥 데리고 온 건가요? 이유 없이요?”
휴머노이드는 학습이 빨라서 좋았다.
"응, 그냥 데리고 왔어."
"고마워요. 저도 당신이 그냥 좋아요."
은혜를 둘러싼 이야기들을 보면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라든가 <사이보그가 되다> 같은 책들이 소설화되어 스며들어 있는 느낌도 든다. 몸이 불편한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가 형제자매로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생각할 거리들을 준다.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로봇과 경주마를 보면서 인간이 가진 자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뜨겁게 질척거리는 느낌 없이 조곤조곤 할 말 다 하는 소설이다.
소설의 뛰어난 효용 중 하나는 등장인물의 자리에 나를 대입해서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보는 일인데, 은혜와 연재의 자리에 서 보면서 그동안 머리로만 알던 것들을 조금은 가슴으로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인간이라는 단어는 사람 인(人)에 사이 간(間) 자를 쓰기에 복수형을 기본으로 하는 존재고, '사이'를 품고 있는 개념이다. 즉 인간들은 복수형으로 태어나 그들 사이의 간격 때문에 평생 고민하는 삶을 산다. 인간 존재를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인 철학 안에는 그러므로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들, 타인과 더불어 살아보고자 하는 시도들이 가득하다. 니체와 레비나스는 나와 타자 사이의 그 어쩔 수 없는 긴장을 논했고, 맹자는 슬픔과 분노에 차 있는 타인에 대한 측은지심을 말했다. 롤즈는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 이성적으로 뒤집어써 보는 '무지의 베일'을 제안했고, 장자 할아버지는 스턴트맨이 되어 달리는 수레에서 저쪽 수레로 뛰어 볼 것을 권했다. 스턴트맨이 되란 말은 내 속도로 달리는 수레에서 뛰어내려 다른 속도로 달리는 타인의 수레에 목숨을 걸고 뛰어올라, 어지럽더라도 거기에서 균형을 찾아보라는 조언이다. 달리는 말에서 그 말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떨어지는 찰나를 그린 기수 로봇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그러므로 처음부터 나에게 타인을 이해하는 법을 조언하려던 장자의 메시지가 겹쳐져 다가왔다. 그것도 타'인'도 아니고 전혀 다른 종(種) 사이의 이해와 교감.
그런 의미에서, 그냥 초반 엑스트라에 불과한 거리 청소 로봇 스트린의 말이 내겐 엉뚱하게도 이 책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함부로 버린 쓰레기에 길고양이가 다칠 수 있습니다.”
그 세상에는 아직 길고양이가 죽지 않고 살아들 있구나. 그 길고양이를 다치게 하기 싫어하는 마음이 이렇게 로봇의 인사 문구에까지 들어가 있는 세상이구나. 이런 데서 괜한 온기와 희망을 본다.
조곤조곤한 대화들, 독백들이 참 좋았다. 그렇게 괜히 좋았던 말들을 기억하고 싶어서 조금 더 옮겨 본다.
슬프지만 아무것도 못 해 주는 주제에 슬퍼하는 것도 웃긴 것 같아서 그냥 보고 있어요.
삼차원의 우리가 일차원의 말에 상처받지 말자.
신경을 어떻게 안 써?
... 그럼 조금만 써.
기술은 그러기 위해 발전하는 거니까요. 나약한 자를 보조하는 게 아니라, 이미 강한 사람을 더 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인류 발전의 가장 큰 발명이 됐던 바퀴도, 다시 한 번 모양을 바꿀 때가 왔다고 생각해요. 바퀴가 고대 인류를 아주 먼 곳까지 빠르게 데려다줬다면 현 인류에게도 그렇게 해줄 거라고 믿어요.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아요. 저들이 하는 말을 듣지 않아도 돼요. 당신은 당신의 주로가 있으니 그것만 보고 달려요. 자신의 속도에 맞춰서요.
신경 쓰지 마요, 저 소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굳이 들을 필요 없어요. 모든 것을 듣고 살 필요 없어요.
처음에 제목만 보고 초록은 마흔 가지 색이라고 말하던 조니 캐시의 노래 <Forty Shades of Green>이 떠올랐다. 파랑이 크고 작은 물결을 뜻하는 파랑(波浪)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그러므로 수백 가지의 푸른빛으로 물결치는 파도의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했다. 책을 다 읽고 보니 파랑은 물빛이 아니라 하늘빛이다. 하늘빛이자 이 세상의 모든 단어이기도 하다. 작가는 하늘과 세상으로서의 천 개의 파랑을 펼쳐놓았고, 독자인 나는 책을 읽으며 마음속에서 물결치는 크고 작은 파랑(波浪)을 느꼈다.
"천 개의 단어만으로 이루어진 짧은 삶을 살았지만 처음 세상을 바라보며 단어를 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천 개의 단어는 모두 하늘 같은 느낌이었다. 좌절이나 시련, 슬픔, 당신도 알고 있는 모든 단어들이 전부 다 천 개의 파랑이었다."
철학에는 사고 실험이라는 게 있다. 예를 들면 인간들이 왜 모여서 사회를 구성하고 정치 공동체를 만드는지 궁금해서, 그런 것들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가정해 보는 것. 그게 바로 유명한 사고 실험인 ‘자연 상태(state of nature)’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같은 걸 떠올리면 되겠다. 이렇게 그냥 머릿속으로 실험을 해보는 거다. 궁금하니까. <천 개의 파랑>은 훌륭한 문학적 사고 실험이다. 단순히 신기한 미래의 모습만 제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바뀐 세상 속 생명체들이 핵심 기술과 그로 인해 구축된 시스템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를 그리는 것. 이런 SF 장르는 그 자체로 너무나 훌륭한 사고 실험이 된다. 소설 속 복희의 말이 이 소설의 의의를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대변한다. “그래도 우리가 불행한 미래를 상상하기 때문에 불행을 피할 수 있다고 믿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는 상상보다 늘 나을 거예요.”
그렇게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천선란 작가의 조언은 다음과 같다. 천천히 엄지를 들어 올리며 동의한다.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