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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Feb 01. 2022

[서평] 퓰리처 글쓰기 수업

세 번째 책 탈고를 앞두고 숨이 꼴딱 넘어가던 지난해 연말, 브런치로부터 메일이 왔다. [작가님께 새로운 제안이 도착하였습니다!] 브런치 작가님들이라면 공감하시겠지만, 이 제목의 메일은 굉장히 기분 좋은 메일이다. 대체로 출판사에서 오는 메일이니까.


출판사에서 오긴 했는데, 책 리뷰 제안이었다. 사실 제안을 받지 않았다면 제목만 보고 걸렀을 책이다. 제목에 하버드, 서울대, 이런 게 들어가면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타입의 인간으로서 퓰리처도 싫었고 글쓰기 수업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 저는 굉장히 비뚤어진 인간입니다.) 그런데 장강명 작가님이 그냥 추천도 아니고 "강력하게 추천한다"라고 쓰신 걸 보고 호기심이 일었다.


솔직하게 답변했다. 글쓰기라는 게 누가 가르쳐서 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종류의 인간인데, 비슷한 생각을 가진 걸로 알고 있는 장강명 작가님이 추천하신다니 궁금하다고, 읽어 보고 편견을 없애준다면 기쁘게 리뷰하겠다고. 아무래도 부정적인 뉘앙스의 답변이라 거르실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반갑게 응해 주셨고, 책을 받았다.


읽어봤는데 이런. 꽤 재미있었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내 글을 돌아볼 지점도 무척 많았다. 그래서 쓴 서평이다.




[서평] 퓰리처 글쓰기 수업 (잭 하트 저, 정세라 역, 현대지성)


세상에는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고 생각하는 타입의 사람과 얼음이 녹으면 '봄'이 된다고 생각하는 타입의 사람이 있다. 글을 '왜' 써야 하는지부터 고통스럽게 고민하는 사람들과,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로 단도직입적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성급한 일반화를 좀 하자면 '봄'과 '왜'는 문과형, '물'과 '어떻게'는 이과형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은 '이과형 글쓰기 수업'이다. 작가들이 주로 문과형 글쓰기 수업을 출간한다면, 기자 출신인 저자는 이과형 글쓰기 수업을 내놓았다. 작가들의 글쓰기 책에 주로 '인생과 철학'이 담긴다면, 이 책에는 아주 담백하게 '기술'이 담겨있다. 물론 그 기술 안에 담긴 인생과 철학을 보는 것은 섬세한 독자들의 몫이다.


이런 톤의 글쓰기 책은 저자의 직업이 언론인이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기자들은 기본적으로 남들의 이야기를 전해야 하는 것이 직업적 사명이므로, 글쓰기에 있어 수반되는 고통이나 존재의 차원을 파고드는 무거움을 자의로든 타의로든 사뿐히 뛰어넘어 '사실을 잘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는 쓰는 행위 자체의 의미를 고찰하거나 은유와 상징의 세계를 거니는 대신 스토리, 구조, 시점, 캐릭터, 장면 등의 요소별 챕터를 거치면서 사건에 관해 어떤 설계도를 그리고 카메라는 어디다 두고 찍을지, 그야말로 '테크닉'을 세세하게 다룬다.


밝혀두는데 이 책은 논픽션 스토리텔링에 관한 책이다. 그러니까 소설 같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게 아니라 기사처럼 유에서 'for 유'를 창조하는 것에 관한 책. 다시 말해서 실제 있었던 이야기를 기술하는 방법을 다룬다. (소설 쓰기가 아니라 일기 쓰기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하면 쉽겠다. 조금 거칠고 무식하게 말하면, 남의 일기를 대신 써 주는 게 기사다.) 언론인인 저자는 실제 있었던 이야기들을 무수히 기사로 적어온 사람이다. 25년간 잡지사 편집장을 맡았고 퓰리처상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고 한다. 작가와 후배 기자들이 힘들게 에둘러 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처음 이 길로 들어섰을 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책을 쓴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책이 전체적으로 굉장히 친절하다.


스토리텔링이라는 건 밋밋한 팩트의 전달에서 벗어나 평범한 소재에 생명력을 입히고 서사에 생기를 주는 작업이다. 책 속의 예를 들자면 빵 포장지에 단순히 제빵사 이름과 재료가 적혀있는 것과, 이 빵을 만든 제빵사는 교도소에서 15년을 복역한 뒤 사회에 나와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새 삶을 살고 있다는 등 빵에 얽힌 사연이 구구절절 포장지에 적혀있는 것의 차이. 이런 사연이 있는 빵이라면 맛이 궁금해지고 한 입 먹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이게 스토리텔링의 힘이다.


'논픽션'을 뗀 '스토리텔링'이라는 면에서는 픽션을 다루는 사람들이 새겨도 좋을 지침들도 많다. 이를테면 캐릭터에 성격을 입혀 살아 숨쉬게 만들고, 사건 현장에 마치 독자가 들어간 듯 생생한 장면을 연출해 내고, 위기와 절정을 오가며 독자들이 한눈을 팔지 못하도록 이끌면서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기술 같은 것들. 하지만 '은유와 상징의 세계' vs '팩트의 세계', 혹은 '상상의 세계' vs '현실의 세계'라는 세계관 자체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차이라고 생각한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쓰려는 사람, 누군가의 이야기를 전하려는 사람들이 참고하면 가장 효과적일 책이다.


아무래도 미국이 배경이다 보니 예시로 드는 사람이며 작품 등의 이해도가 떨어지는 면은 있다. 예시들이 쫄깃하게 붙는 맛이 떨어진달까. 그러나 오랜 세월 기자로 활약한 저자가 말하는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들은 작가들의 글쓰기 책에서 보이는 당위나 존재의 차원을 파고드는 글쓰기에 관한 사유와는 결이 전혀 다른, 스토리텔링과 관련한 뇌과학 연구 결과라든가 풍부한 관련 지식이 더해져 재미있다. 뇌손상으로 지능지수가 20-30인 아이들도 스토리 내용을 이해한다는 건 심각한 뇌신경 손상에도 타격을 입지 않을 만큼 스토리 이해력이 인간의 근본적 속성임을 암시한다든가, 그 속에 담긴 교훈이 생존에 보탬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스토리에 끌린다든가, 이런 내용들이 더해지니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멋 부리지 않는 이과형의 담백함과 성실함이 이 책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로 단도직입적으로 들어가서, 좋은 예시를 곁들여 노하우를 친절하게 담는다. 스토리텔링 기술을 다루는 대부분의 저서들이 저자 관점에서 설명하는데 이 책은 편집자의 관점을 포함한다는 것도 장점이다. 잘 쓴 논픽션 기사를 조금씩 따라가며 분석하는 부분들은 독자로서 생생하게 이해하기에 정말 좋다. 실제 호평받은 스토리를 가져다 조금씩 끊어가면서 어느 부분에 어느 정보까지를 어떤 식으로 넣어야 좋은지, 규칙을 성실히 따른 좋은 글과 규칙을 무시한 글은 어떻게 다른지, 이런 것들을 직접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이과형의 미덕이 그대로 아쉬운 점으로 꼽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기술과 테크닉에 천착하는 느낌이 들기는 한다. 책 표지 자체에 "팔리는 이야기, 통하는 이야기를 쓰는 법"이라고 솔직한 좌표를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건 단점으로 치환할 문제가 아니라 취향과 목적의 문제라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잘 통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쓰는 기술을 담백하게 쓴 책을 원하는 독자에게라면 정말 필요한 책이 될 테니까. 원래 인간은 다른 쪽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보충하게 되는 것이므로 나 같은 문과형 인간에게는 이런 방식의 책이 오히려 필요한 지점이 있기도 하다.


책의 대 전제는 "문장력보다 스토리가 중요하다"는 것. 그러므로 스토리를 탄탄하게 짜는 법을 연구한다면, 문장력이 다소 부족해도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저자가 전하는 중요한 메시지다. 소재가 평범하다고, 글솜씨가 부족하다고 주저하지 말라는 것이다. 책의 전체적인 인상은 시시콜콜한 디테일보다는 기본에 집중하는데, 그것을 짧고 분명한 문장들로 강조하는 느낌. 맛보기로 '스토리'라는 첫 챕터 안에서 모은 지침들을 소개해 본다.

- 주인공이 누군지 알고 싶다면 자꾸 일을 만드는 사람을 찾아라.

- 흡인력 있는 스토리를 쓰려면 거창한 시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버려라.

- 초고를 쓸 땐 문장을 다듬기보다는 구조에 집중해야 한다.

- 좋은 발단을 쓰는 요령은 독자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만 알려주고 그 이상은 알려주지 않는 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챕터는 '윤리의식'이다. 윤리적으로 취재를 하고 글을 써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진실의 힘에 있다고 말하는 저자는 인터뷰 장소로 적당한 장소나 통화 내용을 녹음할 때의 에티켓까지 소개하면서 그야말로 논픽션 글쓰기의 모든 면을 고려하고 가이드를 주고 있는 셈이다. 9가지로 구성된 논픽션 스토리텔러를 위한 질문 리스트를 읽으면서 새삼 글을 쓴다는 것의 무거움에 대해 생각했다. 기자로서 남의 이야기를 다룰 때의 윤리의식을 다룬 이 챕터를 읽으면서, 작가로서 나와 내 주변의 이야기를 다룰 때의 윤리의식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었다.

책의 원제는 <Storycraft: The Complete Guide to Writing Narrative Nonfiction>. 저자의 다른 저서인 <Wordcraft>라는 책과 짝을 이루는 구성이다. 스토리 크래프트라는 멋진 원제가 <퓰리처 글쓰기 수업>이라는 제목을 달아야 하는 건 한국 사회의 한계인 걸까 싶다.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논픽션 스토리텔링은 출판사의 말대로 사회, 범죄, 종교, 스포츠, 비즈니스 등 어떤 분야에도 적용할 수 있고, 기획안이나 보고서를 작성할 때도, 1인 방송이 많아지는 세상에서 유튜브나 팟캐스트 대본에 적용하기에도 퍽 괜찮아 보인다. 은유 작가님은 "작가, 기자, 학자 등 사람 이야기에 기대어 사는 직업인은 물론, 자전적 글쓰기를 꿈꾸는 이들에게 좋은 반려서가 될 것이다."라며 이 책을 추천했다. 기자 출신인 장강명 작가님은 이 책을 특히 현직 기자들이 꼭 읽어줬으면 좋겠다고 쓰셨다. "매체 환경이 급변하고 있고, 언론사에서는 자기 사명을 실현하고 보람을 찾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점잖게 말씀하셨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정보가 쌓이는 게 아니라 화가 쌓이는 기사들을 볼 때, 적어도 앞서 소개한 "논픽션 스토리텔러를 위한 질문 리스트"를 기자들이 곱씹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글쓰기에 진심인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나의 이야기뿐 아니라 주변의 인물들, 타인의 이야기를 굵직한 서사로 담아내는 시도도 늘어나고 있다. 가족 서사, 직장 생활, 여행기, 학창 시절, 투병 생활 같은 사적 경험들이 쌓이고 유통되면 소중한 공적 경험으로 남아 서로를 이해하는 폭이 넓고 깊어진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이보그가 되다> 같은 책을 읽지 못했다면 몸이 불편하신 분들에 대한 나의 이해도는 형편없었을 것이다. <암과 살아도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일상’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지금과는 사뭇 다르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스토리는 인간 존재를 지배한다. 우리가 상상의 세계에서 보내는 시간을 모두 더하면 꽤 당혹스러운 수치가 나올 것이다. 인생의 대부분은 상상의 세계를 헤매는 것이다."라는 책 속의 문장이 나를 며칠째 따라다니고 있다. 내 주변에 떠돌고 있는 이야기들을 잡아 앉힐 때 종종, 그야말로 '몇 분 삶아야 되는지' 요리책 보듯 펼치게 될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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