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매거진은 제가 리딩리딩 북 큐레이터로 기고하는 서평을 올리는 공간이었는데, 작년 가을 리딩리딩이 변화와 정비의 시간을 가지면서 새로 쓴 서평들이 계속 대기 중입니다. 그래서 리딩리딩이라는 플랫폼과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쓴 서평도 그때그때 올리는 방향으로 매거진 성격을 바꾸기로 했어요. 그 첫 순서로 박혜윤 작가님이 다산초당에서 펴낸 <숲속의 자본주의자>를 읽고 쓴 글을 올립니다.
주변에서 엄청나게 화제가 되었던 책.
"자본주의의 변두리에서 발견한 단순하지만 완전한 삶"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저자는 힘껏 달리면서도 늘 제자리인 것만 같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가족과 함께 시애틀 근교 시골에서 야생 블랙베리를 채취하고 통밀을 직접 갈아 빵을 구우며 도시의 번잡과 불안을 걷어낸 삶을 산다. 은밀한 포기와 체념 대신 삶의 재미를 찾았고, 그렇게 "원하는 만큼만 일하고도 생존할 수 있는지 궁금해서 실험하듯 시작한 생활이 7년째를 맞았다"고 한다. 소로의 <월든>에서 저자가 가장 좋아하는 대목처럼, "삶이 아닌 것들은 전부 깨부수고, 기다란 낫을 넓게 휘둘러 삶이란 것을 바싹 깎아내고, 삶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구석으로 몰아 더 이상 줄어들 수 없을 만큼 작은 핵심만 남도록" 만들어 "삶의 골수를 맛보고 싶었다"고 한다.
주변의 반응은 대체로 자신의 ‘올해의 책’으로 뽑을 만큼 극도로 좋다는 반응과, 저자 부부에게 실은 든든한 물적 토대가 있음을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다소 실망하는 반응으로 양분되는 것 같았다.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비밀도 아닌 사실, 저자의 시부가 고 김대중 주필이다. 때문에 “있는 사람들이 가난을 훔쳤다”는 다소 폭력적인 표현을 보기도 했다. (아니, 그런데 있는 사람은 검소하게 살면 안 되나요.)
실은 읽으면서 초반에 물음표가 제법 생겼고 왠지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이토록 평화로울 수 있지, 하는 의문 반 감탄 반의 마음. 뭔가 중요한 걸 계속 외면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라고만 막연히 생각했는데 그것보다는 패를 다 보여주지 않고 프레임 아웃시켜 둔 건가 하는, 다소는 허탈한 마음이 들었음을 솔직히 밝힌다. 일부러 안 보여준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타인의 사정을 내가 알 순 없으니 진짜 가진 게 많지 않을 수도. 부정적인 반응들이 이해가 가기는 했다. 저자의 모토인 “아무렇게나, 언제나 그만둬도 된다는 마음”을 만들어주는 것에는 여러 지분이 있겠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사실 넉넉할 것으로 추정되는 배경이라는 게 이 모든 걸 지탱해 주는 거라는 생각이 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읽으면서 물음표가 생겼다는 건 이를테면 자본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방식 같은 것. 물론 "자본주의의 엄청난 생산성 덕분에 인간은 이전 시대처럼 굶지 않고 살기 위해 전력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든지, “삶을 충만하게 하는 일만으로 채워진 일상을 살 수 있게 해 준 것은 인류 역사상 자본주의밖에 없었다”라고 쓴 이유를 이해한다. 하지만 그 자본주의라는 것이, 저자의 말대로 다수를 풍요롭게도 하지만 한편으론 굶지 않고 살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만 하는 인간들을 여전히 끊임없이 생산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영민한 저자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책을 읽고 생각해보건대 저자는 자본주의에 기대 살고 있지만 실제로 추구하는 삶은 자유주의에 가깝다. 자본주의적 시스템 안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고 있는 것이지 삶의 모토 그 자체가 자본주의는 아니라는 것. 자본주의자라는 단어에, 그리고 자본주의를 서술하는 방식에 의문이 조금씩 든 건 그 때문이다. 우리가 ‘-주의자’라고 했을 때는 거기에 소극적으로 기대어 사는 행위를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떤 이념의 본질을 삶의 중심에 두고 그것을 자의식적으로 강하게 추구하는 사람을 말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책 제목도, 제목 자체가 가지는 폭발력은 인정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옳지 않은 제목이다. 인간은 각종 차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진심으로 믿고 행동하는 부류들이 차별주의자들이다. 그러므로 시적 허용 같은 느낌으로 이해하면 좋을, 그런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서문에도 “이런 자유를 누리는 일 역시 자본주의 하에서 가능하다는 것을.”이라는 표현이 있듯, 이 책 안에서 저자의 지향점은 ‘자유’에 있고, 자본주의 하에서 그 자유가 가능하다는 구조다. “나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자본주의는 내 멋대로 살아가기에 가장 좋은 제도다”라는 건 자본주의가 소중하다는 게 아니라 다른 소중한 것이 있다는 말이니까. 추측컨대 저자가 꾸리는 검박한 삶과 ‘자본주의자’의 조합이라는 것이 강렬하기에 아마 제목을 그렇게 지은 것 같다. 책의 제목이란 몹시 중요한 것이므로. 그러므로 또다시 시적 허용이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근사하고 매력적인 제목이다.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책의 의미는 충분히 깊다. 사실 무척 감탄했다. 이런 실험을 할 수 있는 것,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간소하고 절제된 삶을 산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서 의미를 깨닫고 이렇게 소박하고 유려하게 정리해 낼 수 있는 것.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돈과 관계를 대폭 축소하는 삶을 살아서 그런 걸까, 돈과 인간관계에 대한 통찰이 깊고 날카롭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간소한 삶이지만 돈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고립을 지향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 우선 마음에 들었다. 이를테면 태도의 질감이 방수 재질이 아니라 수용성이랄까. 딱 원하는 만큼의 번잡과 불안을 걷어내고 서울에서와는 다른 방향으로 운동하는 삶을 살지만, 자신의 삶이 영원히 그쪽 방향일 거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함부로 단정하지 않고, 가능성의 문을 느긋하게 열어둔다.
오히려 관계를 줄여가는 방향에서 돈의 의미가, 타인과의 관계가 명확하고 아름답게 드러나는 아이러니가 이 책을 읽고 나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다. 특히 고립과 타인과의 관계를 서술하는 부분은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긍정적인 버전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루소는 인간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어쩔 수 없이 서로를 비교하고 허영심을 키우게 되면서 세상이 불평등해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자의 말은 타인과 만나지 않으면 ‘나’를 잃기에 아예 인간으로서의 나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는 것. 이를 잘 보여주는 사람은 ‘함께해야 나를 찾을 수 있다’ 챕터에 등장하는 크리스토퍼 나이트다. 세상에, 스무 살 청년이 숲으로 걸어 들어가 27년간 그 어떤 인간과도 마주치지 않고 완벽하게 혼자 살았다고 한다.
타인이 사라지면서 내가 누구인지, 나의 이야기를 들려줘야 할 필요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고 증명해야 할 필요도 전부 사라졌다. (171)
"나 자신을 잃는다는 것도 결국 내가 있는 관계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아이러니. 타인이 있고 관계가 있어야 ‘나’도 있고, 나아가 ‘나 자신을 잃는 나’도 있다는 것. 놀라운 통찰이다. 극단적 고립을 추구했던 나이트는 결국 생존을 위해 빈 별장에서 좀도둑질을 하다가 체포되어 인간 세상으로 돌아오게 된다. 저자의 표현대로, "자신의 생존을 위해 결국 인간들이 만들어낸 구조물에 기댔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나의 모자란 점이야 말로 나 자체"라고 고백하는 저자는,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가운데 오는 고통은 (이를테면 비교와 우열에서 오는 고통과 미움 같은 것) 나답게 타인과 연결되는 것"이라고, 우리는 관계 안에서 서로의 모자란 점을 채우며 산다고 말한다. 루소가 말한 불평등한 인간 사회를 산뜻한 문장으로 반격하는데, 좋아서 별표를 그려두었다. 루소가 말한 비교의 그늘을 그저 살짝 뒤집는 것으로 똑같은 세상에 빛이 들게 한다.
사람마다 사치품의 정의, 물건의 의미, 소유하고 싶은 것, 재산의 액수가 모두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 차이들이 인간의 우열을 정하는 기준이 아니라, 세상을 다채롭고 흥미롭고 다양하게 만든다고 함께 믿는다면 우리는 연결될 수 있다. (137)
크리스토퍼 나이트가 인간관계에 대한 깨달음을 준다면 자포스의 창업자 토니 셰이는 돈에 대한 깨달음을 주는 인물로 등장한다. 저자는 인간관계에서 '나다움'의 본질을 발견했던 눈으로, 돈에서도 똑같이 '나다움'의 화두를 던진다.
다만 많은 돈은 우리를 착각하게 한다. 내 현실의 부족함을 잊게 하고, 돈의 힘을 나의 것으로 착각하고, 모든 문제를 그렇게 해결할 수 있다고 믿게 한다. 그러나 그 틈새로 ‘나’의 존재가 빠져나간다. 부유하다고 반드시 그런 삶을 사는 건 아니지만 돈이 내 존재를 대신하게 할수록 나는 돈으로 대체 가능한 인간이 되고 내 삶은 색깔을 잃는다. (146)
토니 셰이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사업 비전이었던 훌륭한 사업가였지만, 인간이 누구나 그렇듯이 불완전한 존재였다. 중독에 쉽게 빠지고, 외로움을 타는 기질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부자가 사용하는 돈의 위력 때문에 정작 그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불완전성을 잊을 때가 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만큼 부자였지만, 그 재산 때문에 자신의 진짜 문제가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를 때까지 외면할 수 있었다. 자신만의 단점과 불완전한 점을 서로에게 드러내어 폐를 끼치고, 도움을 받고, 그런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면서 살아가는 것이 삶의 기본 원리다. 그러나 돈이 모든 상호작용을 대신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다 보면 종종 그 사실을 잊게 된다. (156)
돈이든 인간이든 결국은 '나다움', 그리고 '관계'로 이어지는 서술 방향이 무척 좋았다.
좋았던 챕터를 꼽자면 둘.
우선은 ‘꿈이 삶을 가로막을 때’라는 챕터가 좋았다. 무리하지 않는 삶. 저자는 무겁지 않게, 뭔가를 덜어내면서도 진지함을 유지하는 특기가 있다. 애써 답을 찾지도 않는다. 이 챕터의 마지막에 인용된 조지 엘리엇(본명은 메리 앤 에반스임을 꼭 밝히고 싶은 이 마음을 참을 수가 없다. 영희가 철수 이름으로 책을 낸 거랄까.)의 <미들 마치> 속 문장은 벌떡 일어나 삼삼칠 박수를 치고 싶을 만큼 좋았다: “이 세상에 선이 늘어나는 것은 역사에 남지 않을 사소한 많은 행동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더 나쁜 세상에서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지 않은 이유의 절반쯤은, 드러나지 않는 삶을 충실하게 살다가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 무덤에서 잠든 이들 덕분이다.” (77)
가장 좋았던 챕터는 ‘참을 수 있는 가난’이라는 챕터. 가난을 까뮈의 바다 안에 던져 넣는 점, 그리고 가난을 시시포스의(시지프스가 시시포스라니, 산호세의 바른 표기법이 새너제이일 때의 충격과 비슷하다. 바위를 굴려가며 극한의 운명 속에서 사는 애가 갑자기 시시한 포스로 쪼꼬매지는 느낌이랄까.) 운명에 대한 주체적인 해석으로, 그리고 다른 존재와의 적극적인 연결 상태로 향하게 하는 지점이 무척 좋았다.
가정주부가 하는 일은 의식주 담당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인간관계의 운영’이라는 철학도 좋았고, 내가 인정을 받아야 하는 ‘남’은 내가 선택하는 거라는 당당함도 멋지다고 생각했다.
<월든>이 ‘좋은 삶’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낯섦’에 대한 이야기라는 저자의 말에도 십분 공감한다. <월든>에는 ‘Life in the Woods’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책 표지에 있는 'A Capitalist in the Woods'라는 문구와 고전적 감성의 표지 그림은 책 속에 비중 있게 등장하는 소로의 <월든>에 대한 오마주로 보인다. 영문학과 심리학을 전공한 저자는 책 안에서 철학자들의 이름을 줄줄 읊어대며 전공자인(, 이라고 말하기엔 공부를 좀 안 하기는 했다…) 내가 감탄할 수준의 철학적 사고들을 풀어낸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단단하게 힘이 들어가는 책을 좋아하는데, 아쉽게도 마지막으로 갈수록 약간 느슨해지는 느낌이 조금 아쉬웠다. 내가 그 부분을 시간에 쫓겨 급하게 읽어서일지도 모르니, 시간이 좀 지나서 다시 보면 달라 보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주파수와 딸깍, 하고 들어맞아서 좋았던 부분을 마지막으로 옮겨둔다.
가족끼리 모여 먹은 할로윈 캔디가 나중에 당뇨병의 원인이 될지, 가족과 보낸 즐거운 시간이 면역력을 높여줄지, 알 수 없다. 삶이 그렇다. 그 불확실함을 사랑할 수 있으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한다. 언제가 됐든 몸은 아프기 시작할 것이다. 후회되지 않을 만큼 이 시간을 충분히 만끽하는 것이 목적이다. 나쁜 일을 방지하려고 사는 게 아니라, 나쁜 일은 생기겠지만 그래도 삶의 구석구석을 만끽해서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그렇게 살았을 삶을 사는 게 목적이니까. (...) 내가 추구하는 것은 삶을 그 자체의 복잡성으로 즐기지 못하는 공포로부터의 자유다. (64-5)
나는 숲 속의 자본주의자가 아니라 술 속의 자본주의자, 혹은 독일의 라면주의자 정도 되는 인간이지만 늘 이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인간인 이상 운명처럼 주어진 불확실성의 공포와 불안을 느긋하게 껴안은 채 삶의 구석구석을 만끽하고, 니체가 말하듯 영원회귀가 되더라도 좋을만한 그런 삶을 사는 것. 이렇게 딱 들어맞는 문장으로 표현하는 동지가 생겨 반가운 느낌이다.
+
책의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내 머릿속에 한동안 잊힌 채 들어있던 박혜윤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설마, 하면서도 왠지 맞을 것 같은 예감에 사진을 찾아보니 몇 장이 떴다. 처음에는 긴가민가 확신이 없다가, 정면을 보는 어느 사진에서 너무 반가운 나머지 입가에 웃음이 확 걸렸다. 교류는 없었지만 분명히 아는 얼굴. 책 속에 가끔 등장하는, 숨 막히는 입시의 시간들을 함께 지나온 얼굴이었다. 같은 학교도 아니었던 나를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자신만의 좌표를 찍고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동창생을 볼 때의 그런 흐뭇하고도 기쁜 느낌이랄까. 참고로 나도 낮잠이 엄청 중요한 인간이라,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얼굴에게 반가움 이상의 동질감을 살짝 느꼈음을 고백한다.
이 글을 아마도 못 볼 박혜윤 씨, 반갑습니다.
리뷰는 솔직해야 하니 가감 없이 썼지만 진심으로 반가웠고, 많이 감탄했어요. 종종 책으로 만나 은밀히 안부를 확인하는 기쁨을 누리도록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