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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Apr 26. 2022

[서평] 마음사전

지난번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서평을 읽은 한 독자분께서 ‘연애서평’이라는 마치 꼬들꼬들 잘 끓인 안성탕면 같은 안성맞춤 표현을 해주셨는데, 이번에도 연애서평이다. 이 책을 사랑하는 마음을 과연 잘 표현할 수 있을지 걱정될 만큼, 굉장히 오랜 시간 마음에 두고 아끼고 있는 책.

김소연 시인의 <마음사전>이다.


시인의 유리알 같은 언어로 마음 관련 낱말 하나하나에 밑줄을 긋고 주석을 달아서 쓴 책. 2008년 출간 이래 많은 사랑을 받아 쇄를 거듭해왔다고 한다. (지금 몇 쇄까지 나왔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이 25쇄다.) 시인들의 산문집은 언제나 틀림없다. 그들은 단어를 납작한 활자로 보지 않고 통통하게 피와 살이 있는 어떤 3D 생명체로 보는 듯하다. 그놈들을 손에 움켜쥐고 요리조리 세심하게 돌려보고, 단어의 눈동자 너머를 보는 능력을 가졌다. 개인적으로는 시인을 '번득이는 마음을 가진 자들', '이 세계의 빈틈을 포착하는 사람들,' '언어를 연주하는 인간들’ 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놀라운 인간 종족이 내가 미처 보지 못하는 빈틈을 포착해서 언어를 세공해 늘어놓은 글이 마음에 와닿지 않을 리가 없다. 와닿은 정도가 아니라 소설가 김영하 님의 팟캐스트에서 이 책의 일부분을 듣고, 마음이 그리로 홀랑 날아가는 걸 느꼈다. 감탄과 존경을 곱게 버무려 갖고 있다가 십 년 전쯤 한국에 갔을 때 이 책부터 샀다.


"마음산책에서 나온 <마음사전>"이라고 말해 보면 마치 다정한 친구가 손 꼭 잡고 있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

딴소리부터 좀 하자면 표지 문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혼자 서점을 배회하다가 표지만 슬쩍 봤으면 아마 사지 않았을, 그리하여 스스로 상 멍충이가 되었을 책이다. 왜냐면 "마음의 경영이 이 생의 목표다!"라는 저 문장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영'이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번지던 때가 있었다. 허경영 아저씨가 언제부터 우리의 시선을 끌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경영이 화두고 이슈였던 시간들이 나는 그다지 사랑스럽지 않았다. 아니 인간들이 경영에 취미가 있는 건 알겠는데 마음까지 경영을 해야 하나. 마음 같은 건 제발 그냥 좀 내버려 두라고. 게다가 느낌표까지 딱 붙여놨으니 이 선언을 향해 모두 함께 달리자며 떠미는 느낌마저 들어서, 안 그래도 심드렁한 인간의 마음에 더더욱 들지 않았다. 마음이란 게 애초에 경영의 대상이 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인간의 마음이란 건 그렇게 관리나 운영이나 계획 같은 단어 아래로 착실하게 들어가는 놈이 아니라 원래 지맘대로 돌아다니는 놈이라고, 하며 책을 집어 들었다. (저 문구를 붙이신 분께 상당히 죄송합니다. 십여 년 전의 저는 지금보다 더 착실하게 비뚤어진 인간이었어요. 지금은 마음이란 게 그런 놈이기에 어떻게 경영을 좀 해보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 어떤 문장들이 들어있는지 알았기에 믿고 산 이 책은 정말이지 너무 좋았다. 책에 폭 빠지면 손에서 못 놓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확인하게 되는 책이 있고, 너무 좋아서 잠시 덮어두어야 되는 책이 있다. 그러니까 너무 좋아서 한 번에 후루룩 먹게 되는 책이 있고, 너무 좋아서 한 번에 후루룩 먹을 수 없는 책이 있다. 이 책은 후자였다. 냉면 먹듯 후루룩 읽지 않는 것이 이 책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말은 다했으되 뜻은 무한히 뻗는다는 뜻의 '언유진이의무궁(言有盡而意無窮)'은 여기에도 너무나 해당되는 말이라, 여운이 긴 문장들이 내는 아름다운 소리를 위해 읽는 중간중간 여백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 데나 펼쳐 읽어도 좋을 스물여섯 장의 글들이 있고, '틈'이라는 제목으로 책 말미에 또 여러 단어들이 정의되어 있다. 아포리즘처럼 짧은 구절로 쓰인 그 '틈'이라는 낱말 사전에서 나는 간극(진실의 거처, 온갖 개념들의 안식처)이며 흔들림(가장 부드럽고 진솔한 상태) 같은 단어들의 의미를 간지러운 마음으로 건져 올렸다. <유리와 거울>, <차 한 잔과 담배 한 모금>, <거짓말, 당신을 위하여>처럼 산문 형식으로 길게 쓰인 글들이 특히 좋았고, ‘중요하다:소중하다’, ‘평안하다: 편안하다’, ‘동정:연민’, ‘이기심:자기애’, ‘자존심:자존감’, ‘반항:저항’, ‘착함:선함’ 같은 단어들의 구별에는 별표를 그렸다.


언어의 의미를 섬세히 분별하고 조탁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걸 느낄 수 있었고, 단어들 사이의 세심한 간격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사람을 오래 들여다보고 언어를 오래 만지면 이런 표현이 가능하구나. 줄줄이 소시지처럼 줄줄이 감탄했다.


사실 마음이라는 것은 나의 영역인데, 다른 사람이 정리하는 마음의 언어가 과연 나에게도 잘 맞는 옷이 될 것인가라는 물음이 있었다. 사실 중간중간 그렇게 불화하는 부분도 많았다. 아무리 곱씹어도 나의 마음과는 결이 달라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이 종종 있었고, 그런 곳에는 물음표를 그렸다. 다는 이해가 안 간다는 게 사실은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내 마음의 주인은 나니까. 시인의 마음을 내 마음이 완전하게 따라갈 이유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라는 불확실한 세계를 누군가 뚜렷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정리해 줄 때의 희열이 있어 좋았다.


돌아보면 나는 마음을 내보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분위기에서 자랐다. 내가 자란 한국 사회는 내 마음이든 타인의 마음이든, 마음을 만지는 것이 서툴렀던 사회로 기억한다. 최근의 한국 사회는 마음에 대한 접근이 확연히 달라졌다. 이젠 솔직한 것이 사랑받는다. 덮어두지 말고 내보이라고 말한다. 이제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시간을 내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고 말하는 사회가 되었다. 너무 또 마음을 챙기라고 여기저기서 소리 지르고 마음이라는 키워드가 미친 듯이 돌아다니는 것도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대체 이 비뚤어짐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래도 마음을 살피고 매만지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이 된 점은 좋다고 생각한다. 마음을 챙기는 일, 즉 마음을 돌보는 가장 아름다운 작업은 이렇게 각자가 자신의 마음사전, 혹은 마음일기 같은 것을 만들어보는 일이 아닐까. 내 마음의 그 모호한 덩어리를 세심하게 풀어 구분하고 하나씩 언어화해보는 일. 불안이라는 감정은 언어화하는 순간 조금씩 실체가 드러나 다소는 견딜만한 것이 되고, 갈 곳 몰라 날뛰는 사랑의 감정도 문장 안으로 불러다 앉혀 놓으면 언제고 비밀스레 혼자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 되어 그것 역시 견딜 수 있는 것이 되니까.


좋아하는 문장들을 아주 조금만 옮겨본다.

- 마음을 확산하는 것이 유리라면, 마음을 수렴하는 것은 거울인 셈이다.


- 밥은 사람의 육체에게 주는 음식이라면, 차는 사람의 마음에게 주는 음식이다. 밥보다 차를 더 즐기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마음이 발달한 사람이다.


- 뜨거운 물에 차 알갱이가 풀려나가고, 담배 한 모금의 연기가 허공에 풀려나간다. 그 풀려나가는 실체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마음의 매듭을 푼다.


- 감정이 한 칸의 방이라면, 기분은 한 채의 집이며, 느낌은 도시 전체라 할 수 있다.


- 소중한 존재는 그 자체가 궁극이지만, 중요한 존재는 궁극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이다. 돈은 전혀 소중하지 않은 채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여있다. 너무 중요한 나머지 소중하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 행복은 스며들지만, 기쁨은 달려든다. 행복은 자잘한 알갱이들로 차곡차곡 채워진 상태이지만, 기쁨은 커다란 알갱이들로 후두둑 채워진 상태다.


- 나의 편안함은 누군가의 불편함을 대가로 치르지만, 나의 평안함은 누군가와 함께 누리는 공동의 가치가 될 수 있다.


- 선하지 않고도 충분히 착할 수 있다. 착함은 현상이고 선함은 본질이다. 착함은 일상 속에서 구현되고, 선함은 인생 속에서 구현된다.


여러 번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늘 감탄한다. (내용을 다 알면서 매번 다시 감탄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시간 궤적을 따라 기존의 물음표가 사라지기도 하고 새로운 곳에 생기기도 하는 게 무척 재미있다. 지난해에 독서모임에 소개하려고 다시 읽었더니, 마음이 그새 자랐는지 문장들이 또 다르게 조잘거렸다. 이번에 서평을 쓰며 다시 넘겨보니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차이도 있고, 조금 더 살았다고 그동안 단어 사이의 간격이 더 세심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우리는 어느 정도 크고 나면 말을 수집하고 배우는 일을 그만두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편안과 평안, 소중과 중요를 우리는 일상에서 대체로 동의어로 사용한다. 아무렇지 않게 뭉뚱그려 사용하던 단어들을 낯설게 만나고 그 사이에 단정한 줄을 긋는 일은, 이 세상을 보는 내 시야의 해상도를 높이는 일이다. 마크 트웨인은 "딱 맞는 말과 적당히 맞는 말의 차이는 번갯불과 반딧불의 차이"라고 했다. 문장 사이로 번갯불이 번쩍이는 글을 볼 때면, 이런 벼락이라면 기꺼이 맞아 감전이 되어도 좋겠다는 전기뱀장어의 심정이 되곤 한다.  


말의 창고가 크고 그 안에 든 것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사람의 영혼은, 적당한 사이즈의 창고에 대충 말들을 쑤셔 넣어둔 사람의 영혼과는 반드시 구별되는 법이다. 나는 정확하고 매력적인 언어를 쓰는 사람, 언어에 대한 긴장을 놓지 않는 사람, 대화를 통해 새로운 단어를 가르쳐 주는 사람들을 정말 좋아한다. (물론 말수가 적지만 내면에 보석을 이따만큼 가지고 있는 자들도 깊이 사랑한다. 꼭 내뱉어야 말인 건 아니니까.) 우리는 가지고 있는 언어의 틀로 세상을 인식한다. <시선으로부터,>라는 소설 속 예처럼,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하는 걸 평생 힘겨워 할 수밖에 없다. 중요와 소중의 차이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린 딸이 바쁜 아빠 옆에 가만히 놓아두는 인형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번번이 더 좋은 인형을 사주는 걸로 자기 할 일을 다했다고 여길 것이다. 편안과 평안을 구별하는 눈을 가진 자의 삶의 온도는, 둘을 구별하지 못하는 자의 삶의 온도와는 아마 다를 것이다.


한 사람이 몸속에 가진 사전은 그 사람 영혼의 지도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대체로 그 지도를 따라 삶을 살게 되므로, 한 영혼의 땅은 그 인간이 가진 언어의 총합이다. 영혼의 국경을 이루는 건 단어들이다. 그 안에서 특히 마음에 관한 단어들의 의미라면 말해 무엇하겠는가. <내가 마음사전>을 추천하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이 아름다운 기호들을 만드신 분은 대체 누구실까요.

정말 클래식한 사전 같은 느낌으로, 책에서 의미 있게 다뤄진 부분들을 섬세하게 기호로 만들어 넣은 리커버판이 나왔었는데 평소에 대체로 누워 있는 게으른 해외동포의 손에까지 닿을 리가 없었다. 재고도 이미 없다는 슬픈 사실을 뒤늦게 알고, 나는 책을 펼쳐 슬픔(과 연민과 분노)에 관한 부분을 다시 읽으며 마음을 달래보고자 했다. 잘 달래지지 않기에 같은 실의 다른 끝단으로 가서 '존경'을 읽었다. "감정 바깥에 다소곳이 앉아 있다. 그만큼 깨끗하고 단정하다." '흠모와 열광'도 읽었다. 동경과 흠모는 언제나 도로교통법처럼 대상과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진행되는 반면, 열광은 여러 차선을 넘나들면서 앞지르기를 하는 위험한 질주라고 시인이 말했다. 그렇게 거리를 확보하고 단정하게 앉아서 깨끗하게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기로 하니, 마음이 따뜻한 찻물 속 차 알갱이처럼 보드랍게 풀어졌다. 저렇게 아름다운 책이 세상에 나와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내가 줄을 긋고 메모를 남긴 내 눈앞의 이 책을 더욱 사랑하는 걸로.   



+ 덧붙이는 정보.


동시를 쓰는 시인이 만들어주신, 아이들을 위한 마음 사전도 있다.

'감격스럽다(씨앗을 심은 화분에서 싹이 돋았을 때의 마음. 달리기 시합에서 꼴찌만 하다가 드디어 3등을 했을 때의 마음)'부터 '흐뭇하다(숨은 그림 찾기에서 숨은 그림을 다 찾았을 때 드는 마음. 어질러진 방을 깨끗하게 청소했을 때의 마음.)'까지, 80여 개의 단어가 페이지마다 사랑스럽게 담겨있다.

첫째가 여덟 살이 되면 한 페이지씩 같이 보면서 아이의 마음속에는 어떤 단어들이 살고 있는지 엿보고 싶어서 사 두었다.


최근엔 <마음사전>의 친구 같은 책을 찾았다.

안희연 시인의 <단어의 >.


조금  파릇하고 말랑거리는 언어와 다정한 사유로 비슷한 작업을 하셨고 비슷하게 나를 사로잡았다.  <마음사전>에서는 익숙한 단어들이 애인의 우는 얼굴처럼 낯설게 다가와 마음을 울리고, <단어의 >에서는 낯선 단어들이 우리의 익숙한 일상 안으로  들어와 마음을 두드리며 겹친다.


<마음사전> 언어들이 유리알처럼 영롱하고 칼날같이 서늘하다면, <단어의 > 창가에 놓인 화분 같고 거기에 비치는 노란 햇살 같다. <마음사전> 그야말로 어떤 사전을 대할 때의 존경과 믿음 같은  가지게 한다면, <단어의 > 단어들이 살고 있는 포근한 집에 들어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느낌을 준다. 김소연 시인의 단어들이 더할  없이 아름답게 갈무리되어 벽에 걸려있는 느낌이라면, 안희연 시인의 단어들은 속살거리며 나를 껴안아주는  같은 느낌.


책을 읽을  보통은 밑줄을 긋고 문장들을 정리해 두는데, 밑줄이 너무 많아서 정리를 포기했다. 그냥 책을 가까이 두고 여러  읽기로 했다. <마음사전> 그랬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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