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 할까
이곳에 매주 한 편 글을 올리는 걸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세이브 원고가 두 편 있었는데 둘 다 아직 오피셜하게 발행되지 않은 관계로 (하나는 서평 사이트, 다른 하나는 매거진에 실릴 글이었거든요.) 제가 먼저 여기에 올릴 수 없어서 자체 마감 펑크.
그래서 세 번째 책 원고의 일부를 맛보기로 보여드리는 옵션을 택해봅니다. 공부에 관한 제 생각을 정리해 본 글입니다. 초록색 별 표시와 초록색 문장들은 책 속에서 각주로 들어갈 부분이라고 생각해주시면 돼요.
'왜, 무엇을, 어떻게', 이 세 가지 중에서 '무엇을'의 중간 부분까지만 끊어 올립니다. 그러니까 새 책에 들어갈 한 챕터의 절반 분량이에요. 아직 초고이니 여러분들께서 의견 남겨 주시면 생각을 다듬는데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공부라면 남 부럽지 않게(과연 부러워할 것인가) 오래 해왔다. 그렇지만 나는 남 부럽지 않게 멍청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왜,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 없이, 그저 맹목적으로 휩쓸려 공부를 했던 시간이 길기 때문이다. 나의 아이들이 공부에 취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공부는 누구나 해야 하는 것이기에,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공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본다. 이 녀석들이 공부하기 싫다고 폰트 64 휴먼 판소리체로 소리 지를 때를 대비해서 미리 정리해 두면 나중에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일은 없지 않을까 싶어서. 무엇보다 나처럼 공부하지 않았으면 해서.
우리나라는 공부와 시험의 상관성이 유독 높은 사회다. 안타깝게도 공부가 '입시'와 동의어처럼 사용된다. 힘겹게 입시 관문을 통과한 사람들에겐 그 순간부터 이제 '취업'과 유사한 의미가 된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시험이나 관문을 통과하고 나면 내 인생에서 이제 공부는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 그런데 살아보면 깨닫겠지만 공부는 그런 게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공부는 왜 할까? 좋은 학교에 들어가서, 좋은 직장에 취업해서, 돈을 많이 벌려고? 일단 안타깝게도 공부와 돈방석 사이에 인과관계가 그렇게 명확하지 않다는 점을 차치하고라도, 공부는 그러려고 하는 게 아니지 싶다. 공부는 생각의 근육을 키워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한다고 나는 믿는다.* 성숙한 사람이란 간단히 말해서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다. 세상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어떤 주제를 잘 이해하고, 요지를 잘 파악해서 상대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을 줄 알며,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명료히 말할 수 있고, 그렇게 서로 대화와 토론을 통해 설득하고 맞춰갈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성숙한 사람이다. 자신의 생각을 잘 말할 수 없어 감정만 앞세우는 사람, 상대를 잘 설득할 수 없어 폭력을 쓰는 사람이 아닌. 자기 생각을 적절히 표현하지 못해 짜증 내며 울고,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난동을 부리며 주먹질을 하는 건 딱 아직 말을 배우기 전의 아이들 모습이다. 어른들이 그렇다는 건 몸만 컸단 얘기다.
* 꼭 인문학적인 공부가 아니라 기술적 지식 같은 것에 대한 공부도 생각의 근육을 키우고 성숙한 사람이 되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나는 지식이 일정량 쌓이면 그것이 아무리 단편적인 것이라도 통합을 이루는 순간이 있으며, 한 분야를 오래 보는 사람들이 갖는 혜안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 공부란 것은 내용뿐 아니라 태도와도 관계되는 단어이므로, 꾸준히 시간을 들여 뭔가를 하려는 태도 자체에서 마음의 근육이 다져진다고 본다. 내가 겸손한 자세로 뭔가를 배우고 숙지하려는 자세는 바로 누군가의 말을 경청하려는 기본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나보다 오래 산 사람들이 수두룩 빽빽하지만, 그래도 이 나이 되도록 살아보니 매력적인 사람들은 대체로 생각의 근육, 마음의 근육이 단단한 사람들이었다. 분명한 자기 생각이 있고, 흥미로운 질문들을 던질 줄 알며, 대화를 했을 때 말이 잘 통해 즐거운 사람들. 그러므로 공부는 매력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한다고 해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본다. 매력이라고 하면 보통 외형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아무리 입이 떡 벌어질 아름다운 모습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 안에 든 것이 엉망진창이면 그 떡 벌어진 입이 다시 조용히 닫히는 법이다. 그러므로 가꾼다는 동사를 몸에만 써서는 곤란하다. 거울로 자기 몸을 부단히 살피고 체중에 관심을 기울이며 근육량에 신경 쓰듯, 내 안에 든 것을 꾸준히 살피고 정신의 무게에 관심을 기울이며 뇌라든가 마음에도 근육을 키워야 한다.
개인적으로 내가 스스로 공부를 많이 해서 (나에게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Ph.D.*라는 타이틀이 있다. 믿어달라.) 좋다고 느꼈던 때는 무엇보다 '상대를 잘 이해할 수 있을 때'였다. 상대의 세계로 거리낌 없이 퐁당 뛰어들 수 있을 때.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마주 보고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막힘없이 재미있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순간 같은 것. 생각의 근육이 꽤 발달해서 몸으로 치면 체력이며 근력에 필적하는 이해력과 사고력이 뒷받침되면 어떤 사람이 어떤 얘기를 하더라도 잘 알아듣고 알맹이를 흡수할 수 있다. 낯선 분야라 다소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신의 의지만 있다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그 말들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사람과의 대화가 즐거울 확률이 높아지고 세상에 좋은 마음으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기쁨이 있다. 한마디로, 공부를 많이 하면 사랑스러운 사람들을 더 잘 사랑할 수 있다. 꼭 사람들과 직접 소통하지 않더라도 생각의 언어가 풍부해지면 책이며 영화며 노래며 세상 풍경이며, 그 모든 것이 나에게로 닿아오는 속도와 질이 달라진다. 나는 그래서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이해하며 살고 싶어서.
*Ph.D. 는 Doctor of Philosophy의 약자다. 좁은 의미에서의 철학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모든 일반적인 분야의 박사학위를 일컫는 말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이 타이틀은 대학 레벨에서 특정 과목을 가르칠 수 있는 수준, 혹은 해당 분야에서 높은 전문성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자격을 의미한다. 그러나 Potential Heavy Drinker, Permanent Head Damage, 혹자는 Pre-Historic Dinosaur의 약자라고도 한다. 분하지만 인정한다.
어떤 전공이 미래에 살아남을까, 이런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그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도저히 알 수 없는 영역이다. 내가 세 살 때 돌아가신 할머니께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이 그러하듯이, 그보다 먼저 가신 할아버지께 시험관 아기 시술이 그러하듯이, 2000년대 초반에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께 유튜버가 그러하듯이, 내 아이들이 살 미래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물건과 기술과 직업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러나 그 상상도 할 수 없는 물건이며 기술, 직업들을 꿰뚫는 기본 중의 기본이 있다. 읽고 이해하고 쓰는 능력, 질문하고 대화하는 능력. 이것들은 세상 그 어떤 일을 하든 꼭 필요한 능력이다. 어떤 물건, 어떤 기술, 어떤 직업이 새로 생겨나든 간에 이 기본 능력들의 중요성이 사라지는 일은 없지 않을까. 그러므로 나는 우리가 읽고 이해하고 쓰고 질문하고 대화하는 법을 제대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우리는 대체로 읽고 이해하고 쓸 줄 안다고, 질문하고 대화할 줄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글자를 읽는다고 글을 읽는 게 아니고, 글씨를 쓴다고 글을 쓰는 게 아님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길을 물어볼 줄은 알아도, 오랜 시간 마음속에 품고 갈 좋은 질문을 던지지 못하는 사람들은 많다. 나는 좋은 질문은커녕 질문 자체를 환영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호기심을 두려워하는 어른들 속에서, 질문을 거부하는 사회 안에서 자랐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를 쓴 에릭 와이너는 우리가 대체로 ‘철학에 대해서’ 배우느라 '철학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 말에 크게 공감한다. 돌아보면 그랬다. 수학 문제를 푸는 법을 배우느라 수학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했고, 미술에 대해서 배우느라 미술과 만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나는 학창 시절에 수학 문제를 푸는 방법은 알았어도 수학적인 개념에 대한 질문을 단 한 번도 마음에 품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왜 인간들이 자꾸 물에다 짜게 소금을 섞어 놓고 그걸 합친 뒤에 농도를 구하라고 하는지, 순돌이 통장 복리 계산을 왜 순돌이가 안 하고 내가 해줘야 하는지 화가 났을 뿐이었다. 수학은 그저 기계적으로 답을 내는 과목일 뿐이었지, 내가 거기에 대고 어떤 질문을 품어 볼 과목은 아니었다. 수학의 언어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술 같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작품에 폭 빠져들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상상하기 전에 일단 어느 사조의 어떤 화가가 어느 시대에 그린 것이며 특징은 무엇인지, 이런 것들을 기계적으로 외우기 바빴다. 우리나라에서 공부를 잘하던 학생들이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거나 유학을 떠나 처음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대체로 선생님이 질문하고 학생들은 답을 맞히는 방식의 공부에서 벗어나 학생들 스스로 좋은 질문을 던지는 것에 중점을 두는 분위기에 적응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게 나였다.
나는 다행히 철학이라는 과목을 공부한 덕분에 질문이라는 개념에 대한 질문을 품기 시작했고(쓰고 보니 상추로 상추 싸 먹는 소리 같다) 이제는 세상 만물을 볼 때 물음표와 느낌표를 상당히 장착한 눈알을 갖게 되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질문은 보통 정답을 상정하고 던지는, ‘다음 보기 중에서 고르시오’다. 그런 납작한 질문 말고, 질문을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 그 질문으로 인해 머릿속에서 꽃 하나가 피어나는 그런 질문을 할 줄 알아아 한다. 프랑스의 수능인 바칼로레아 문제라며 돌아다니는 문제들을 본 적이 있다. 사랑이 의무일 수 있는가? 철학자는 과학자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예술 작품은 반드시 아름다운가? 기술이 인간 조건을 바꿀 수 있는가? 평화와 불의가 함께 갈 수 있나? 수능이 끝나고 성적표만을 기다리는 우리와는 달리 프랑스 국민들은 시험이 끝난 후 문제가 공개되기를 기다린다고 한다. 그 문제에 대해 자기 생각을 정리해보기 위해서라고. 그래서 학자들은 시민들과 함께 바칼로레아 문제를 가지고 강당에서 함께 토론하고, 정치인들은 TV에 나와 자신이 생각하는 답을 제시한다고 한다. 매년 질문을 함께 읽고, 함께 이해해 보고, 함께 답안을 써 보는, 그야말로 함께 공부하는 국민들인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질문보다 대답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이미 있는 지식을 누가 빨리, 누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뱉어내느냐를 가린다. 모든 것에 정답이 있다고 믿기에 흑백논리나 이분법적 사고와 친화적이기도 하다. 한 사람이 맞으면 다른 사람은 틀려야 한다. '다른 것'이 '틀린 것'과 동의어가 되는 일은 다반사다. 질문이 아니라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답만 외우느라 읽고 쓰는 능력이 현저히 위축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어린 시절의 나는 뭘 틀렸는지보다 몇 개를 틀렸는지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그러므로 시험을 봐도 별로 남는 게 없었다. 나의 공부를 돌아봤을 때 가장 아쉬운 부분이고, 나의 아이들이 이런 식의 공부를 하지 않기를 가장 바라는 지점이다. 공부의 대상과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제대로 읽고,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내 생각을 정리해서 표현하고, 나의 질문을 만들고, 그 질문으로 타인과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볼테르가 말했듯,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의 대답이 아닌 질문을 보는 것이다. 질문의 깊이가 사람의 깊이를 결정하고, 질문의 크기가 삶의 크기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잘 듣고 잘 읽고 잘 쓰고 좋은 질문을 만드는 일.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 중 세상에 이보다 중요한 게 있을까 싶다. 우리가 학교에서 많은 과목을 배우는 것은 잘 읽고 잘 이해하고 잘 표현하기 위한 밑작업이기도 하다. 사실 기회는 우리에게 자기소개서를 보내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일을 미리 찾은 아이들이라면 그에 맞춰 공부의 내용을 더욱 세부적으로 가꿔갈 수 있겠지만, 아직 하고 싶은 딱히 일이 없다면 나중에 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도전해 볼 수 있도록 기본이 되는 것들을 준비해야 한다. 그 기본이 바로, 나는 잘 읽고 잘 이해하고 잘 표현하는 능력을 갈고닦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렇게 잘 듣고 잘 읽고 필요한 질문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실제로 점수도 잘 받는다. 읽는 눈이 좋고 듣는 귀가 밝으면 책에서든 선생님 말씀에서든 중요한 점을 잘 캐치하기 때문이다. 나는 시간을 적게 들이고도 시험을 잘 보는 편이었는데, 이 벼락치기 능력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뭐가 중요하고 시험에 나올 것 같은지 잘 파악하는 능력이다. 암기과목 시험을 앞두고 주변 친구들에게 주관식 문제를 찍어주는 '시험 5분 전 이진민의 무당 타임'은 늘 높은 적중률을 자랑했고, 나는 심지어 박사과정 시절에 논문 자격시험 문제를 예상해 맞추기도 했다. 잘 읽고 이해하는 능력의 시너지다. 또 이렇게 눈이 밝아지면 내가 뭘 알고 뭘 모르는지가 분명해진다. 공부를 함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건을 내가 뭘 알고 뭘 모르는지 아는 것이 아닐까. 공자님도, 소크라테스도, 한 목소리로 얘기한 부분이다.*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 '너 자신을 알라'로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모두가 안다고 생각하는 단어를 골라 검토하고 여러 각도에서 뜯어봄으로써 자신이 모르는 부분을 발견하는 것이다. 논어 <위정> 편에서도 공자님이 말씀하신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곧 아는 것이니라."
(이하 생략)
저는 공지드린 대로 내일 연세대에서 온라인 특강이 있을 예정이고요.
지난달 출간한 <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 이용법>은 3쇄를 찍게 되었습니다. 참 기쁘네요.
특강은 책의 한 챕터를 구체적으로 다루게 됩니다. 포스터 우측 하단의 줌 아이디와 패스워드로 자유롭게 들어오실 수 있고, 줌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s://yonsei.zoom.us/j/4325800579?pwd=RlNLYTB2bTVVdFRxRGF3YzJXMENIdz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