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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Nov 09. 2021

다친다는 것은

상처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쓰고 있는   원고의 일부를  공개합니다. 이번 책은 제가 지금껏 썼던 책들과는 조금 달리, 제가 하고 싶은 말을 그냥  쏟아놓고 있습니다.
"놀고 다치고 배우자" 중에서 "다치고" 관한 부분이에요. 6개의 소제목으로 구성된 글인데   3개를 띄엄띄엄 놓아 봅니다.


(앞부분 생략)


상처는 흠이 아니다


조금 더 크면서 아이들은 턱이고 무릎이고 팔이고 머리고, 주머니에 구슬 모으듯 그 작은 몸에 상처를 모으고 있다. 다섯 개쯤 모으면 레벨업 되는 시스템이라도 되는 건가 싶게 서로 자랑삼아 보여주기도 한다. 남자애들이라 내 마음이 조금 편한 건가 자문해 보지만 여자아이였어도 크게 다르지 않은 마음일 것 같다. 그러므로 성별의 문제는 아니다. 남자아이면 흉이 좀 있어도 되지만 여자아이가 흉이 있으면 안 된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런 걸로 여성의 외모를 판단하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글러먹은 사람이라는 걸 세상의 딸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흉터를 쓸어주고 마음 아파해 주는 사람이면 좋겠지만, 어쩔 수 없이 생긴 몸의 흉으로 상대를 조금이라도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마음에 아주 깊은 흉이 잔뜩 있다는 얘기가 아닐까. 사실 귀엽고도 소중한 내 딸이 다치는 걸 바라는 부모는 아무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딸아이 몸에 흉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부모로서 자기 딸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이기도 하다. 책 안의 이야기를 보기 전에 겉면에 좀 접힌 자국이 있다고 그 책의 매력이 급감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여자든 남자든 그리 큰 상처 없이 자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상처가 좀 있다고 큰일 나는 건 아니다. 내 아이들의 흉터를 보는 내 마음이 그리 괴롭지 않은 건, 상처는 별로 흠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상처는 흠이 아니다. 나의 아랫배에는 커다란 칼자국이 있다. 아이들이 나온 자리다. 첫아이가 내 뱃속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처럼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는 바람에 두 아이 다 수술로 꺼냈다. 아직도 궂은날에는 콕콕 쑤시기도 하고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는 뭉근한 통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 흉터는 내가 엄마가 되었다는 표시다. 간절히 아이를 바라는 그 누군가에게는 축복 같은 자국일지도 모른다. 반려인의 몸에도 굉장히 큰 수술 자국이 있다. 고등학교 때 생사의 기로에 서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한창 민감할 나이에 죽음의 무게와 맞서 싸운 흔적이다. 안쓰럽고 대견하고 멋있는 자국이라고 생각한다. 그 수술 자국이 없었으면 우리는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내 몸의 수술 자국이 없었으면 우리는 아이들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거북이 수영클럽>>이라는 책에는 흉터를 숨기기 어려운 장소로서 수영장이 등장한다. 갑상선암 수술 자국이 있는 저자는 이 책에서 흉터로 위축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전한다. 당장 내가 숨이 차서 돌아가시겠는데, 다들 물에 안 빠지고 살려고 발버둥 치느라 바쁜데, 흉터가 눈에 보이겠냐고. 흉터라는 건 대체로 아프고 힘든 순간을 견뎌낸 사람들이 가지는 표시다. 애쓴 자국이다. 나에게 이렇게 힘든 순간이 있었지만 극복해 냈다는 표시. 사람에 따라서는 보기 싫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응원을 보낼 수도, 존경을 보낼 수도 있는 자국이다. 그러므로 나는 흉터를 가지고 사는 일에 심리적으로 너무 많은 무게를 얹어두지 않았으면 한다.  


흉터는 아름다움이 배어가는 틈일 수도 있다. 오래 써서 생활의 흠이 곱게 내려앉은 물건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있다. 낡음이 마음을 움직일 때가 있다는 말이다. 나는 엄마가 생전에 오래 쓰셔서 반들반들해진 염주를 유품으로 간직하고 있다. 아무런 흠이 없는 새 염주보다 내게 백 배 더 아름답고 천 배 더 귀한 것은, 실핏줄처럼 염주알들을 움켜쥐고 있는 그 흠들 때문이다. 청바지를 오래 입어서 여기저기 해지고 찢어진 것이 빈티지한 멋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예 처음부터 워싱을 한 청바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기타에도 렐릭(relic) 문화라는 게 있어서 스크래치가 가고 칠이 벗겨진 기타들이 대접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러 그렇게 매만진 기타들을 출시한다고. 저건 렐릭이 아니라 그냥 망가진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마치 지하철에서 만나면 노약자석을 내드려야 할 것처럼 보이는 기타가 오히려 더 비싸게 판매되는 걸 보면서 처음에 나는 좀 어리둥절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상처가 예쁘게 났다, 흠이 멋있게 났다며 감탄하고 있었다. 이렇게 물건의 상처는 빈티지라는 이름으로 아름다움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 몸의 상처도 조금 더 예쁘게 보아주면 어떨까.  


특히 아이가 놀면서 생기는 흉터는 아이가 세상을 배우고 자란다는 증거다. 노르웨이에는 '까진 무릎의 축복(The blessing of a skinned knee)'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까지고 붓고 긁히고 딱지가 앉고 멍이 든 무릎은 바로 아이가 신나게 놀고, 작은 어려움은 견디고, 늘 보호받으려고 하지 않고, 건강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다는 표시다. 해리포터의 번개를 가진 내 아이들은 나무에 오르는 걸 좋아한다. 꼭 나무뿐 아니라 일단 이것들이 땅에 잘 안 붙어 있다. 그러니 당연히 뚝뚝 떨어지기도 잘한다. 노르웨이 사람들처럼 내 아이의 까진 무릎이 축복으로 보이는 경지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지만, '저 녀석이 멍들어 왔구나'가 '저 녀석이 그림을 그리다 왔구나'로 생각되는 경지에는 이르렀다.    


나는 고통 공감이 센 편이지만 내 고통은 잘 참고, 내 아이가 넘어지는 일에는 이상하리만치 담담한 편이다. 한 번은 아이가 피크닉 테이블의 벤치에 서서 까불다가 뚝 떨어졌는데 주변에서 다 깜짝 놀라고 내 아이랑 나만 안 놀랐다. 나무늘보 같은 표정으로 어, 얼른 일어나, 하고 말했더니 선배 언니가 너는 어쩜 그렇게 표정 하나 안 변하고 무덤덤하냐며 놀라워했다. 아니 신생아도 아니고 솔직히 그 높이에서 떨어진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크게 아플 것 같지도 않았다. 앞으로 다치고 아플 일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이 정도야 뭐. 그 정도는 별거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나는 일부러 더 무덤덤하게 군다. 엄마 아빠가 너무 걱정하거나 속상해하면 아이는 같이 위축되고 더 아파한다.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도, 넘어졌을 때 별 거 아니라는 듯 잘 울지 않는 점이다. 푹 고꾸라졌다가도 그냥 일어나서 또 으아아아 달려간다. (이놈의 자식들아 제발 조심을 좀 하란 말이다!) 심하게 긁혀서 쓰라리거나 피가 줄줄 나지 않는 이상 아프다는 얘기도 별로 안 한다. 정말 아프다고 엉엉 울 때는 엄마가 온 마음으로 위로해 줄 테니, 별로 아프지 않은 건 그렇게 툭툭 털고 앞으로 나갔으면 좋겠다.     


(중반부 또 생략)


안 보이는 세계의 상처와 위험


그런데 문제는 넘어지고 굴러서 피가 나는 것만이 다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게 바깥 부분을 다치는 건 피가 나는 것도 아무는 것도 눈에 잘 보여서 오히려 안심되는 면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말로도 마음을 긁히고, 침묵 속에서도 멍이 들고, 감정으로도 화상을 입는다. 외상뿐 아니라 내상을 살피는 일도 중요하다. 이 내상은 어디를 어떻게 다쳤는지, 아물기는 하고 있는지, 도통 눈에 보이지가 않아 어렵다.


아이들의 보이지 않는 상처를 살펴야 하는 게 어른들이다. 아이들은 표현력이 섬세하게 발달되지 못해서 안을 들여다보는 게 더 어렵기도 하다. 이 조그만 놈들의 안에 들어있는, 눈에 안 보이는 걸 살펴야 하다니. <엑스맨>에 등장하는 프로페서X처럼 마음과 기억을 읽는 초능력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만약 그런 초능력이 생겨서 아이들의 마음과 기억을 읽다 보면 아마 놀랄지도 모른다. 그 안에 괴물처럼 등장하는 게 바로 나일 수 있기 때문에.


어린 나이의 아이들이 감정적으로 다칠 가능성은 타인보다는 부모 쪽이 오히려 크다. 아이 곁에서 가장 큰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아이들의 우주. 그 큰 우주가 아이에게 사랑의 이름으로 강요를 하거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필요 이상으로 몰아세우진 않는지, 상처가 될 말을 하지 않는지, 그놈의 우주가 명상을 하고 자정작용을 좀 해야 한다.

하루는 큰아이가 그랬다.

"엄마는 크잖아. 엄마는 Eltern(parents)이잖아."

"응." (어.. 엄마는 스머프에 가깝지만 그래도 너한테는 큰 사람이지.)

"나랑 이음이는 Kind(child)잖아. 우리는 작잖아."

"응."

"그래서, 엄마가 큰데 엄마가 무섭게 말하면 안 돼. 우리는 작으니까 무서워."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한 것도 아니고 무섭게 말한 것도 아닌데 아이는 그렇게 느꼈나 보다. 늘 배실배실 웃으면서 꿀 뚝뚝으로 쳐다보던 엄마가 표정을 딱딱하게 하면 그게 그렇게 무서운가 싶다. 나도 인간인 이상 이놈들의 만행에 화가 치솟을 때가 있고, 다른 곳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아이들의 콩알만 한 잘못에 왕만두 백 개만 한 분노를 날릴 때도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아이란 존재는 원래 그런 존재들이다. 마음은 급한데 몸이 따라주지 않아 실수도 잦고, 세상에 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사고를 칠 확률도 높은. 느리고 서툰 존재들에게 어른의 잣대를 들이대는 건 어른들의 갑질이다. 시간이 지나면 아이들은 엄마 아빠와 했던 대화의 내용은 잊고 느낌만 남겨 가진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나도 뭘 잘못해서 혼났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고, 화가 잔뜩 나서 소리치던 어른들의 무서운 얼굴과 엄마가 회초리를 꺾을 때의 그 울고 싶던 마음들만 진하게 남아있다. 어른들은 뭔가를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무서운 얼굴을 하고 위압감을 주지만, 두려움과 배움은 함께 춤출 수 없다. 작으니까 무섭다는 아이의 말을 나는 마음 깊이 간직하기로 했다. 큰 사람은 다정해야 한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내가 어떻게 보일지 생각해보고, 나에게 그만큼 더 큰 사람의 존재를 가정해 본다. 이를테면 천장 높이까지 키가 커서 늘 나를 내려다보고, 커다란 손으로 나를 번쩍 안아 올릴 수 있는 사람. 그렇게 거인 같은 사람이 나를 향해 분노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른인 나도 오싹하다. 손을 치켜들면 움찔할 거고, 크게 소리라도 지르면 내 온몸이 울리겠지. 더구나 그렇게 커다란 사람에게 나의 존재를 위탁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는 정말 내가 거스를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런 커다랗고 중요한 사람이 말로, 혹은 침묵으로 상처를 준다면 작은 아이들의 마음은 어떨까. 우리가 눈에 보이는 몸매에만 신경 쓰지 말고 내면을 가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상처뿐 아니라 안 보이는 상처에 좀 더 관심을 기울였으면 좋겠다. 안 보이는 상처를 줬다고 생각하면 꼭 치료해 주기를, 그리고 잘 아물었는지를 꼭 확인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살갗에 생긴 생채기는 딱지가 생겨 아물면 나아지지만 영혼에 입은 화상은 치료되지 않고 삶의 곳곳에서 평생 아픈 연기를 내기 마련이다. 아이든 어른이든 그렇다.


안 보이는 세계에서 아이들이 다칠 위험은 다른 곳에도 있다. 점점 더 광활하게 펼쳐지는 온라인의 세계가 그렇다. 오프라인에는 우리가 너무나 당연히 알고 있는 규제와 안전장치들이 있는데 온라인에는 그런 게 미비하다. 학교만 하더라도 반경 200미터 내에는 대기 오염 물질 배출 시설을 비롯한 유해 시설이 들어갈 수 없고 차도 천천히 다녀야 한다. 그런데 유튜브 세상에서는 광고 두세 번만 잘못 클릭하면 아이들 앞에 바로 낭떠러지며 정글이 직배송될 수 있다. 학교 운동장에서, 혹은 동네 놀이터에서 누군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면 그래도 누군가의 눈에 뜨일 확률이 높지만, 소셜 미디어에서 악플에 시달리고 단톡방에서 왕따를 당하는 아이는 어른들의 눈에 뜨이기가 쉽지 않다. 놀이터의 개념이 바뀌고 있는 세대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아지트로 삼는 친구 방에서 놀기보다는 온라인 공간에 그들이 만든 방에서 노는 시간이 더 많은 세대.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주고받는 상처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인지하고 있을까.


얼굴을 대면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인간은 잔인함의 온도를 조금 더 높일 수 있다. 이 분야는 기술의 진보가 사악한 인간들의 마인드를 따라잡기에 유독 어려움을 겪는 분야이기도 하고, 디지털 세계에 서툰 어른들이 아이들의 말랑말랑한 손끝을 따라가기 어렵기도 하며, 아이들의 사적 영역을 존중해야 하므로 평소에 들여다볼 수도 없는 분야이기도 하다. 이걸 어떻게 대비하면 좋을지 실은 나도 자신이 없다. 지금으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원칙은 두 가지.


첫째는 일단 사랑을 듬뿍 주면서 사랑받는 경험을 단단히 만들어주는 일이다. 사랑을 듬뿍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나는 썩 괜찮은 사람이며 누군가에게 부당한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믿음을 가지게 될 거라는 걸 믿어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틈만 나면 아이들과의 애정행각에 여념이 없다. 하루에도 여러 번, 그냥 꼭 안은 채 토닥토닥 시간을 보낸다. 사랑한다는 말은 느끼해서 잘 못하는 편이지만 아이들에게만큼은 예외로 늘 엄마가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사랑에 이유도 붙이지 않는다. 사랑은 네가 특별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걸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엄마는 그냥 네가 좋아서 죽을 것 같아.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실제로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다.) 하트가 난무하는 현장을 반려인은 눈꼴시다며 느끼해한다. 커가면서 이렇게 모자간에 서로 죽고 못 사는 시간은 서서히 줄겠지만 그래도 세상에 한 곳쯤은 기댈 곳이 있다는 믿음, 그 한껏 사랑받은 경험으로 아이들은 세상에 나가 부딪히고 살아볼 힘을 얻지 않을까. 내가 비빌 보드라운 언덕이 있는 사람은 쉽게 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믿어보고 싶다. 앞으로 쌓아갈 안 보이는 상처에, 안 보이는 힘으로 보호막을 쳐두고 싶은 그런 마음.


둘째는 상처를 서로 보이고 안아주는 연습을 하는 일이다. 아이들이 나를 슬프게 하거나 상처를 주면 그냥 말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내 상처를 드러내는 걸 굉장히 불편하게 여기고 살아왔기에 만만치 않다. 하지만 내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연습을 하는 일, 그렇게 감정의 말과 용서의 말들, 치료의 언어들을 배우고 연습하는 게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일에 꽤 담담한 편이지만 슬픔을 느끼는 회로가 약간 미쳐있는 프로오열러인 나는 (이 두 가지의 공존이 가능합니다 여러분) 뉴스를 보다가도 그냥 가만히 있다가도 잘 우는 편인데, 내가 그렇게 조용히 울고 있으면 아이들이 다가와서 때록때록한 눈으로 묻는다. 그러면 질질 우는 못생긴 얼굴로 뭐가 나를 슬프게 했는지, 왜 속상한지, 아이들에게 설명한다. 아이들은 엄마가 왜 우는지 이해는 잘 못하지만 걱정스러운 눈으로 눈물도 닦아주고 조그만 팔로 토닥토닥도 해 준다. 고마워, 지음이가 안아줘서 엄마 기분이 나아졌어. 고마워, 이음이가 뽀뽀해줘서 엄마 눈물이 쏙 들어갔어. 그렇게 슬픔은 나누면 꽤 나아진다는 것, 슬픔의 이유를 잘 이해하진 못해도 위로는 가능하다는 점을 아이들이 알기를 바란다.


이런 연습과 대화들을 통해 천천히 알려주고 싶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내 맘 같지 않기에, 그리고 때로는 내 맘을 나도 모르겠기에,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상처를 주고받게 된다는 점을. 살다 보면 상대에게 실망을 주기도 하는데, 그게 딱히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도 그냥 자연스럽게 일어나기도 한다는 점도. 하지만 다행히 세상에 진심이 통하지 않는 영역은 드물다는 점을 아이들이 알게 되길 바란다. 그러므로 내가 만든 상처가 있는 곳에는 어렵더라도 늦지 않게 반드시 진심을 들고 가기를. 진심과 진심이 만나면 좋겠지만 또 세상이 그런 것만도 아니어서, 당사자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지 못하더라도 타인의 진심으로 일어설 힘이 생기기도 한다는 점도 알게 되기를. 우리가 이 상처 가득한 세상에서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건 그런 다정함들 덕분이고, 이 세상에 너희들의 다정함이 소복하게 쌓이기를 바라는 엄마의 마음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너와 나의 상처들


돌아보니 나에게 그저 아프기만 한 고통은 없었다. 많이 아프고 나면 단단해졌다. 마음이 썩을 대로 썩어 문드러지고 나면 눈물이 촉촉했던 그곳에 작은 꽃밭이 생겼다. 그러니 어른이든 아이든 상처를 너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아마 그 상처로 인해 자라날 수 있을 것이다. 고통이라는 것은 내 안의 무언가를 깨뜨리고 껍질을 부수는 것이다. 씨앗도 싹을 틔우려면 먼저 부서져야 한다. 그러므로 고통을 없애려고만 하지 말고,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건강히 부서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건 나에게서 뭔가 싹이 트는 순간일 수도 있으니까.


다치는 걸 너무 두려워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내 아이들이, 다칠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면 시속 1미터의 속도로든 네 발로 기어서든 그리로 가봤으면 좋겠다. 간디는 실수할 자유가 없는 자유란 가치가 없다고 했다. 자유라는 건 원래 그렇게 실수의 공간을 넉넉하게 품고 있는 개념이다. 그러니 자유롭게 다쳐보고 실수해 보고 하나씩 배워서 일어났으면 좋겠다. 안 되는 게 되는 거라고 믿는 낙천적인 마음이 단단하게 안에 뿌리내리고 있으면 좋겠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쓴 사뮈엘 베케트는 이렇게 말했다. “또 실패했다. 이번에는 좀 더 세련되게.” 오늘도 망했지만 좀 더 멋지게 망했다는 사실에 뿌듯할 수 있으면 꽤 성공한 인생이다. 사실 내가 뭔가에 성공하고 실패하는 일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놀랄 만큼 관심이 없다. 나는 이 사실을 내 아이들이 반드시 기억했으면 좋겠다. 이 사실을 체득하면 아이들의 평균수명이 1년은 늘어날 거라고 믿는다.


사람마다 필요한 용기의 양이 다르다는 점도 알았으면 한다. 누군가를 함부로 겁쟁이라고 답답이라고 속단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보다 용기가 많이 필요한 사람이 한 발을 내디뎠을 때는 그 한 발이 그저 느린 한 발, 보잘것없는 한 발이 아니라 남들보다 훨씬 더 용감한 한 발임을 알았으면 좋겠다. 똑같이 상처를 입어도 누군가는 금방 회복되지만 누군가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사실을 알고, 오래 쓰다듬으며 기다려줄 줄도 알았으면 좋겠다. 때로는 함부로 위로를 건네는 일이 상처가 되기도 한다는 걸 나도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위로에 영 서툴었던 자로서 발견한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냥 서툰 채로 옆에 가만히 머물러주는 게 오히려 꽤 괜찮은 위로가 된다고 하더라. 세상의 많은 일에 정답이 없듯이 아픈 마음에도 정답이 없다. 조언이 필요한 아픈 마음도 있지만, 때로는 그 아픈 마음에 어떤 답이 필요한 게 아님을 알고 그냥 가까이에 조용히 머물러주는 지혜를 가졌으면 한다.  


여든셋인 배우 김영옥 선생님께, 이제껏 살아오신 경험을 바탕으로 한 마디만 당부한다면 어떤 말씀을 하시겠냐고 묻자 "남에게 상처 주지 말고 살아."라고 하셨다. 나는 나의 아이들이 내가 상처 받는 것은 두려워하지 말되,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반드시 두려워하기를 바란다. 남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용서를 구하도록 가르치고 싶다. 미안하다는 말은 언제고 늦는 법이 없으니, 뒤늦게 깨닫게 되더라도 꼭 마음을 전했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기면 그들의 보이는 상처를 보듬어 주고, 안 보이는 상처를 껴안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엄마가 어떤 방식으로든 상처를 주었다면 부디 용서해 주기를 바란다.


우리는 모두 다친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식을, 어른은 아이를, 선배는 후배를, 다정한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자식은 부모가, 아이는 어른들이, 후배는 선배가, 뭘 모를 수도 있고 다칠 수도 있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점도 알고 이해해 줘야 한다. 서로의 상처를 흠이 아니라고 여겼으면 좋겠고, 도전하다가 상처 입은 존재들을 서로 안아줄 수 있으면 좋겠다. 상처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이렇게 담대하고 따뜻한 것이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이 말을 꼭 덧붙여야겠다. 다친다는 건 무엇이며, 그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자세는 어때야 하는지는 사실 단언하기 어려운 문제다. 가정마다 아이마다 갖고 있는 상처들의 깊이와 그늘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크게 불편한 곳이 없는 건강한 아이를 전제로 글을 썼다. 그래서 아픈 아이를 가진 부모 혹은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는 한 문장 한 문장이 상처가 될 수 있음을 안다. 세상에는 돌이킬 수 없는 내상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가 있을 것이고, 너무 아픈 상처를 받아 힘겹게 버티는 아이도, 회복할 수 없는 상처로 부모 곁을 떠난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부모들에게는 다치는 것, 상처라는 것의 무게가 지금껏 전개해 온 글을 모두 납작하게 눌러버릴 만큼 크다는 것을 안다. 그런 아픔과 무거움에 대해 감히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므로 단 한 마디라도 얹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아픈 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 말로 할 수 없는 존경의 마음을, 아이를 잃은 부모들에게는 조심스러운 기도의 마음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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