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휘슬'에 기고한 글의 일부입니다
이진민
정치철학박사. 작가.
학창 시절 내내 체육 ‘수’ 받기가 소원이었다. 졸업 전에 드디어 소원을 이뤘을 때는 반 친구들이 파티를 해줬다. 서른 가까이 되고 외국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내 몸이 생각만큼 몹쓸 물건이 아님을 깨달았다. 한때 와생동물이 꿈이었고 지금도 대체로 누워있지만 이제는 사지육신 움직이는 것을 꽤 좋아한다. 코로나로 집에 갇혀 있는 동안 난생처음 복근님을 만나 뵙고 근육 인간으로 하찮게 진화 중.
생각하는 사람은 근육질이다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이름의 조각이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바위 위에 앉아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사람을 조각한 로댕의 작품. 철학을 표현하는 대표 이미지로도 널리 사용된다. 원래는 단테 <<신곡>> 지옥편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지옥문>의 일부인데, 너무 유명해진 나머지 이것만 따로 실물 크기의 작품이 28개나 더 제작되어 세상 여기저기에서 턱을 괴고 생각 중이다. 원래 제목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인>이었다. 단테의 작품을 형상화한 것이니, 입 맞추고 추락하고 웅크린 채 엉켜있는 그 수많은 육체들 위에 고뇌하는 시인인 단테를 올려 둔 걸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설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effete’한 단테의 육체가 저렇게 영웅적으로 근사하게 표현될 리 없다는 반론을 제기했다고 한다. ‘effete(이휘잇-트라고 읽는다)’라는 단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남성에 사용될 때는 ‘정력적’이란 형용사의 반대 개념 정도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단테 입장에서는 정력적으로 싫어할 반론이다. 인스타가 없던 시절의 단테는 바디 프로필 사진을 올릴 기회가 없었고 우리는 긴 망토에 가려진 그의 몸이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 잘 알지 못한다. <시인>이라는 제목이 <생각하는 사람>으로 바뀌고서도 사람들은 생각하는 사람이 너무 육체파가 아니냐는, 상당히 귀엽고도 문제가 많은 질문을 농담처럼 던져왔다. 생각하는 사람, 철학자들은 근육질의 몸과 안 어울린다는 얘기다. 모르긴 몰라도 순두부 같은 말랑말랑한 몸에서 그토록 순두부처럼 유연한 사고가 나온다는 얘긴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하는 사람은 근육질이면 안 되는 걸까.
소설 같은 곳에서 묘사되는 소위 먹물이라는 사람들의 외양은 일단 허옇고 부드럽다. 논밭에서 산에서 바다에서 구릿빛으로 몸을 물들이고 힘들게 몸 쓰며 일하지 않는 사람들. 상대적으로 근육이 적기는 했을 테다. 그렇지만 철학자들이 과연 그렇게 와생동물이나 강장동물의 외형을 가졌을까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닐 것 같다. 철학자의 대표 주자로 거론되는 테스 형은 배불뚝이였다는 게 통설이지만, 석공 출신의 단단한 몸에 비범한 풍채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나 고르기아스 같은 그리스의 많은 철학자들은 실제로 전쟁에 참여한 군인이기도 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크세노폰은 페르시아 원정을 지휘했던 장군이었고, 그가 남긴 원정기는 나중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원정을 떠날 때 참고서로도 쓰였다. 우리에게 꽤 이름이 알려진 철학자 플라톤(Plato)도 육체파였다. 뉴욕 타임스에서 재미있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플라톤의 원래 이름은 아리스토클레스였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플라톤은 그리스어로 ‘(어깨가) 넓은’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영단어 broad와 Plato의 영어 발음이 슬쩍 유사하다.) 그는 젊은 시절에 아주 재능 있는 레슬러였는데, 명문가의 젊은이가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이 유서 깊은 이름을 두고 그의 레슬링 코치가 그를 플라톤, 즉 넓은 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넓디넓은 어깨를 위시한 그의 피지컬이 엄청났음을 짐작할 수 있는 얘기다. 도대체 얼마나 넓었으면 넓은 놈이었을까. 플라톤이 레슬링에 일가견이 있었다면 데카르트는 펜싱에 대한 논문을 쓸 만큼 펜싱 실력이 상당했다고 한다. 걷기를 좋아했다는 루소나 소로나 칸트도 있다. 특히 루소는 마차를 마다하고 늘 걸어 다녔다고 한다. 신성을 모독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감옥에 수감된 동료 철학자 디드로를 방문하기 위해 파리에서 벵센까지 10여 킬로미터나 되는 길을 늘 걸었고, 한 번은 2주 걸려 파리에서 제네바까지 480킬로미터를 걸은 적도 있다고 한다. 족저근막염 걸리지 않도록 제대로 된 신발을 신고 걸었어야 할 텐데. 이렇게 격렬하게 걸어 다니는 사람이 순두부일리가 없다.
사실 그들의 몸이 근육질이었느냐의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고, 중요한 건 철학과 몸의 상관성이다. 나는 철학은 결국 몸으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홉스가 아무리 근대성에 관한 놀라운 통찰을 해냈어도, 보부아르가 아무리 인간 존재와 여성에 관한 날카로운 영감을 건져 올렸어도,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글로 써내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들을 철학자로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어쩌다 얻게 된 남사스럽기 그지없는 이름이 철학자와 작가인데 적어도 내게는 생각하는 일과 글 쓰는 일은 둘 다 몸으로 하는 거다. 몸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누워 있을 때 격렬하게 좋은 생각들이 앞다투어 픽미업을 외쳐도 정작 손가락을 움직여 그것들을 잡아두지 않으면 그놈들은 마치 하교종을 들은 학생들마냥 신나게 흩어진다. 영감이란 것도 무작정 책상 앞에 찐 감자처럼 앉아있을 때보다 샤워든 산책이든 담백하게 몸을 움직일 때 더 잘 찾아온다. 그러므로 생각도 글도, 몸이 긴밀히 따라줘야 한다.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나는 걸어 다녀야만 명상을 할 수 있다. 걷기를 멈추면 생각도 함께 중단된다. 내 정신은 반드시 다리와 함께 움직인다.” 니체도 "진정 위대한 생각은 전부 걷기에서 나온다"고 했단다. 유학 시절 생각이 막히면 달밤에라도 뛰쳐나가 찰스 강변을 걸었던 나는 저들의 말을 꽤 이해하는 편이다. (‘이해하는 편’이라고 다소 유한 표현을 쓴 이유는 세상에 몸을 편하게 움직일 수 없는 작가와 철학자들도 많기 때문이다.) 걸으면 생각이 맑아진다. 걷는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하면 왠지 몸도 마음도 찌뿌둥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중략)
나는 원래 하찮은 걸 좋아한다. 하찮아야 오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아이패드에 기억도 없이 하나 깔려 있던 운동 앱을 열어서, 가볍게 짜인 운동을 하루에 하나씩 따라 했다. 그러므로 하루에 10분, 많으면 15분이었다. 할 일 많은 애엄마가 30분 넘는 운동을 매일매일 느긋하게 한다는 게 가능할 리가 없으니, 나의 하찮음은 사실 전략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 작은 것도 꾸준히 쌓이면 뭐가 되는구나 싶은 게, 말랑말랑하던 두부살 안에 뭔가 딱딱한 게 조금씩 만져지더니 보보보보복근이란 것이 생기고 말았다. 아유 처음 뵙겠습니다. 인생 살면서 한 번쯤은 만나고 싶었어요.
몸에 근육이 붙는다는 건 정말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처음엔 온몸에서 아우성이었다. 내가 네 몸에 몰래 들어있었는데 왜 나를 찾아내고 난리냐고. 하지만 그 아우성은 곧 간질간질한 뻐근함으로 바뀌었고, 이내 운동을 하지 않으면 몸이 찌뿌둥하고 근질거리는 신묘막측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시간이 쌓이자 내 몸은 빨라지고 단단해졌다. 도망치는 자식놈들 잡으러 갈 때 스피드가 생겼다. 20킬로짜리 아이들을 한 팔에 하나씩, 두 놈을 한 번에 안고 집안을 돌아다닐 수도 있게 되었다. 그렇게 이백일, 삼백일을 지나 나는 지금 348일째 꾸준히 운동 중이다. 어린이용 접이식 놀이 매트 위에서 운동하고 집에 딱 하나 굴러다니는 4킬로짜리 덤벨로 하찮게 운동하기 때문에 이게 뭐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뭐 어떠랴. 기분이 좋은데. 운동이 좋아지니 운동 시간이 살짝 늘었다. 근육 운동과 요가 기본 동작을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더 당기는 놈으로 하고, 아주 하찮은 스트레칭과 하찮은 덤벨 운동을 하면 30분 정도. 거기에 원래 나의 기본 루틴이었던 산책을 빼먹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덤벨 운동은 완두콩을 삶거나 빵을 구우면서, 즉 부엌에서 냄비나 오븐을 바라보면서 깔짝깔짝 하는 편이다. 이런 하찮음이 모여 위대한 기분을 선사한다. 그러니 하찮음을 하찮게 보지 말자.
내가 처음 생각의 전환을 하게 된 후로 어림잡아 15년이 지났다. 2020년이 넘어 이제는 전국적으로 근육 열풍이 불고 있으나 여전히 여성의 몸은 예뻐야 하는 것 같다. 바디 프로필을 찍었을 때 여성스럽고 예쁜 근육들을 적절한 만큼만 만드는 데 초점이 주어진다. 여전히 우리는 생각의 감옥에 들어앉아 있는 건 아닐까.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라는 실로 우아하고 호쾌한 소설을 쓴 김혼비님이 말씀하셨다. ‘보여지는 몸’보다 ‘기능적인 몸’을 보다 더 욕망했으면 좋겠다고. 최근 그분의 글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읽었다. 자신의 몸을 소개해보라는 말에 대체로는 ‘다리가 가늘고 곧게 뻗은 편이다, 쇄골이 예쁘다’ 같은 겉모습과 관련한 답이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지만, 운동을 즐기고 꾸준히 해 온 사람들은 ‘팔굽혀펴기를 열한 개까지 한다, 자전거를 시속 20킬로미터로 탈 수 있는 다리다’ 같은, 주로 몸의 기능에 집중한 답을 들려준다고. 내 몸을 보여지는 것으로 인식하느냐, 기능하는 몸으로 인식하느냐의 차이. 바로 중요한 생각의 전환이고 몸의 전환이다. 나는 아직 레벨이 낮아서 내 몸을 ‘보이는 몸’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슬슬 내 몸이 할 수 있는 기능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꼽아가고 있다.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데 사랑은 많은 부분 몸으로 한다. 감사하게도 크게 불편이 없는 몸으로 살고 있기에, 내 몸으로 할 수 있는 사랑을 많이 하며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을 더 많이 안아주고 더 많이 업어주고, 가능한 목말도 많이 태워주고 싶다. 반려인에게만 무거운 장바구니를 맡기지 말고, 내가 마실 술은 내가 번쩍 들고 계단을 오르고 싶다. 나는 공부라는 건 사랑스러운 것들을 더 잘 사랑하기 위해서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운동도 마찬가지다. 사랑스러운 내 아이들을 더 잘 사랑하기 위해서, 든든한 버팀목인 반려인을 내 방식대로 더 잘 사랑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내 삶을 더 잘 사랑하기 위해서. 불혹을 훌쩍 넘어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나는 지금의 내 몸을 가장 좋아한다. 엄마가 되느라 내려앉고 벌어지고 칼자국마저 난 몸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가볍고 단단하고 스스로 강하다고 믿는 그런 몸.
여전히 대체로는 누워있는 걸 좋아하지만, 그래도 나는 근육질의 사람이 되고 싶다. 생각의 근육과 몸의 근육을 부지런히 키우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지금도 이 글을 마치면 운동화를 챙겨 신고 산책을 나갈 생각이다. 사실 이 글의 초안도 산책하면서 잡았다. 홉스는 산책하다가 떠오른 생각을 기록할 수 있도록 잉크병을 넣을 수 있는 산책용 지팡이를 특별히 주문 제작했다고 한다. 나에게는 고맙게도 스티브 잡스가 주고 간 아이폰이 있다. 오늘은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는 동안 또 무슨 생각들이 떠오를지, 다리도 뇌도 근질근질하다.
매거진 휘슬은 'Hybrid Magazine for Sport and Life'라는 설명이 붙은, 스포츠 정신 가득 담긴 잡지입니다. 개인적으로 휘슬이라는 이름이 진짜 멋진 것 같아요.
쨍한 예쁜 색감(직접 보면 형광색에 가깝습니다)의 창간호 주제는 롱런(LONG RUN). 세상 모든 이들이 삶을 자신의 리듬으로 롱런하며 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합니다. 배우 최희서 님과 가수 요조 님의 인터뷰를 재미있게 읽었고, 필진들의 다양한 글 속에서 '러닝메이트'라든가 '트랙', '부상' 같은 단어들을 삶에 대입해 보는 즐거움을 얻었습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달리기'에 대해서 생각해 본 것도 좋았고요.
P. 29 정말 좋은 운동선수들은 경기 날의 날씨며 환경을 탓하지 않는다고 해요. 이 글을 보고 <아워 바디> 대본에 적었어요. '배우도 환경을 탓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죠. - 배우 최희서
P. 35 빗속을 잠깐 뛰면서 앞으로도 계속 달리려면 참 갈 길이 멀겠다고 생각하는데 웃음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절망적이었는데, 이상하게 신이 났다. - 뮤지션/작가 요조
P. 50 내가 무언가를 계속할 수 있는 힘은 '계속 하기'뿐만 아니라 '안 하기'를 선택하는 데에 있다. 오래 달리기 위해서는 내가 달리기 어려운 트랙 밖으로 나오는 게 필요하다. 이러한 단절이 오히려 새로운 트랙을 열어줄 수 있다. - 뉴웨이즈 대표 박혜민
노란색 옷을 입은 두 번째 휘슬은 전환(TRANSITION)이라는 주제를 달고 있습니다. 저는 생각의 전환과 몸의 전환에 대한 글을 썼고요. (여기 올린 글엔 공교롭게도 전환의 순간에 관한 부분은 다 생략되어 있지만요.) 앞으로도 휘슬이 롱런해서, 세상에 내는 경쾌하고 멋진 호루라기 소리를 계속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운동합시다. 운동하면 기분이 좋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