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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Dec 19. 2023

청혼

마흔아홉 번째 시

2023. 9. 12.

진은영, '청혼' -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중에서


[청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아이가 사랑을 담아 그려준 돌입니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해 줄게(아니 세수는 안 하나요).

하늘의 별도 달도 따다 줄게(어이쿠 지구가 멸망하겠는데요).

이런 빛나지만 허무맹랑하고 텅 빈 청혼이 아니라 이렇게 작고 조심스럽고 소박한 약속들이 청혼의 말들이어야 하지 싶어요.

 

   사랑은 참 어렵지요.

나는 보석을 줬지만 그건 가짜 보석이었다고 외치는 상대방, 나는 돌멩이를 줬는데 보석이라며 아끼는 상대방. 사랑에 관해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마음이라는 것은 거의 기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과거에도 미래에게도 아첨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의 본질인 것 같아요. 우리 그때 참 좋았었지, 우린 오래오래 행복할 거야, 이런 말 같은 거요.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가 마음에 착 달라붙었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라는 부분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이 부분에서는 말문이 막혔고요. 나는 과연 이런 사랑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니 머쓱해지네요.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라는 구절을 눈에 담고 있으려니 제가 예전에 쓴 '마흔'이라는 글이 떠올라 조금 가져와 봅니다. 오래된 거리를 사랑하는 일은 광채가 아닌 윤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닐까 싶어서요.


   사랑과 삶을 포갠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음을 알게 된다. 인간들은 사랑만을 찬양했지, 그것이 삶의 영역으로 들어갔을 때 어떻게 모양이 바뀌는지를 노래에 담아 읊지 않았다. 너와 그토록 함께 하고 싶었던 일상이, 휘황하던 사랑의 광채를 깎는 것을 본다. 일상에 깎여 사랑이 빛바래는 것처럼 보여도 슬퍼할 것 없다. 이제는 광채 대신 윤이 날 시간이다. 반들반들 세월에 닦여야만 나는 은은한 빛. 광채는 자연적으로 나는 것이지만 윤은 사람이 부지런히 내는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광채가 나지 않는다고 슬퍼하지 말고, 내 손에 헝겊을 들고 매일 조금씩 말갛게 닦아야 한다. 그럴 때 그 안의 소중한 알맹이는 여전히 아름답게 빛난다.

  

   오래된 거리는 편안하고 사랑스럽죠. 아니, 편안함과 익숙함은 때로는 사랑보다 힘이 세기도 합니다. 젊은 연인들일수록 이 문장을 슬프게 여길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슬프다기보다는 사랑의 모양이 바뀌는 거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만. 어쨌든 '오래된 거리'라는 말에서 우리는 정겨움이나 편안함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오래된 거리는 내가 알던 그 거리가 아닐 수도 있어요. 시간은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마법을 부리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그러므로 그 오래된 거리가 어떤 모습이든 그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거니는 일. 해가 눈부신 날에도 빗방울이 떨어지는 날에도 기꺼이 그 거리를 거닐며 가끔은 그 거리에 놓인 쓰레기들을 손에 담는 일. 제게는 결혼 생활을 제법 하고서야 비로소 얻은 유리알 같은 깨달음인데, 청혼의 마음이 어찌 이렇게 지혜로울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종소리도 축포 소리도 아닌, 별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또 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작은 점 하나가 찍혀 하늘과 땅의 작은 웅성거림을 다 담네요. 결혼은 그렇게 반짝이는 별들의 웅성거림과 부지런히 일하는 벌들의 웅성거림을 고루 담는 일이어야 할 것입니다.   


  인류가 아닌 단 한 사람을 위해 쓴 잔을 죄다 마시는 일, 각오가 되었을까요?
  사랑은 물컵에 담겨 있는 투명한 유리조각 같은 것, 그러므로 그것을 약속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슬픔이겠죠. 마지막 행이 아름답게 할퀴며 반짝입니다.  
 

  모두 오래된 거리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고 계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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