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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Nov 05. 2024

<언니네 미술관>을 내면서

   책이 나온 지 한 2주 정도 된 것 같은데 여기저기에서 반응이 오는 것을 보면 신기하고 감사한 마음이에요. 다들 참 부지런히 읽어주시는구나 싶어 요즘 독서량이 형편없는 저로서는 반성도 되고 부럽기도 하고요. MBC 라디오 북클럽에서 출연 제의를 주신 걸 보면 (순간이동술 수행을 게을리하여 가지는 못했습니다만) 몹쓸 책을 낸 건 아닌가 보다 싶어 조그맣게 안심이 됩니다. 이번 책에 실린 저자의 말과 목차를 이곳에 계신 분들과 나눕니다.  



   저자의 말


   한 일간지 신춘문예 당선작이었던 시를 나누면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우유 따르는 여인을 보내준 지인 있었습니다제가 정말 좋아하는 그림인데 시를 읽으니 떠올랐어요, 하면서이 책의 구체적인 시작은 아마 거기에 있었을 것입니다실제로 페르메이르의 그림이 든 사소함익숙함하찮음은 이 책을 쓰기로 마음먹고 가장 먼저 쓴 부분입니다그림 안에서 졸졸 흐르는 우유를 보고 있으니 쓰고 싶은 이야기가 졸졸 흘러나왔습니다빵 냄새와 아침 햇빛과 차가운 공기우유를 따르는 손과 거기에서 흘러내리는 우유에 관해 쓰고 싶었습니다밝은 곳에서든 어두운 곳에서든 늘 우유를 따르는 단단한 손에 관해그리고 하염없이 흘러나와 무언가를 적시는 우유에 관해

그 지인 님이 인스타 스토리에 올려주신 증거자료 :)

   꽤 오래전부터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그림을 하나둘씩 모으고 있었는데그림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내가 밑줄을 가장 진하게 그어가며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이구나그간 모은 그림들은 모두 이 우유에 적셔져야 하겠구나하고요딱딱하게 굳은 빵에 우유를 적셔 부드러운 죽이나 브레드 푸딩을 만들려는 저 손처럼세상이 조금은 쌀쌀하더라도 어김없이 우리를 비추는 햇빛 안에서 이 세상의 차갑고 딱딱하고 갈라진 것들을 조금씩 적셔보려는 글을 쓰고 싶다고요그렇게 소박하지만 든든하고 따뜻한 아침 식사를 닮은 책을 만들고 싶다고요정작 글을 쓰면서 우유보다는 맥주와 와인에 저를 적셨던 것은 비밀로 하고 싶습니다

가장 왼쪽이 글 쓸 때의 기본 세팅. 와인 한 잔 따르고 땅콩 캔은 손 넣기 쉽게 눕혀둡니다. 모아 놓으니 정말 주정뱅이 같군요.


  《언니네 미술관》은 동료 여성들즉 세상의 딸들에게 건네고 싶은 말을 담은 책입니다여성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것은 그대로 남성들에게도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됩니다우리는 이 세상의 약 절반씩을 차지하며 함께 걷고 있으니까요원래 이 책의 가제는 '세상의 딸들을 위한 미술관'이었습니다그래서 책 안에는 딸들이라는 말이 제법 등장합니다어린아이라기보다 그냥 세상의 모든 여성을 지칭하는 말로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여성여인여자보다는 관계성을 내포하는 ‘딸들이라는 말의 어감이 더 따뜻하고 좋아서 책 안에 자주 사용했습니다미술관이 붙는 이유는 그림을 함께 보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형식의 책이기 때문입니다제 전작인 《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 이용법》이 미술을 매개로 한 철학 이야기였다면이 책은 미술을 매개로 한 여성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미술관 자매책 

   꽤 오래전부터 세상의 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그림 이야기를 하나씩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미술과 여성을 묶은 좋은 책들이 워낙 많아 제가 무슨 이야기를 더 새롭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길었습니다예상 가능한 그림들로 예상 가능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제 고민이 좀 뾰족해졌다고 생각한 지점은 단어입니다함께 살펴보고 싶은 단어를 골라서 거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모든 단어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조그만 단어 안에 얼마나 커다란 이야기가 들어 있는지그 안에 인간 희로애락의 퇴적층이 수세기에 걸쳐 얼마나 두껍게 쌓여 있는지 생각하면 새삼 놀랄 때가 있지요. 그렇게 단어가 담는 수많은 이야기 중에서 세상의 딸들이 함께 나누면 좋을 이야기들을 골랐습니다. 아들들이 되돌아봐 주었으면 하는 단어와 그 안의 이야기도 담았습니다우리의 앞에서 걸었던 수많은 여성들이 쌓아 둔 희로애락의 퇴적층을 선명히 볼 수 있는 단어들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단어에 든 이야기가 그림에서 솟아나는 이야기를 만나면 훨씬 더 다채롭고 풍부한 이야기가 태어나리라는 믿음으로, 단어와 그림을 서로의 곁에 놓았습니다.


   단어의 목록이 길었는데 결국 아홉 개로 추려졌습니다인간의 가장 본질적이고 무해한 감정인 슬픔',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믿는 서투름’, 가장 중요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사소함익숙함하찮음은 크게 바라볼 것이라는 이름을 붙여 책의 중앙에 넣었습니다이 셋은 모두 힘에 관한 단어들입니다슬픔의 힘서투름의 힘사소함과 익숙함과 하찮음의 힘세상의 딸과 아들들이 부디 이 힘을 깨닫고 작지 않은 것소중하고 귀한 것으로 곁에 두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습니다쉥크의 어미양과 함께 슬퍼해주기를야코비데스의 아이들 앞에서 함께 미소를 지어주기를페르메이르의 우유 따르는 여인과 그녀의 앞치마를 오래 바라봐주기를 바랍니다


   그 앞에는 다시 바라볼 것이라는 이름으로 그간 여성 희로애락의 퇴적층이 뚜렷한 무늬를 새겨온 세 가지 단어, ‘근육마녀그리고 거울을 골랐습니다그러므로 책의 구성은 과거에서 현재미래 쪽으로 어렴풋하게 선을 긋는 방향입니다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가장 첫 부분을 담당하는 다시 바라볼 것은 신나는 작업이기도 했지만 단연 가장 무겁고 어려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여자인 저는 고유명사고 여성은 일반명사이기에사실 여성인 저도 여성의 이야기를 쓴다는 게 벅찼습니다하지만 이 단어들을 되돌아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눌러 담아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가르바티와 코튼의 작품을 골랐고조금은 밝아지는 마음으로 보티첼리와 워터하우스의 연작을 담았습니다.


   

마지막으로는 함께 바라볼 것으로 직선과 곡선’ ‘앞과 뒤’ ‘나와 너를 각각 둘씩 손을 잡은 모양새로 하나씩 앉혔습니다쉽게 나누지 않는 마음과 보이지 않는 것을 살피는 마음홀로 있음으로 해서 더 아름답게 함께 있을 수 있다는 믿음에 관해 썼습니다마치 이 부분을 쓰라고 그려준 듯한 마케와 마그리트의 그림들을 담았고김환기와 김홍도그리고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손이 만들어 낸 작품들 앞에서 저도 오래 서 있었습니다책의 가장 앞에서 혼자 생각에 잠겼던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브랑쿠시의 껴안은 연인들로 마무리되는 느낌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앞서 언급한 크게’ 바라볼 것들과 다시’ 바라볼 것들이 함께’ 바라볼 것에서 다시 합쳐지는 느낌을 받으신다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처음에 단어 목록을 만들면서 우리 일상에서 너무 대놓고 여성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단어들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그런 단어를 고르더라도 쓰다 보니 글이 슬쩍 그리로 기울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다만 이런 주제를 처음 접하는 분들을 상정하고 썼습니다누구에게는 글이 너무 순한 맛이고누구에게는 너무 매운맛이겠지요그래도 맛있기를소화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미술관이라는 제목을 붙였기에 바라볼 것들을 나열해 놓았지만, 그저 바라보는 데서만 그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슬쩍 담아봅니다


   어찌 보면 아홉 개의 단어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써 놓고 보니 이야기들이 비슷한 곳을 바라보며 하나로 모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그만큼 반복해서 말하고 싶었던 지점을 함께 바라봐주신다면 기쁘겠습니다무엇보다 원고를 쓰면서 많은 미술 작품들 앞에 가만히 서서,  자신도 자주 위로를 받았습니다부족한 제 글이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지 못하더라도부디 이 안에 골라 담은 작품들이 세상의 딸들과 아들들에게 힘과 위로를 주기 바라는 마음입니다

 

   초기의 글들을 보고 더할 나위 없이 좋다며 이대로만 쓰라고 다정한 말로 안심시켜 준 이윤주 작가님 (당시에는 이 책의 편집자님) 덕분에 계속 이어서 쓸 수 있었고시원스럽게 이끌어주시고 늘 놀라운 작업 속도로 저를 감탄시킨 (때로는 좋은 의미로 기겁하게 만든) 김진주 편집자님 덕분에 이렇게 책으로 낼 수 있었습니다삐걱거리며 추천사를 부탁드렸을 때 '저 너무 좋은걸요'라는 일곱 글자로 저를 극락에 직배송시켜 주신 김소연 시인께는 시인의 《마음사전》에서 배운 흠모의 뜻을 그대로 전합니다

 

   조카딸이 넷 있습니다지구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성원이재연이은재와 래아에게 미안하고 애틋한 마음 전하고 싶습니다

 

   저자 이진민


목차


PART 1. 다시 바라볼 것들


1장. 근육-명사가 아닌 동사로 살아가기 위해

근육과의 거리두기 | 플라톤의 동굴 밖으로 나온 죄수 | 보티첼리의 비너스에게도 복근이 있다 | 연두부에서 단단한 두부로 | 보이는 몸과 기능하는 몸 | 우리 모두에게는 근육이 필요하다


2장. 마녀-이 단어에 무엇을 담아왔는가

딸들에게 불친절한 세상 | 가르바티, 메두사의 억울함에 답하다 | 슈투크의 그림 속 메두사의 눈동자 | 닥치거나 미치거나 | 워터하우스가 그린 키르케의 변화 | 우리 안의 마녀


3장. 거울-우리의 상(像)은 어디로 수렴하는가

반사와 반영의 사이 | 하디와 뭉크, 두 개의 거울 | 다정하지만 무례한 슬픔 | 시간의 두 얼굴,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 윌 코튼의 아이스크림 동굴 | 명령하는 자는 누구인가 | 몸보다는 몸가짐 | 들뢰즈의 아장스망, 그리고 외로


PART 2. 크게 바라볼 것들


1장. 슬픔-인간의 가장 무해하고 본질적인 감정

무성한 슬픔 | 오귀스트 쉥크의 어미 양 | 슬픔을 묻는 일 | 월터 랭글리, 슬픔이 슬픔에게 | 가장 무해하고 맑게 자리하는 것 | 슬픔은 힘이 세다 | 그늘을 읽는 일


2장. 서투름-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

야코비데스의 아이들 | 서투름이 빛나는 이유 | 매끄러움의 이면 | 기술은 다정하고 도덕적일까 | 고흐와 밀레의 아름다운 격려 | 루소, 서투름의 철학 | 더 용감해지고 더 너그러워지는 우리


3장. 사소함, 익숙함, 하찮음-결코 사소하고 하찮지 않은 것

사소함의 단단함 | 결코 사소하지 않았던 이름, 엄마 | 페르메이르, 익숙함의 아름다움 | 그림 속 빛나는 푸른 치마의 의미 | 하찮음이라는 열쇠


PART 03 함께 바라볼 것들


1장. 직선과 곡선-나뉘었으나 나뉘지 않은 것들

직선과 곡선의 이분법 | 아우구스트 마케, 직선의 그림과 곡선의 그림 | 우로보로스의 세계 | 청자 베개가 건네는 말 | 이분법의 마음과 사이의 마음 | 김환기가 전하는 지혜


2장. 앞과 뒤-보이는 것 너머를 보는 일

뒷모습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 마그리트의 그림과 거울 속 내 뒷모습 | 진실은 앞이 아니라 뒤에 | 시선의 범위 | 에른스트와 뒤집어 보는 사람들 | 뒤는 새로운 앞이 되고


3장. 너와 나-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에 서는 일

어디에 누구와 함께 | 브랑쿠시의 연인들, 갈라진 두 쪽 | 스며들고 침범하는 우리 | 마그리트의 연인들과 ‘이해’라는 환상 | 김홍도, 사이에 부는 바람 | 사람이 어디 한 겹이야? | 달과 물과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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