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세 번째 시
2024. 12. 13.
정한모, ‘새벽 1’
새벽은
새벽을 예감(豫感)하는 눈에게만
빛이 된다.
새벽은
홰를 치는 첫닭의 울음소리도 되고
느리고 맑은 외양간의 쇠방울 소리
어둠을 찢어 대는 참새 소리도 되고
교회당(敎會堂)의 종(鐘)소리
시동(始動)하는 액셀러레이터 소리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도 되어
울려 퍼지지만
빛은 새벽을 예감(豫感)하는 눈에게만
화살처럼 전광(電光)처럼 달려와 박히는
빛이 된다. 새벽이 된다.
빛은
바다의 물결 위에 실려
일렁이며 뭍으로 밀려오고
능선(稜線)을 따라 물들며 골짜기를 채우고
용마루 위 미루나무 가지 끝에서부터
퍼져 내려와
누워 뒹구는 밤의 잔해(殘骸)들을 쓸어 내며
아침이 되고 낮이 되지만
새벽을 예감하는 눈에겐
새벽은 어둠 속에서도 빛이 되고
소리 나기 이전(以前)의 생명이 되어
혼돈(混沌)의 숲을 갈라
한 줄기 길을 열고
두꺼운 암흑(暗黑)의 벽(壁)에
섬광(閃光)을 모아
빛의 구멍을 뚫는다.
그리하여
새벽을 예감하는 눈만이
빛이 된다. 새벽이 된다.
스스로 빛을 내뿜어
어둠을 몰아내는
광원(光源)이 된다.
오늘 새벽에 필사한 시입니다. 한자가 섞여 있는 것이 예사롭지 않아 찾아보니 출전이 <새벽(1975)>이라고 해요. 거의 제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시인데, 전혀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두꺼운 암흑의 벽에 빛의 구멍을 뚫는' 그 날카로움이 50여 년의 세월 속에서도 전혀 무뎌지지 않은 시네요.
번쩍일 섬(閃) 자를 처음 종이 위에 써 본 것 같아요. 문 문(門) 자에 들 입(入) 자가 합쳐진 걸로 보여서 '문을 비집고 들어가는 건가, 엄청 재밌는 글자네,' 생각했는데 문 안에 든 게 사람 인(人) 자였군요. 문 안에서 사람이 언뜻 보이는 걸 말한대요. 참고로 사람 인 자가 밖에 놓이면 閄(몸을 숨겼다가 갑자기 나와서 사람을 놀라게 하는 소리 혹/획)이라는 아주 귀여운 글자가 된다고 합니다. 깔깔깔. 이렇게 귀여운 한자가 있다니.
‘새벽을 어둠의 시간이 아닌 빛의 시간으로 감각하는 사람, 그리하여 스스로가 광원이 되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주제 자체도 아름다운데 그걸 담아낸 문장들, 그리고 문장을 읽으면 떠오르는 이미지며 감각들이 한결같이 아름다워서 좋았습니다. 새벽이라는 단어를 오롯이 감각하게 해 주는 시.
지구는 어쩌다가 자전을 하게 되어 낮과 밤이라는 시간을 만들어냈을까, 그리고 인간은 어쩌다가 그에 맞춰 잠을 자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을까, 이 두 가지는 제가 참 신비롭다고 생각하는 오랜 수수께끼예요. 만약 낮이 계속 이어지는 시간을 살았다면 인간은 분명히 아주 다른 존재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게 가려졌다가 천천히 드러나는 순간을 매일 받아 산다는 것, 그 사실이 현재의 우리를 만들었을 거예요. 어둠의 시간 뒤에 반드시 빛의 시간이 있음을 우리는 매일 당연하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살고 있잖아요. 절대자가 있다면 그 분은 너무나 엄청난 진리를 우리 눈 앞에 말없이 펼쳐 두신 셈이죠. 반드시 잠자리에 들어 다른 세상에 잠시 다녀와야만 생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우리 영혼에 어떤 식으로든 중대한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믿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품었든 쉬어 가라. 잠시 멈추고 다시 새로운 빛 안에서 보아라. 어제의 생각이 오늘도 맞는지, 잠에서 깨어 후회하지 않는지, 그리로 계속 갈 것인지.
메리 올리버의 <천 개의 아침>이라는 시집 속에 '천 개의 아침'이라는 시가 있는데, 저는 무엇보다 제목이 주는 아득함과 아름다움이 좋더라고요. 아침이 천 개나 된다는 그 무수한 빛의 약속이 참 좋았습니다.
밤새 내 마음 불확실의 거친 땅
아무리 돌아다녀도, 밤이 아침을
만나 무릎 꿇으면, 빛은 깊어지고
바람은 누그러져 기다림의 자세가
되고, 나 또한 홍관조의 노래
기다리지(기다림 끝에 실망한 적이 있었나?)
메리 올리버가 말하는 '밤이 아침을 만나 무릎 꿇으면, 빛이 깊어지고 바람이 누그러져 기다림의 자세가 된다'는 부분이 정한모 시인이 쓴 네 번째 연과 참 부드럽게 겹쳐지지요.
빛은
바다의 물결 위에 실려
일렁이며 뭍으로 밀려오고
능선(稜線)을 따라 물들며 골짜기를 채우고
용마루 위 미루나무 가지 끝에서부터
퍼져 내려와
누워 뒹구는 밤의 잔해(殘骸)들을 쓸어 내며
아침이 되고 낮이 되지만
밤은 무릎을 꿇고야 마는 것. 바람은 누그러지는 것.
거기에 붙은, 시인의 물음표를 단 문장이 귀엽고도 단단합니다. 기다림 끝에 실망한 적이 있었나?
밤을 어떤 공간으로 살아내느냐가 그 사람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이 또 이 세상의 밤과 새벽을 만들 겁니다. 어둠의 공간을 즐기며 일탈하는 사람, 어둠의 시간에 부끄러움을 쓸어 담고 자책하는 사람, 어둠 속에서 명상하고 빛을 보는 사람. 요즘 어둠의 시간이 길지만 저는 빛을 봅니다. 제가 새벽을 예감하는 훌륭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고국의 거리에서 광원이 보여서요.
“야음을 틈타”라는 표현과 “어둠 속에서도”라는 두 가지 표현을 모두 만들어 쓰는 것이 인간입니다.
“느리고 맑은 외양간의 쇠방울 소리”처럼 순박한 새벽을 맞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