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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Sep 16. 2024

예순두 번째 시

2024. 9. 16. 오탁번, '밤'
시집 <손님> 중에서


[밤]


할아버지 산소 가는 길

밤나무 밑에는

알밤도 송이밤도

소도록이 떨어져 있다


밤송이를 까면

밤 하나하나에도

다 앉음앉음이 있어

쭉정밤 회오리밤 쌍동밤

생애의 모습 저마다 또렷하다


한가위 보름달을

손전등 삼아

하느님도

내 생애의 껍질을 까고 있다



   밤은 왜 이름이 밤일까요. 송이 안이 깜깜해서 밤일까. 안희연 시인의 산문집에 보늬밤조림에 관한 이야기가 있지요. “누가 밤을 꿀에다 재울 생각을 한 걸까. 재운다는 말은 왜 이리 다정하면서도 아플까. 자장자장. 밤을 재운다.” (안희연 산문집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 중에서) 낮이라는 열매도 있으면 좋을 텐데요. 그럼 우리는 깜깜한 단지에다 낮을 재우고 밤을 하얗게 깎을 수 있을 거예요. 낮에는 밤을 먹고, 밤에는 낮을 먹을 수도 있을 거고요. 그렇게 고대 신화에 나오는 거인족 신처럼 살 수 있겠다 생각하니 슬쩍 웃음이 납니다.

 

   밤이라서 그렇게 아픈 가시를 달고 있는 걸까, 쓸데없는 생각도 해봅니다. 시공간이 팽팽해지는 늦은 밤이면 우리들은 가끔 얇은 바이올린 줄이 되기도 하잖아요. 사는 일에 바빠 그대로 방치해 둔 아픔이 밤이 되면 얼얼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하고요. 낮에는 누런 얼굴로 조금은 멍들고 무른, 이를테면 작은 개살구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가도 밤이면 작은 밤송이가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밤의 예민한 마음을 밤은 가시로 만든 걸까요.


   환경이 척박하고 물이 부족해서 잎을 가시로 만든 게 아니라 과일 자체를 감싸기 위해 이렇게 길고도 뾰족한 가시를 만들어 놓은 아이는 밤뿐이지 않나요? 파인애플이나 두리안도 비슷한 마음을 하고는 있지만 밤의 가시는 독보적이죠. 무슨 마음이 이런 가시를 만들었을까, 이 가시는 왜 이리 다정하면서도 아플까 생각해 봅니다. 한데 그렇게 애써 만든 가시를 두고 밤은 왜 또 슬그머니 송이를 벌려 놓는 걸까요. 그 마음을 짐짓 모른 척하고 그 안에 든 토실토실한 알밤을 집어 들면 되는 거겠죠?

 

   밤을 제사상이나 차례상에 올리는 이유는 씨밤(발음 주의..) 때문이라고 들었어요. 다른 식물의 경우에는 원래의 씨앗이 사라지고 후손만 남지만, 밤은 처음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밤나무를 길러낸 그 씨밤이 없어지지 않고 붙은 채로 땅속에 계속 남아 있다고 해요. 그 모습을 너무 보고 싶은데, 뿌리 부근을 파헤칠 수가 없어 그런가 씨밤이 그렇게 달려 있는 사진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조상이 그대로 연결된 나무라니, 신기하죠. 그래서 제사상에도 혼례상에도 빠지지 않고 오른다고요.  


    “앉음앉음”이란 낱말이 좋았어요. 밤은 송이 안에 얼마나 많은 밤톨이 들어있는가에 따라 모양이 다르잖아요. 한쪽만 동그란 녀석, 양쪽 모두 평평한 녀석. 다른 형제자매와 맞붙어 있던 자리가 그대로 몸에 새겨진 녀석들.   
 
   그야말로 부모와 형제자매가 모여 둘러앉는 자리에서 상에 오르는 녀석으로 밤만 한 아이가 없네요. 두른 것을 벗겨내기는 어렵지만, 그 안에 든 포슬포슬 달고도 고소한 가족의 맛.


   한가위 보름달을 손전등 삼아 내 생애의 껍질을 까신 하느님께서 그 밤을 어떻게 하실지요. 자장자장, 꿀에다 재워 주시면 좋으려나요. 가시가 필요하면 그런대로, 떫은 율피가 그대로 붙어 있으면 그런대로, 신선하게 오독오독한 생밤이면 또 그런대로, 달게 쪄져서 기분 좋게 든든하면 또 그런대로, 그래도 내 피붙이를 만나 서로의 붙은 자리를 확인하는 일. 모두의 추석이 덜 피곤하고 더 따뜻하면 좋겠습니다. 꿀 안에 잠든 밤처럼 달고 포근한 연휴 보내시길요.



   신간 <모든 단어에는 이야기가 있다>는 부지런히 독자님들을 만나러 다니고 있습니다. 구슬 같은 단어들이 여기저기 굴러 다니면서 많은 분들께 닿는 모습을 보는 것이 무척 기쁘고 행복하네요. 아래는 인스타그램 들어갔다가 저항 없이 빵 터졌던 사진. <모든 단어에는 이야기가 있다>가 알라딘 신간 베스트 2위에 올랐다는 소식에 저러고 사진 찍으셨다는 편집자님 사랑합니다.

손끝 각도까지 완벽하시다

   자자, 연휴에 읽기도 좋고 추석 선물로도 좋은 책을 찾고 계신다고요? 그렇다면 이 책 어떠신가요. 고객님께 만족을 드리... 려나?(무책임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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