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수학과 만날 때
청소년들에게 물 한 잔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학사에서 내놓는 <고교 독서평설>에 시 읽는 코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참 좋아하는 김소연 시인의 시를 골랐어요. 시를 고를 때는 학생들에게 이런 얘기도 해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선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좋아하는 시인도 많고 또 한 시인의 시 중에서 좋아하는 시도 넘치기 마련이라, 이런 식의 접근법이 도움이 돼요 :) 여기 올리는 글들은 최종본이 아닌 초안입니다. 지난 원고를 하나씩 올려놓고 있어요.
[11월의 시] 수학자의 아침
시가 수학과 만날 때
- 김소연, 시집 <수학자의 아침(2013, 문학과지성사)> 중에서
나 잠깐만 죽을게
삼각형처럼
정지한 사물들의 고요한 그림자를 둘러본다
새장이 뱅글뱅글 움직이기 시작한다
안겨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안겨 있는 사람을 더 꼭 끌어안으며 생각한다
이것은 기억을 상상하는 일이다
눈알에 기어들어온 개미를 보는 일이다
살결이 되어버린 겨울이라든가, 남쪽 바다의 남십자성이라든가
나 잠깐만 죽을게
단정한 선분처럼
수학자는 눈을 감는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숨을 세기로 한다
들이쉬고 내쉬는 간격의 이항대립 구조를 세기로 한다
숨소리가 고동 소리가 맥박 소리가
수학자의 귓전에 함부로 들락거린다
비천한 육체에 깃든 비천한 기쁨에 대해 생각한다
눈물 따위와 한숨 따위를 오래 잊고 살았습니다
잘 살고 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요
잠깐만 죽을게,
어디서도 목격한 적 없는 온전한 원주율을 생각하며
사람의 숨결이
수학자의 속눈썹에 닿는다
언젠가 반드시 곡선으로 휘어질 직선의 길이를 상상한다
시와 수학
“아니 시도 어렵고 수학도 싫은데 둘을 붙여 놓는다고?”라고 할 독자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고등학생일 때 이 글의 제목을 보았다면 딱 그랬을 거예요. 둘 모두와 데면데면하게 지내던, 굉장히 소설 쪽으로 편향된 문과 학생이었으니까요. 게다가 시와 수학은 왠지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기 어려운 물질 같기도 하죠. 이번 글에서는 시라는 세계가 얼마나 무한히 열려 있는지, 다른 분야를 만나 얼마나 아름답게 섞일 수 있는지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세상 모든 것이 시가 될 수 있다는, 다소 진부하지만 참으로 참인 이야기와 함께요. (저는 ‘참으로 참이다’, ‘대단히 대단하다’, 이런 장난 같은 동어반복 속에서 피어나는 미소와 의미를 좋아합니다.)
여러분은 수학을 좋아하나요? 저에게는 좌절의 과목이었습니다. 배추를 절일 것도 아니면서 소금물을 농도별로 만들고 그걸 또 섞어 대는 짓에 질색했어요. (아니 도대체 왜 이런 짓을...) 나한테 자꾸 각도를 구하라고 하지 말고, 거 얼마 하지도 않는데 각도기를 좀 샀으면 싶었지요. 가뜩이나 숫자 감각이 없어서 숫자를 보면 제2외국어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걸로 이루어진 세계라니. 당최 살갑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저에게 수학은 그저 입시를 위해 격파해야 할 장애물 같은 것이었어요. 빨리 수능이 끝나서 이 지겨운 수학 시험을 더 이상 안 쳤으면 하고 바랐죠. 수학이 단순히 공식이나 문제의 집합체가 아니라 이 세상을 담는 또 하나의 언어라는 사실을, 심지어 재미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 후로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난 뒤였습니다.
그걸 알려준 건 유학시절 같은 학교에서 수학을 공부하던 K였어요. 그 친구의 기숙사에 들렀다가 같이 학교에 갔던 날을 기억합니다. 그가 세상을 나와는 굉장히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 눈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 무척 신기했거든요. 운동화 끈을 묶으면서 끈을 어느 구멍에 어떤 방식으로 끼우면 끈을 가장 길게 남길 수 있는지, 즉 끈의 길이를 가장 적게 활용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참으로 희한한 인간이었습니다. 심지어 교정을 함께 걸으면서는 이 길에 나무가 무슨 등비수열과 무슨 등차수열을 동시에 만족하는 공식으로 심어져 있다나요? (이 녀석이 대체 뭐라는 거야.) 운동화 끈이란 ‘풀리지 않게 묶어야 하는 것,’ 가로수란 ‘아름답고 고마운 친구들’ 정도로 생각하며 살아온 저는 그날 그야말로 시 ‘수학자의 아침’ 속 표현처럼 “정지한 사물들의 고요한 그림자를 둘러본다/ 새장이 뱅글뱅글 움직이기 시작한다”와 같은 기분을 느꼈습니다. 늘 그 자리에 있던 똑같은 세상인데, 다른 차원의 질서가 보이고 새로운 언어가 느껴졌어요. 그 친구에게 수학은 세상의 모습을 바라보고 설명하는 또 다른 언어였고, 그날 저는 그 사실을 새롭게 깨달은 거죠.
그 뒤로 저도 세상을 수학의 언어로 바라보는 소소한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북두칠성은 한붓그리기가 되지만 오리온자리는 한붓그리기가 안 되네. ‘0x100=0’이라는 수식은 씨를 심지 않으면 아무런 수확을 거둘 수 없다는 말이구나. 그동안 미처 몰랐는데, 밥값 계산이나 월드컵 16강 진출 확률 같은 것 말고도 세상에는 수학이 여기저기 스며 있더라고요. 예를 들어 여러분이 좋아하는 노이즈 캔슬링 기술은 ‘소리는 두 삼각함수의 조합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기반을 둔 거라고 해요. (세상을 바라보는 언어로서의 수학을 다룬 책들은 많은데, 여러분에게는 특별히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김동진 선생님의 <쓸모없는 수학(마누스, 2024)>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노이즈 캔슬링 기술의 예시는 <암기 없이 그림으로 이해되는 수학 개념 사전(동양북스, 2025)>이라는 책에서 가져왔어요.)
수학이 세상을 표현하는 언어이자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이기도 하니, 시와 수학이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이제 조금은 자연스럽게 느껴지나요? 20세기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에 따르면, 시란 일종의 ‘영감을 받은 수학(inspired mathematics)’으로서 ‘인간 감정의 방정식’을 다루는 것이라고 해요. 저는 최근에 이재무 시인의 시 ‘수직에 대하여’를 읽고 ‘사랑의 수평은 마음속 벼랑이 이룬 것’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나선으로 뱅글뱅글 돌며 오래 머물렀답니다. 시와 수학은 이처럼 아름답게 만나 세상 여기저기에 꽃을 피우고 있어요. 여러분에게도 그 꽃이 보이나요?
낯설게 하기
여러분은 이 시를 어떤 느낌으로 읽었는지 궁금하군요. 제가 받은 첫인상은 고요한 가운데 느껴지는 현기증이었어요. 익숙한 세상이 갑자기 스르륵 돌며 낯설어지는 느낌. 시의 특성이자 매력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는 읽는 사람을 일순간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이끄는 놀라운 능력이 있는데, 이것 때문에 우리는 종종 낯선 느낌을 받아요. 이 감정을 즐기는가 아닌가에 따라 시를 즐기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어려워하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돌이켜 보면 정답을 골라내야 했던 학창 시절에는 그게 습관이 되어서인지, 모호하고 낯선 느낌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알쏭달쏭한 시를 즐기지 못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안갯속에 반쯤 잠겨 있는 듯한 흐릿한 감각을 참 좋아합니다. 언뜻언뜻 뭐가 보이는 것도 같은.
소설과 비교하면 좀 더 명확해지는데, 소설은 소위 말하는 ‘빌드 업’이라는 개념에 충실해요. 아무리 불친절한 작가라 하더라도 작품 초반에 누가 어디에서 겪는 일인지에 관한 힌트를 줍니다. 1897년의 한가위를 시작으로 하동 평사리 사람들이 겪는 이야기라든지, 02년생 지영이가 교통사고로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떠보니 웬 북부대공이 느끼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다든지. 소설은 이렇게 시대적 배경과 주인공을 소개하고, 차곡차곡 쌓이는 문장을 따라 독자의 생각과 감정도 쌓이는 방식을 택해요. 하지만 시는 첫 줄을 읽으면서 ‘나는 누구고 여긴 어디지?’ 하는 마음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려야 합니다. 시는 단숨에 우리를 하늘 높이 끌어올렸다가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혔다가, 일순간에 어떤 장소와 상황이 주는 생생한 감각으로 우리를 던져 넣는 능력이 탁월하거든요. 그 장소와 상황이 초현실적일 때도 많고요.
저는 모든 시인이 철학자라고 생각하는데, 시인들은 ‘낯설게 하기’가 특기인 데다 관점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에요. ‘수학자의 아침’은 “나 잠깐만 죽을게”라는 시작이 무척 인상적이죠. 잠깐만 죽는 게 가능하다니, 일단 우리가 알고 있는 익숙한 세상이 아니라는 사실에 가벼운 어지러움을 느낍니다. 게다가 삼각형처럼 죽는다니, 이게 과연 뭘까요? 단정한 선분처럼 죽는 것은요? 온전한 원주율과 죽음은 어떤 관계일까요? 평소에 가깝게 생각해보지 않은 단어들이 서로의 곁에 놓이는 순간 여러 가지 상상이 샘솟지 않나요? 수학과 죽음은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요?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이라는 미술 기법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본 적이 있을 거예요. 비처럼 내리는 신사들이라든가 공중에 떠 있는 바위, 벽난로에서 튀어나오는 기차 같은 것들 말이죠. 데페이즈망은 어떤 대상을 상식적인 맥락에서 떼어내 이질적인 상황에 배치함으로써 낯설게 만드는 기법인데, 쉽게 말해서 못 보던 애들끼리 짝을 지어주는 거예요. 친숙한 물건이라도 늘 보던 일상적 질서에서 떼어내 엉뚱한 곳에 놓아두면 세상이 고요하게 뒤집힙니다. 유리잔 안에 구름을 담는다든가, 전봇대 대신 거대한 연필을 세워 둔다든가. ‘수학자의 아침’은 비슷한 방법으로 시와 수학이라는 낯선 결합을 통해 우리에게 신선한 깨달음을 줍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저는 르네 마그리트를 떠올렸어요. 데페이즈망 기법의 정수를 보여주는 초현실주의 화가죠.
예기치 않은 결합을 통해 우리의 상상력에 자극을 주고 뻔한 생각의 경로에서 벗어나 일탈하게 만드는 시. 시인들이 철학자가 되는 것은 이런 까닭입니다. 세상을 조용히 뒤집으니까요. 철학적 사고에서도 기본은 ‘낯설게 보기’입니다. 잘 안다고 믿었던 익숙한 것이 갑자기 낯설어지면서 뱅글뱅글 움직이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이죠.
삶과 죽음, 그리고 수학
개인적으로 이 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단어는 죽음입니다. 물리학자 김상욱 선생님이 이 시에 관해 이야기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어요. 수학이 죽음이고 슬픔인 이유를 과학자의 입장에서 풀어내는 이야기가 참 재미있었습니다. 선생님의 해석에 따르면 생명은 언제나 변화하는 것이지만 수학에는 변화의 여지가 없고(1 더하기 1이 3으로 변할 여지는 없으니까요), 따라서 수학은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라고 해요. 또한 수학이 슬픔인 이유는 슬픔이란 즉각적인 감정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모든 것을 종합했을 때 나중에 찾아오는 감정, 즉 깨달음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슬픔이 깨달음이라면 이것은 감정보다는 이성의 영역이고, 그러므로 예술의 영역이 아니라 수학의 영역이라는 거죠. 정말 멋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와 수학과 과학이 만나면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구나 하고 감탄했지요.
저는 이 시 속 수학을 ‘삶과 죽음 사이를 매개하는, 낯설기 때문에 무척 효율적인 도구’라고 생각했어요. 즉 김상욱 선생님의 해석과는 달리, 시인이 수학을 도구로 삼아 결국은 죽음이 아닌 새로운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결국 이 시는 ‘새로워지는 일, 혹은 새로 태어나는 일에 관한 시’라고 생각했고요. “잠깐만 죽을게”라고 말하는 것은 다시 살겠다는 말이잖아요. 죽음은 흔히 어둠이나 밤에 비유되곤 하지만 이 시의 제목이 수학자의 ‘아침’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고요. 시는 읽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데, 상상의 날개를 쫙 펴고 수수께끼를 내 방식대로 풀어보는 즐거움을 이 시를 통해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나름의 해석을 덧붙여 보세요.
먼저 단정한 선분처럼 잠시 죽어보는 일을 상상해 봅시다. 외계인이 우리를 본다면 지구인은 매일 밤 단정한 선분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인간이 잠들었다가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밤마다 죽었다가 살아난다면, 매일 아침의 느낌이 달라질까요? 이제 삼각형 같은 죽음도 느껴볼까요. 각자의 각도를 가지고 다양한 모습으로 납작하게 죽어 있는 삼각형들을 머릿속에 그려봅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뾰족하게 찌르는 죽음을 생각해보기도 하고, 안정적인 삼각형에서 얻는 안식의 느낌도 떠올려 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반쯤 안갯속에 잠긴 듯 뜻이 명확하지는 않아도, 시를 읽다 보면 이렇게 행과 연 사이에서 주관적으로 솟아오르는 형상과 감각이 있는 것이 재미있어요. 원주율, 즉 파이(π)는 3.14라는 값으로 셈해 사용하지만 실은 무한히 이어지는 수예요. 닫힌 세계가 아닌 열린 세계이고 따라서 죽음보다는 삶, 생명을 향한 기호입니다. 이렇게 무한한 원주율을 상상하며 죽는 것은 그러므로 이 죽음이 닫힌 결말을 의도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요?
시 속 수학자는 아침마다 단정히 눈을 감고 누워 잠시 죽음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 시간은 정지해 있는 세상이 뱅글뱅글 돌며 낯설게 느껴지는 시간이에요. 즉, 익숙한 세상이 흔들리면서 새로운 것을 듣고 못 보던 것을 보는 시간이지요. 이것은 눈으로 보던 평온한 세상을 잠시 잊고 눈알에 기어들어온 개미를 보는 것처럼, 같은 ‘본다’라는 행위지만 전혀 다른 것을 감각하는 일입니다. 김소연 시인은 이것을 “기억을 상상하는 일”이라고 해요. 우리가 쌓아 놓은 기억은 굳은살처럼 딱딱하고 두꺼워져 있지요. 이걸 한쪽으로 잠시 치워 두고 이제는 잊어버린 것들을, 처음의 순간들을 상상한다면 어떨까요. 갓 태어난 피부로 겨울을 감각하던 일이라든가, 보이지 않아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바다나 별을 떠올리는 일.
잠깐 죽었다 새로 살아나는 것은 ‘낯설게 느끼고 새롭게 보는 일’과 관련이 있어요. 이를테면 시에서처럼 눈물과 한숨을 잊고 살다가 그걸 깨닫는 일, 혹은 내가 너에게 안겨 있어서 너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 같은 것이죠. 안는 순간은 분명 어떤 존재를 새로 만나는 일이었을 텐데, 그렇게 안겨 있으면 정작 내 눈이 그 대상을 보지 못하고 어긋나는 경우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건축이라는 분야에 몸담은 사람을 떠올려 볼까요? 시작 단계의 관심은 건물보다는 그 공간을 누릴 사람으로부터 출발했을 거예요. 내가 살고 싶은 집,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을 느낄 공간. 하지만 그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사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숫자와 도면이 내 시야를 지배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익숙한 시야 안에서는 그렇게 처음의 기억과 숨소리가 사라지기 쉬워요. 통계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숫자가 의미하는 것을 예민하게 느낄 거예요. 사망 통계 같은 숫자 안에 든 한숨과 눈물이 더 잘 보이겠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삶도 사랑도 죽음도 희미해지고 그저 모든 것이 숫자화 되어 도표 안에 기계적으로 들어가게 될지 몰라요. 시 속 구절처럼 “잘 살고 있지 않은” 상황일 겁니다.
시 속 수학자는 자기가 꼭 끌어안고 있는 것, 즉 자신에게 익숙한 것을 가지고 다시 생명을, 삶을, 사람을 바라보려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숨, 그 들이쉬고 내쉬는 간격의 이항대립 구조를 세고, 규칙적인 맥박 소리를 통해 비천한 육체에 깃든 비천한 기쁨을 생각해 봅니다. 숫자라는 필터로 걸러진 생명들을 다시 되살려, 오히려 숫자를 통해 사람의 숨결을 느끼는 거죠. 좌표라는 것도 원래는 생명의 움직임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였다고 하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로 유명한 근대 프랑스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르네 데카르트가 병상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서 파리의 움직임을 나타낼 방법으로 고안해 낸 것이 좌표라고 해요. 시 속의 수학자는 죽음을 통해 삶을 감각하고 수학을 통해 인간의 생명성을 새롭게 되찾습니다.
시적인 수학, 수학적인 시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앨리스 먼로는 ‘너무 많은 행복’에서 주인공인 수학자 코발렙스카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수학을 건조하고 메마른 과학이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영혼의 시인이 되지 않고는 수학자가 될 수 없어.” 이 시 덕분에 여러분에게 수학이 좀 더 촉촉하게, 시가 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면 좋겠습니다.
시의 마지막에는 숨결과 속눈썹이 등장하지요. 속눈썹은 예쁜 곡선이 확실한데, 숨결은 곡선일까 직선일까 생각해 봅니다. 시 속에 답이 있는 것 같아요. 언젠가 반드시 곡선으로 휘어질 직선의 길이, 그것이 바로 숨결의 모습 아닐까요? 김소연 시인은 시를 곡선이라고 표현해요. “시는 인간이 언어로 그을 수 있는 가장 큰 포물선이다. 모르는 장소로, 모르는 사람에게로, 모르는 옛날에, 모르는 미래에 미리 가닿는다(<생활체육과 시(아침달, 2024)>에서).” 그 포물선의 모습과 길이를 상상해 보다 슬며시 웃어봅니다. 아니, 수학과 시에서 나아가 이번엔 생활체육과 시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