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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Jan 05. 2020

네가 나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사물 이름 가르쳐주기와 정명(正名)

엄마, 귤에 가시가 있어. 

 

큰아이는 생선을 잘 먹는다. 가시가 있으면 뱉어낼 줄도 안다. 한데 다른 음식을 먹다가도, 그렇게 이물감이 느껴져서 뱉어내야 하는 것들을 모두 '가시'라고 통칭해 부르기 시작했다. 귤을 까먹다 씨앗이 있어 뱉을 때도 “엄마, 가시.” 군고구마를 먹다가 껍질이 깨끗하게 벗겨지지 않은 걸 우물거리다 뱉을 때도 “엄마, 고구마에 가시 있어.”

나는 그 가시라는 말이 귀여워서 씨라든가 껍질 같은 이름을 가르쳐 주기 싫었다.


그 뒤로도 귀여움의 퍼레이드가 이어졌다.


자동적으로 닫히는 육중한 현관문에 몸이 살짝 끼었을 때.  

"엄마, 문이 꼭 깨물었어."
여름에 나무가 우거진 유치원 정원에서 놀다가 모기에 물려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었을 때.

"엄마, 모기가 꼬집었어."

그리고 반바지를 입은 아빠 다리를 보고.
"우와, 아빠 다리에는 머리카락이 많아."

(그래. 아빠가 다리 좀 감아야겠네.)

 

나는 꼬질꼬질 사탕 냄새나던 어린 시절에 어떤 특별한 표현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알파벳을 처음 보면서 더블유(W)는 암만 봐도 브이가 두 개 붙은 모양인데 왜 더블브이가 아니고 더블유인지 궁금했던 기억이 난다. (이 글을 제 소셜 미디어에 올렸더니 한 지인이 제보를 주셨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더블브이라고 한대요! 스페인에서도! 으하하 속이 다 시원하다.)

문이 나를 꼭 깨물었다든가 모기가 꼬집었다든가, 이런 표현은 시적 허용이 가능한 예쁜 표현들이다. 그런데 더블유를 더블브이라고 고집했다면, 그리고 그런 내가 귀엽다고 우리 엄마 아빠가 그것을 고쳐주지 않았다면 훗날 철자를 알려줄 때 아무도 내 말을 못 알아들었을 것이다.

타인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언젠가 이름을 제대로 알려주어야 한다.
가시라는 귀여운 이 아이만의 단어를 나는 언제 바로잡아 주어야 할까.

아이들이 사물의 이름을 물어볼 때.

그리고 부모들은 이름을 바르게 가르쳐주어야 할 때.

이 글은 사물의 이름 가르쳐주기와 논어의 정명(正名)에 대한 이야기다.


아이가 나를 엄마라고 불렀을 때 아이는 나에게로 와서 내 아이가 되었다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고 했다.

이름이 가지는 힘이란 오묘하다.

서로를 이르는 힘.

이름을 부르면서 열리는 세계.


이름은 주로 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소환된다. 내 존재를 응축한 몇 음절이 내 이름이고, 그 이름은 내가 마음속에 지니라고 있는 게 아니라 주로 타인이 부르라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어느 시인은 "아직 당신이 사람임을 증명할 또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라고 했다. (오은, 시집 <나는 이름이 있었다> 중 '사람'에서) 그래서 이름은 관계를 전제로 한다.


나에게는 태어나서 받은 첫 번째 이름이 있다.

참 진, 가을 하늘 민. 가을 하늘의 고운 푸른색을 보면 나는 기분이 두 배로 좋아진다.

내가 평생 가지고 갈 두 번째 이름은 5년 전에 생겼다. 엄마.


뱃속에 젤리빈만 한 첫 아이를 가지고서 병원에 갔을 때, 피검사를 위해(임신을 하면 피를 어마어마하게 뽑는다. 그 피를 다 모으면 웬만한 사람이 하나 생길 것 같은 느낌.) 팔에 고무줄을 감던 덩치 좋고 쾌활한 간호사가 "Let's do it, little mama!"하고, 처음으로 나를 엄마라고 불렀다.

으아, 내가 이제 엄마구나.

내가 엄마가 되는구나, 속으로 생각했을 때와 누군가 나를 엄마라고 불러줄 때의 느낌은 정말 판이했다.

이제는 엄마로 불리는 일에 익숙해졌지만(야 이놈들아 엄마 좀 그만 불러), 한동안 나는 엄마라는 이름을 내 것으로 인식하고 그 이름을 내 아이덴티티로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어이쿠, 내가 엄마라고?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저 아이가 내 아이인가 데카르트적 (혹은 양아치적) 회의를 시작할 수 있는 남성들과는 달리 얘는 빼도 박도 못하게 내 뱃속에 들어있지 뭔가.


그러다 아이가 태어났고, 침이 질질 흐르는 옹알이 기간을 지나 드디어 아이가 그 단어를 조그맣게 내뱉었다.

엄마.

그러자 마음속에 갑자기 꽃 한 송이가 활짝 피면서 그 엄마라는 이름이 온전히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던 이름은 나와 평화롭게 화해했다.

그렇게 아이는 나에게로 와서 내 아이가 되었고, 나는 엄마라는 내 두 번째 이름을 사랑하게 됐다.   


예전에 휴대폰이란 것이 생겨나 서서히 일상으로 자리 잡아가던 무렵, 꽤 유명했던 통신사 광고가 있었다. (그땐 PCS라고 불렀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Personal communication system? Personal communicative service? P페리카나 C치킨 S사먹고 싶다?)

말을 시작한 아기가 아빠에게 전화로 "아빠!"라는 첫 말을 전하는 순간을 잡은 광고였다.
"아빠, 해봐. 아까 했잖아." 엎드려 아기 귀에 전화기를 대며 신이 난 엄마와, 아이가 아빠 목소리를 알아듣고 "아빠?" 하자 세상을 다 가진 듯 뭉클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빙구미 넘치는 표정을 짓던 아빠.

그는 옆 사람을 보며 밑도 끝도 없이 한 마디를 건넨다. "아빠래요."

아이가 처음으로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 순간의 그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잡아냈던 광고는 아직 아기가 없던 시절의 내 마음에도 깊이 들어와 남았다.

그렇게 삐약거리는 예쁜 목소리로 엄마, 아빠라고 불러주는 순간 아이들은 나에게로 와서 내 아이들이 되는 느낌이다. 이름을 부르면 그렇게 나의 세계가 열리고 너의 세계와 만나게 된다.


그런데 너의 이름을 부르기가 겁나게 헛갈린다
 

"엄마, 이게 뭐야?" 아이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사물의 이름을 묻는다.

주로 한국어로  단어를 알려주지만, 미국에서 태어나 가장 사랑하는 유튜브 비디오가 Blippi 아저씨인 우리  꼬맹이들은 사물을 인지할  한국어가 먼저 나오는 경우도, 영어가 먼저 나오는 경우도, 그리고 어가 먼저 나오는 경우도 있다.

이 분입니다. 어라 근데 왜 Mouth만 둘이죠. ⓒBlippi

아이가 슬슬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니 독일어 어휘 부족이 문제로 떠오르는 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독어가 세 살 아동 수준인 엄마 아빠에게서 뭐 주워들을 게 있겠는가. 여기서 사람답게 살려면 독일어를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할 것 같아서 나는 2020년 새해 목표를 1) 독일어 공부(사람은 목표를 크게 잡으라고 했다. 그래서 대여섯 살 수준을 목표로 정진할 계획이다.) 2) 즈질 체력을 저질 체력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기 3) 일주일에 한 편씩 꾸준히 글쓰기로 잡았다.  

  

그런데 독일어. 순탄치가 않다.
제임스 본드(James Bond)가 야매스 본트로 읽히는 나라에 살고 있다. (그렇다고 독일인들이 야매스 본트라고 읽지는 않... 그냥 제임스 본드라고 읽는다. 야매스는 주말반에서 독일어 배울 때 한 외국 아이가 그렇게 읽는 것을 듣고 뇌리에 박혔다. 007의 신뢰가 급 무너지던 순간.) 여기선 J가 Y로 발음된다. 우리 아이들, 지음(Jium)이와 이음(Yium)이는 여기서 그냥 둘 다 이음이고(망했...), 진민 씨의 이름은 인민이 되었다. 갑자기 정당에라도 가입해야 할 것 같은 포스가 생겨버렸다. 영어를 배운 눈으로 보자면 영어 단어 제대로 안 외운 중학생 답안지에서 볼 것 같은 스펠링들이 많아, 여기에서 오래 있다간 영단어 스펠링이 슬금슬금 무너질 것 같기도 하다. 예를 들면 그래픽이 Grafik, 텔레폰이 Telefon.


문제는 영어랑 똑같이 생겼거나 발음이 같은데 의미가 전혀 다른 단어들. 헛갈려 죽겠다.
fast 빠르다는 뜻이 아니라 거의(거의 죽었다는  빨리 죽었다는  알았), Chef 요리사가 아니라 보스,  상사.

예 솊! 드라마에서 이 분은 영어로도 셰프, 독어로도 셰프시다. ⓒMBC 드라마 <파스타>

also '그래서'라는 의미고, Ich will I will 아니라 I want(이게 제일 헛갈렸다). denn 인과관계에 붙는 접속사인데 영어의 then처럼 들려서 인과관계 순서를 뒤죽박죽으로 망치곤 한다. 예를 들어 “Ich esse, denn ich habe Hunger.”라는문장은 원래 ‘나는 배가 고프기 때문에 먹는다’라는 의미인데, ‘나는 먹는다. 그러면 배가 고프다’같은 진정 나다운 문장으로 들리곤 하는 것. Waffe 무기라는 뜻인데 자꾸 와플이 생각나서 마음이 관대해지고, Bad Salz 나쁜 소금이 아니라 목욕용 소금이며, LG 삼성 친구 엘지가 아니라 Liebe Grüße,  메시지나 이메일 끝에 붙이는 인사말의 축약형이다. 텍스트 읽다가 LG 레나를 보고 레나가 엘지 다니는 . 아이 .


더 문제는 한국어와 영어, 독어를 오가면서 반대말 혹은 곤란한 말처럼 발음되는 단어들이다.

독일에   얼마  됐을 , 운전 중에 라디오에서 일기예보가 나올 때마다 남편이 실실 웃었다. 이유를 물으니 라디오에서 자꾸 존내, 존내(die Sonne, ) 한다고.  말을 듣고서 "Die Sonne scheint(해가 비친다)."라는 문장을 들으니 과연 해가 존내 비치는 느낌이 든다. 존넨쉬름(der Sonnenschirm, 파라솔이나 양산)이라는  있다. 한국에서 싫어하는 사람에게 고이 건네주는 꽃으로 유명세를 탔다고 들었다.

독일산 장미 품종 이름. 전문 통역사인 지인이 제보해 준 사진. 고마워요. 그대는 나의 존넨쉬름(장미)♥

'오예'는 영어에선 앗싸!(Oh yeah!)인데 독일어로는 저런...(Oje!)하고 실망할 때 쓴다. 학원에서 오예와 코미쉬(komisch, 코믹하고 웃기다는 뜻도 있지만 이상하다는(odd, strange) 뜻으로 많이 쓰인다)의 조합을 자주 듣던 나는 독일인들이 모두 풍자와 해학의 민족인 줄 알았다. '네(Ne)'도 영어의 No인 독어의 Nein을 줄인 말이라 (이 때는 주로 눼, 니예, 처럼 한 대 때리고 싶은 발음으로 표현하는 것이 포인트) 엄마 말에 네라고 대답하면 이 놈들이 알았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남성들이 그토록 듣고 싶어 한다는 말, 오빠는 여기서 잘못 발음하면 할아버지(Opa)가 되고, 할머니를 뜻하는 오마(Oma)는 발음해 보면 엄마라는 말과 꽤 비슷하게 들려서 애들이 엄마! 하고 큰 소리로 불러 사람들이 돌아보면 이 늙은 엄마는 가끔 도둑이 제 발 저린다.

또 하나 멈칫하게 되는 단어는 groß.
크다는 뜻인데 아이들이 해맑게 Mama, du bist groß!(엄마, 엄마는 커!) 할 때마다 영어단어 gross로 들려서 엄마가 그렇게 토 나오게 싫은가, 난데없이 슬퍼진다.


너의 이름을 부르고 싶은데 너의 이름이 몹시 헛갈린다.

카카가 똥이고 포포가 엉덩이인 곳에서 “까까 먹을래? 그럼 엄마한테 뽀뽀.”라는 문장은 뭐랄까, 상당히 애정도가 급감하는 느낌이다.

화룡점정.

독일어로는 Gift가 독이다.

그걸 몰랐던 나는 지문을 읽으면서 화학물질과 플라스틱이 왜 지구에게 크나큰 선물이 된다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과연, 그림 형제가 독일인이었음을 감안할 때 백설공주에게 선물로 주고 간 게 독사과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나 보다.  


나는 너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고 있는가


이런 상황들은 당황스럽긴 해도 내적 성찰에 이르게 하진 않는다. 정신을 차려서 듣고, 아는 만큼 단어의 이름을 알려주고, 열심히 뜻을 설명해 주면 된다. 하지만 편견에 가득 찬 단어들의 뜻을 가르쳐 줘야 할 때의 난감함을 생각해 본다. 편견이 들러붙기 쉬운 단어에 편견이 없도록 처음부터 올바른 정의를 가르쳐 주는 것은 부모들이, 나아가서는 사회 전체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의(definition)를 바로잡는 일은 정의(justice)를 바로 세우는 디딤돌이 된다.  


예를 들어 장애인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설명하며, 자폐라는 단어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단어의 정의가 칼날이 되어 다른 사람을 찌르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우리의 몸상태와 정신상태를 감히 정상과 비정상으로 가르는 기준은 무엇이며, 대체 누가 그 기준을 만들었을까. 몸이 불편한 한 코미디언이 청중들 앞에서 코미디를 하는 와중에 던진, “모든 인간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장애인이다.”라는 말이 내 귀에 콕 들어와 박혔다. 생각해보니, 정말 맞는 말이 아닌가.


어렸을 적 학교에 가지고 다니던 36색 크레파스에는 살색이 있었다.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직접 생활하기 전까지, 나는 그 이름의 문제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어떤 선생님도 그 이름이 딱히 부적절하다는 말씀을 해 주신 적이 없었고, 실제로 크레파스의 그 색은 나의 살색이자 내 친구들의 살색이었다. 수십 년이 지나 고모로부터 선물 받은 아이의 크레파스에는 같은 색의 이름이 '살구색'으로 변해 있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살색 좀 빌려줄래? (출처: mymigrantmama.com)

When I born, I black.
When I grow up, I black.
When I go in sun, I black.
When I scared, I black.
When I sick, I black.
And when I die, I still black.


And you white people.
When you born, you pink.
When you grow up, you white.
When you go in sun, you red.
When you cold, you blue.
When you scared, you yellow.
When you sick, you green
And when you die, you grey…


And you calling me colored?


작자가 분명치 않은 시인데, 이토록 우리 피부색에 붙은 편견을 쉬운 말로 날카롭게 꿰뚫는 시를 본 적이 없다. 사람을 깜둥이로, 짜장면으로, 짬뽕이나 튀기로, 코쟁이로, 원숭이로, 칭챙총으로 부르지 않는 것. 나아가 함부로 병신으로, 빨갱이로, 김치녀로, 한남충으로, 급식충으로 부르지 않는 것. 또는 단어에 오랜 시간 스며든 온갖 편견의 부스러기들을 인지하고 이를 바로잡는 것. 이것이 바로 논어에서 공자 할아버지가 화를 벌컥 내면서 강조하신 정명(正名)이다.


자로가 말하였다.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께 정치를 맡긴다면, 무엇부터 먼저 하시렵니까?

선생님 말씀하시다.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을 테다(必也正名乎)!

자로가 말하였다. 이렇다니깐요, 선생님의 고지식함이! 어떻게 그게 바로잡힌단 말입니까?
선생님 말씀하시다. 함부로 말하는구나, 네 이놈! 군자란 잘 모르는 일엔 대개 입을 다무는 법이거늘.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지 않으면 일이 이뤄지지 못하는 것. 일이 이뤄지지 않으면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고, 예악이 일어나지 않으면 형벌이 맞아떨어지지 못하며, 형벌이 올바르지 않으면 백성들은 손발을 어디 놓을지 모르게 되는 것이다.


귀여우신(논어를 읽어보면 공자님은 몹시 귀여운 캐릭터시다) 공자님이 크게 화나셨다. 공자에게 정치는 기본적으로 언어가 밑바탕이 되어 신뢰가 구축되는 세계다. 즉, 올바른 말의 힘이 가장 근본인 세계인 것이다.


정치의 일은 많은 부분 이름을 바로잡는 데 있다. 예를 들어 광주 폭동이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 것.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눈물과 분노와 반성과 시선의 전환이 있었겠는가. 수많은 병신 앉은뱅이 꼽추 미친년들이 장애인이라는 다소 중의적 이름을 얻고 권리를 주장할 수 있기까지, 그들과 가족들은 얼마나 힘들고 아팠을 것인가. 정치의 과제는 또 잘못 생겨난 이름들을 적절히 관리하는 데 있다. 휴거, 전거지, 월거지, 일베충, 꼴페미 같은 단어 주위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진지하게 경청하고 토론하여 정책을 만들어야 하며, 개쌍도와 전라디언이라는 단어를 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공자는 정치를 하게 되면 정명, 즉 이름을 바로잡는 일부터 하겠다고 단언했던 것이다.


말에는 힘이 있다


말에는 힘이 있다. 옛사람들은 그 힘을 믿었기에 이름을 신중하게 지었고, 문자도를 즐겨 그렸다.

언어는 사고를 규정하고, 사고의 변화는 현실의 변혁을 추동하는 힘을 갖기 때문이다.

 

한 예로, 환경에 관심이 많은 스웨덴 사람들은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해 비행기를 타지 말자는 뜻의 새 단어들을 만들어 내놓았다. 플뤼그스캄(Flygskam)이라는 단어는 '비행기 여행의 부끄러움'이라는 뜻이고 탁쉬크리트(Tagskryt)는 '기차 여행의 자부심'을 뜻하는 단어라고 한다. 여전히 비행기로 여행하지만 이를 숨기는 스뮉플뤼가(Smygflyga, 비행기로 은밀히 여행하다)라는 단어도 있다. 그 사회에서 공감을 얻는 아이디어들이 이렇게 언어의 옷을 입고 단어 목록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들은 단어 자체로 사회 운동이 되기도 한다. 플뤼크스캄 운동은 스웨덴 사람들에게 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서 대안적인 운송 수단을 이용하자고 권한다.

세상 멋진 이 아이, 그레타 툰베리도 스웨덴 아이다. 툰베리는 여러 국제 행사에 참석하면서 모든 여정을 기차 여행이나 항해로 소화했다.

내가 고국을 기차와 배로 방문하려면 가는 중간에 휴가가 끝나버릴 것 같아서 나는 플뤼그스캄을 계속 가져야 할 것이나, 이런 뜻깊은 단어들을 만들어내는 스웨덴 사람들은 꽤 멋지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플뤼그스캄 운동을 해야지.


우리말 속에 알게 모르게 숨어 들어와 있는 생각거리들.

우리말에서 사람들이 크게 주목하지 않지만 내가 가장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다르다'와 '틀리다'의 구별이다.
"네가 저번에 사고 싶다고 말한 옷 이거 맞아?"

"아니, 색깔이 틀려."

자연스럽게 들리지만 사실 "아니, 색깔이 달라."라고 말해야 한다.


이렇게 다르다(different)와 틀리다(wrong)가 동의어가 되어버린 사회.
둘이 동의어가 되는 사회에서는 나와 다르면 너는 틀린 거다.

다른 것을 싫어할 수는 있지만, 다른 것에 다짜고짜 폭력을 가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틀리거나 잘못된 것에는 비난을 가하고 사람에 따라선 돌을 던질 수도 있는 명분이 슬그머니 생겨버린다.

소위 진보적이라고 자신을 칭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도 유독 동성애자와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날을 세우는 사람들이 많다. 다름이 곧 틀림이 되어버린 사회. 그리하여 우리 사회는 유독 나와 같지 않은(different) 소수를 틀리다(wrong)고 말하며 그저 다를 뿐이었던 그 소수를 폭력적으로 바라보게 된 건 아닐까.



첫째는 글자가 있으면 행복한 아이다. 공룡을 유난히 좋아하거나 차를 유난히 좋아하는 아이가 있듯, 이 아이는 글자와 숫자를 유난히 좋아한다.

염원을 담은 단어, 쇼콜라데(초콜릿).

글자와 숫자들이 가득한 세상은 이 아이에게 얼마나 기쁜 곳인가.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표지판에 붙은 거리 이름을 읽고 집집마다 붙은 주소의 숫자를 큰 소리로 외치면서 세상 행복한 얼굴을 하고 팔랑팔랑 뛰어다니는 아이를 보면 내 마음에도 행복이 찰랑거린다. 하지만 이 글자들, 사회적으로 합의된 이 기호들이 엮여 만드는 힘을 아이는 어떻게 이해하게 될까. 내가 아무리 중립적이고 싶어도 우리 아이들은 처음으로 나를 통해, 즉 내가 알려주는 이름과 내가 설명해 주는 뜻을 통해 세상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정명은 늘 나에게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어려운 과제다.


정명을 하려면 나부터 이름을 바르게 하고 그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할 텐데.

내 생애 두 번째 이름은 엄마. 나는 엄마라는 이름에 걸맞게 잘 살고 있나.
내 생애 세 번째 이름은 무엇이 될까. 세 번째로 붙을 이름이 있긴 있을까.


사실 나는 브런치에서 주는 작가(作家)라는 호칭이 어색하다. 몸에 맞지 않는 반짝이 드레스를 입은 느낌이다.
사실 <나는 철학하는 엄마입니다> 때문에 누구에겐가 작가님이라고 불리는 경우도 많아졌다. 하지만 책  권이 나온다고 감히 저런 칭호를 받아도 되는 걸까 싶다. 어림없지 않을까. 저자(著者)라면 몰라도  같은 인간이 작가라니. 뒤에 () 자가 붙는 사람들은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 아닌가.

게다가 카뮈가 이런 말을 했다.

"문명이 스스로를 망가뜨리지 못하도록 막는 게 작가의 임무다.(The purpose of the writer is to keep civiliztion from destroying itself.)"
지구 수비대가 되라는데 나는 지금 내 사지육신 건사가 힘든 사람이다.

공자님 말씀에 따르면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가 신하답고, 작가가 작가다워야 할 텐데 나는 망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철학하는 사람으로서 회의주의가 디폴트로 뇌에 탑재된 일개 개인의 생각이고, 브런치에서 주는 작가라는 이름에 설레어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그런 설렘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가 생각해 본다. 그런 이름으로 불렸을 때, 듣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또다시 꽃 한 송이가 핀다. 내가 쓰는 글 앞에 더 진지해지고 글쓰기가 즐거워진다. 이름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다시 그 이름을 만든다. 그래서 나는 브런치에서 작가라는 이름을 주는 의미를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작가라는 이름을 쓰면서 그 이름을 제대로 만들어 가라고. 정명을 실천하는 글쓰기를 하라고.

사물의 이름 가르쳐주기와 정명(正名)

우리 부부는 첫째 아이가 많은 것을 즐겁게 짓는(create) 사람이 되라고 지음이라는 이름을, 둘째는 따뜻하게 많은 것을 이어주는(connect) 사람이 되라고 이음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외국에서 태어났고 아마도 오랜 시간 외국 생활을   같아서, 뿌리를 잊지 말라고 일부러 한글 이름을 붙였다. 아이들이 이름의 뜻을 깊이 생각해 보는 날이 온다면, 그리고 자기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름과 조화롭게   있다면  좋겠다. 지음이가 지음이답고 이음이가 이음이다우며 너희들의 엄마인 내가 나다울 수 있기를.

사물의 이름 가르쳐주기와 정명(正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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