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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Dec 23. 2019

엄마, 멍청이 먹고 싶허.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하이데거

엄마, 멍청이 먹고 싶허.


지난여름의 일이다. 뭔가 바라는 게 있을 때 특유의 귀여운 표정으로 둘째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엄마, 멍청이 먹고 싶허.

응?

멍성이.

뭐라고?

멍싱이.


(저 녀석이 대체 뭐라는 거지...)


정답은 이거였다. 뻥튀기.

제가... 멍청이라고요? 흐흑 ⓒ a little teapot

하루는 유치원 가려고 집을 나서기 직전, 애가 현관에서 그렇게 삼김을 찾는 거다.

엄마 아빠가 얼빠진 표정으로 삼김을 모르는 눈치자, 아이는 답답하고 속상한 마음에 엉엉 울기 시작했다.

"삼김, 삼기이이이임!"

아니 삼김시대가 간 지가 언젠데 내 자식은 왜 여기서 삼김을 찾고 있단 말인가.
동생 말 알아듣기 능력자인 형아한테 물어봐도, 형아 역시 그 시절 3당 합당을 보듯 난감하다는 표정이었다.  

단어를 알아듣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했다.
집을 나서기 직전 아이가 찾을만한 것은 무엇일까. 머릿속으로 빠르게 사물들을 스캔한 결과 알아내고 말았다.
선크림. 아이 씨.


아이가 말을 배우고 단어를 발음하기 시작하면 가족들은 코난이 되어야 한다. (미래소년 말고 명탐정... 미래소년 코난 아시는 분 계시면 성인병 조심하시고 내년엔 더욱 건강하세요!) 

아. 고대 문자 해석보다 어려운 내 자식의 말 해석하기.


독해력이 다소 있는 나.

상급 레벨인 형아.

문맹 수준인 아빠.


어느 저녁 내 귀에 들려온 둘째와 아빠의 대화는 아주 가관이었다.

아이의 진지한 외계어 물음에 아무 말 대잔치 동문서답으로 대답하는 아빠, 그 둘의 대화를 듣다 보면 아 이건 마치 고승들이 선방에서 주고받는다는 심오한 철학적 대화인가 싶기도 했다.  

그렇게 지난봄의 우리 집은 두 명의 코난과 한 명의 큰스님이 이제 막 언어의 우주에서 찰방찰방 놀기 시작한 막내와 말을 섞으며 부대끼는 공간이었다.    
 

멍싱이. 삼김.

엄마가 못 알아듣는다고 속상해하며 울 땐 진땀 나고 힘들어도, 사실 너무 재미있고 예쁜 언어다. 아침이슬처럼 곧 사라질 언어들이라 더 그렇다. 멍청이, 멍싱이를 뻥튀기라고 정확히 발음하게 되면 나는 아마 가슴 한켠이 살짝 허해질 것 같다. (이 글의 메모를 써 놓았던 게 벌써 7개월 전이라 아이는 이제 봉딩이라고 발음하기 시작했다. 흐흑.)


언어는 존재의 집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아이를 보는 일은 즐겁고 놀랍다. 아이의 존재의 집이 쌓아 올려지는 과정.
언어가 아무리 모든 것을 백 퍼센트 표현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수단이라 해도, 언어를 거치지 않고 사회적 존재의 집을 제대로 지어 마을을 형성하긴 어렵다.


* 수능 언어영역 지문에 단골로 등장해서 나를 혼란에 빠뜨렸던 소쉬르의 랑그와 파롤. 아직도 헛갈린다면 랑그는 우리 사회가 만든 거대한 레고 블록 창고라고 생각하고, 파롤은 그 안에서 개개인이 블록들을 가지고 나와서 알록달록 만들어내는 다양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랑그, 창고. 라임도 나름 비슷하게 맞는다고 우겨본다.) 여기서 레고 블록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공통의 도구다. 이 도구(사회적으로 합의된 언어)를 가지고 내 존재의 집(개개인의 언어생활)을 지어야 한다. 그래야 똑같은 블록을 사용하는 다른 사람들이 내가 지은 집을 잘 이해할 수 있고, 또 그 집들이 모여 조화롭게 마을을 이룰 수 있다. 레고 마을에서 짚으로 집을 짓고 싶어 하는 아기돼지 삼형제의 큰 형을 레고 인간들은 몹시 난감해할 것이다. 짚은 레고판에 끼워지지 않기 때문에.     

또한 언어는 사유의 수단이다. 언어 이전의 사유가 어떠했을지 나는 잘 상상하기 어렵다. 오늘날과 같은 체계적인 언어가 성립되지 않았을 시절, 동굴에 벽화를 그리던 원시인들은 어떻게 소통하고 사유하고 미래를 꿈꾸고 사랑을 속삭였을까. 언어가 없었다면 아마 사랑도 힘들었을 것이다. 이것이 사랑인지 욕망인지 구별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상대의 부재에 내가 느끼는 감정이 공허함인지 무료함인지 구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수줍음과 자괴감을 구별할 줄 몰라 애태웠을 것이고, 떠난 상대에 대해서는 원망과 분노 사이에서 혼란스러웠을 것이다.(근데 사랑은 언어가 있어도 여전히 힘들긴 하다. 흥.)

언어가 분화되어 여러 개의 서랍을 가진 거대한 캐비닛처럼 카테고리를 가져야 사유도 그만큼 논리적이고 체계적이 된다. 철학은 범주의 학문이다. 전통적으로 경계를 나누고 선을 긋는 일을 해 왔다.

홉스의 <Leviathan>은 사전처럼 쓰여 있다. 특히 "인간에 관하여(Of Man)"라는 부분은 그 자체가 인간 이성의 거대한 캐비닛이다. 로크는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에서 지식의 습득에 있어 언어가 가진 추상화와 범주화의 능력에 특히 주목한다. 추상화와 범주화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 머릿속은 그야말로 질서 없는 난장판이 된다.

홉스도 싫고 로크도 싫다면 그냥 아래 사진을 보자. 그 차이가 확 느껴질 것이다.

좌) 네. 제 자식 놈들이 파이팅 넘치게 놀고 난 자리입니다.  우) 범주화의 중요성 (출처: livingcountry.com)

존재를 고민하고 사유를 전공으로 삼는 철학자들은 언어라는 수단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고,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라고 했다. 내 사고는 아무리 멀리 뻗어 나간들 내 언어의 경계선에서 멈추는 법이다. 따라서 적확한 언어의 벽돌을 써야 우리는 존재의 집을 튼튼히 지을 수 있고, 내 언어가 풍요로워야 내 세계가 온갖 빛깔과 향으로 풍성해진다.


그러므로 이 빠르고 늦는 것, 글을 좀 빨리 깨우치는 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닌 것 같다. 보다 중요한 것은 좀 더디더라도 아이의 언어 세계가 얼마나 풍요로운가, 이 아름다운 사회적 수단(발레리의 유명한 표현에 따르자면 "언어라는 아름다운 사슬")을 가지고 나의 세계를 어떻게 표현해 내는가 하는 게 아닐까.

유려한 명연설을 앵무새처럼 좔좔 외우는 사람보다, 늦게 배운 한글로 마음속 깊은 곳에 담아 두었던 말들을 툭 뱉은 할머니들의 투박한 시가 우리 마음을 움직이듯이.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건 언제나 수단 자체보다는 그 수단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글과 말이라는 수단의 획득, 그 빠르기에 일희일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글을 빨리 깨우쳤지만 험한 말을 내뱉는 아이와, 글은 아직 몰라도 세상 만물과 찬란한 말로 사랑스럽게 대화하는 아이. 나는 후자의 부모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글을 빨리 깨우쳐 책을 줄줄 읽더라도 내 마음과 내 생각을 제대로 표현 못하는 아이보다, 조금 늦더라도 내 안의 알맹이들을 열심히 표현해내는 아이들이 더 많은 칭찬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 집을, 내 세계를 튼튼하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면.

 

그런 의미에서 내 해 목표는 독일어로 존재의 집을 부지런히 짓는 일이다. 내가 아무리 가방끈이 길어도, 그것도 말발로 어디 가서 지지는 않을 (그러나 몹시 잘 진다) 정치철학 전공이라 해도, 이 사회의 언어를 하지 못하면 여기서 나는 단숨에 어린아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억울하지만 그렇다. 외국에 나오면 실제 나이와 상관없이 내가 구사하는 언어 수준만큼의 나이가 되는 법이다.

나는 독일에 와서 젊어도 너무 젊어졌다. 흠흠.

심지어 멍싱이와 삼김을 외치는 둘째보다 어릴 지경.

얼른 나이를 먹어야겠다.


언어는 사회 반영한다


새삼스런 말이지만 언어는 그 사회를 반영한다.


아이들은 독일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어 미국에 살 때 곧잘 하던 '헬로'"할로"로, '스탑'"슈톱!"이라고 발음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들어가고 독일어 실력이 늘어갈수록 어휘뿐 아니라 희한한 제스처, 새로운 문화와 낯선 규칙까지 집으로 가져오기 시작했다. 산타클로스가 크리스마스이브에 오는 게 아니라 니콜라우스 성인이 니콜라우스탁(12월 6일)에 와야 하고, 함께 보드게임을 할 때는 가장 나이 어린 친구부터 시작하고. 단언컨대 여기에서 커리부어스트(Currywurst)라는 단어를 마주하기 전까지 나는 카레와 소시지의 조합을 감히 시도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요렇게 생겼습니다.

가장 신기한 것은 모든 명사에 성별(gender)이 있다는 거였다. 우리 문화에서 태양은 남성성, 달은 여성성이 강하지만 독일에서는 그 반대다. 태양이 여성, 달이 남성이다. 치즈가 남성 명사라는 것까지는 어떻게 꾸역꾸역 꾸덕한 치즈 먹듯 이해해 보겠는데, 비키니가 남성 명사라는 데에서는 눈썹이 치켜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보통 나라 이름에는 성별이 안 붙는데 스위스, 터키 같은 몇몇 나라들만 특이하게 여성관사가 붙는 것이었다. 너희들 대체 독일과 무슨 일이 있었니.


미칠 듯이 헛갈리는 성을 외우는 일은, 내가 사물에 대해 가지고 있던 신기한 고정관념에 대한 일종의 테스트 같기도 했다. 뭔가 여성답다고 느꼈던 단어가 여성일 때, 남성답다고 느꼈던 단어가 남성일 때 왠지 나는 안도했다. 중요하고 아름다운 단어들이 여성일 때는 운동회에서 우리 백군이 이긴 듯 흐뭇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자연스럽게 여성성, 남성성이라는 개념을 내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사심 없이 훑게 되었다. 그렇게 나이 마흔에 다른 언어를 배우면서 젠더에 관한 고민을 새롭게 하게 된 거였다. 우리말을 배우는 외국인들은 아마 높임말을 배우면서 비슷한 고민을 할 것이다. 대체 한국인들에게 나이는 어떤 의미이기에 이렇게 말이 세밀하게 분화되어 있는 것일까 하고. 

이렇게 언어는 그 사회를 보여준다.


성별에 대한 얘기를 좀 더 하자면, 유치원에서 아침 조회 시간에 출석을 체크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der Constantin, die Josefine라고 이름 앞에 성별을 붙여 부르는 모습에서는 약간 뜨악했다. 우리 아이도 성 니콜라우스 어린이집 파랑반에서는 der Jium이었다.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겪는 아이가 있다면, 이런 언어는 그 자체가 감옥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소년(Junge, boy)은 남성인데 소녀(Mädchen, girl)는 중성인 부분에서는 딱 누구라도 붙잡고 시비를 걸고 싶었는데 도대체 독일어 단어 성별에 대한 시비는 누구에게 걸어야 할지 몰라서 못 걸었다. (어린 여자아이에게 성별의 코드를 씌우는 것이 부적절한 일이라면 둘 다 중성으로 하든가!)

만물에 성별이 있다는 것이 아이들의 상상력이나 도덕규범을 많이 제약하는  아닐까, 쓸데없(기를 바라)는 걱정이 들었다.


번역이 난감하기로 잘 알려진 독일 단어 중에는 Schadenfreude가 있다. 다른 사람의 불행에서 행복을 느끼는 감정을 말한다. 아 나 이 사람들. 허허.
최근에 알게 된 특이한 단어로는 Wildpinkler가 있다. 화장실을 가기 싫어하고 밖에서 볼일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란다. 운전을 하다 보면 하필 누구나 주목할 수밖에 없는 그 어떤 교통의 요지에서 당당히 근심을 해소하는 아저씨들을 많이 본다. 아 왜들 저러시나 했더니, 단어가 따로 있을 만큼 많이들 그러나 보다.

독일은 미국에 비해 노출이 상대적으로 자연스럽다. 갓난아기도 수영복은 텐트 안에서 갈아 입혀야 할 만큼 아이의 프라이버시에 민감했던 미국에 살다가 독일로 오니, 호수에서 말간 알몸으로 수영하는 아가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유난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자연스럽고 좋아 보였다. 아직 Wildpinkler 님들까지 자연스럽고 좋아 보이진 않지만.  

우르두어에는 나스(NAZ: 조건 없이 사랑받고 있다는 걸 알기에 느끼는 긍지와 자신감)라는 아름다운 단어가 있다고 하고, 페르시아어에는 티암(TIAM: 누군가를 처음 만난 순간 반짝이는 눈빛)이라는 매력적인 단어가 있다고 한다. 밀란 쿤데라는 리토스트(LITOST: 불현듯 자신의 비참함을 깨닫게 된 사람이 느끼는 고통)라는 체코어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 단어를 번역하기 위해 많은 외국어를 살펴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사람들이 이 단어 없이 어떻게 인간의 영혼을 이해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말, 외국어로 번역하기 어려운 말을 찾아보면 우리 사회가 어슴푸레 보일 거란 생각이 든다.
뭐가 있을까. 정(情)? 중국에도 있으려나.

품사계의 올라운드 플레이어인 '거시기' 안에 든 유머와 페이소스를 나는 사랑한다.

개인적으로는 외국 친구들에게 '고소하다'는 표현을 이해시킬 때 좀 힘들었던 경험이 있다.

한, 눈칫밥, 내숭.
부정적인 단어보다는 예쁘고 아름다운 말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랄까, 받이 같은 단어는 남들 앞에서 번역할 일이 없기를 바란다.


아이들의 언어는 부모의 언어를 반영한다


언어에 사회가 반영되듯이, 아이들 말에는 어른들의 말본새가 투영된다.

아이의 말은 어른들의 언어 습관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들의 언어는 곁에 있는 사람들의 언어를 그대로 흉내 낸 것일 수밖에 없다.


식탁에 모두 앉아 밥을 먹는 시간.

동생이 물을 촤악, 멋지게 쏟자 옆에 앉아 장조림을 입에 넣던 첫째가 시크하게 내뱉었다.

“아우, 못 살아.”

(네... 애들이 사고칠 때마다 만트라처럼 되풀이하는 저의 시그니처 문장입니다...)

부모가 되고 나면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자신의 언어 습관을 꼭 돌아보게 된다.
아이들 앞에서 말조심해야 한다는 것은 진리 중에 상진리다.

스펀지처럼 쭉쭉 빨아들이는 아이들은 그 빨아들이는 물이 맑은 물인지 구정물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세간에 모 일보 모 전무의 초등학생 자녀가 운전기사에게 한 폭언이 회자된 적이 있다.
“아저씨는 장애인이야. 특히 입하고 귀가 없는 장애인이라고. 미친 사람이야.”
아이가 뱉은 말이 그대로 기사화된 것이 내심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그러면서 나도 쓰고 있다), 아이가 한 말이라고 보기에는 의심스러울 만큼 험한 말이었기에 더욱 논란이 되었을 것이다.
주변 어른들이 피고용인을 어떻게 보아왔는지 알 법한, 인간성이 결여된 언어들.
특히 입과 귀가 없는 장애인이라고 특정했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듣지도 말고 감히 입에 담지도 말라는, 고용인으로서의 집안 어른들 의중이 슬그머니 드러난 문장.  


게다가 장애인은 미친 사람이라고? 주변의 언어 환경을 잘못 만난 이 아이를 탓하고 싶지는 않지만, 와 이게 대체 무슨 미친 소리인가.

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 빨강반에 눈이 약간 불편한 선생님이 있다. 인지 능력에도 살짝 불편이 있는 것 같다. 아이들과 술래잡기를 하며 온 유치원을 통틀어 가장 신나게 뛰놀아주는 선생님이고, 크리스마스 때는 아이들에게 직접 뜨개실로 귀여운 코끼리 인형을 만들어 하나하나 선물해 준 선생님이다. 그분을 보고, 또 이 귀여운 파란 코끼리를 보고 있으면, 불편함을 가진 분들을 미친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그 생각이 좀 미친 거란 생각이 든다.  

미치도록 귀엽긴 하다  ⓒ a little teapot

함께 지어가는 존재의 집


예전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우리 호랑이들이 멸종 위기에 놓인 건 이것 때문인가) 사람을 볼 때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을 보곤 했다고 한다.
인물 좋고, 말 잘하고, 글 잘 쓰고, 판단이 정확한 것.
우리 아이들이 신언서판 네 가지를 고루 갖춘 인재로 크리라는 섣부른 기대는 지만, 넷 중에 하나만 고를 수 있다면 말이 따뜻하고 맑은 사람이면 좋겠다.
독일어와 영어와 한국어 사이에서 방황하느라 존재의 집을 짓는 블록이 몹시 혼란스럽겠지만, 최선을 다해 따끈한 온돌 집을 지어주기를.


큰 아이는 토요일마다 가는 뮌헨 한글학교 앵두반을 지난주에 졸업했고 내년에는 포도반에 들어간다. 뭔가 군침도는 이름들이다. 스읍.
형이 앵두반에 입학할 때 둘째는 자기는 자두반에 가겠다며 야심 차게 조그만 가방에 자기 기저귀와 장난감들을 챙겼으나 애석하게도 자두반은 훨씬 큰 형아들이 가는 곳이다. (열매의 크기에 따라 반이 정해진다. 앵두, 포도, 딸기, 자두, 사과, 참외, 수박반. 성인반으로는 다래, 유자, 머루반이 있다. 반 이름만 쭉 읽어도 비타민이 섭취되는 느낌이다. 예쁜 한글 이름들. 점점 크게 열매 맺어가는 아이들. 누가 지으셨는지 이름을 너무 잘 지으신 것 같아 매번 감탄한다.)

큰 아이는 온갖 글자 읽기를 좋아해서 선생님들을 놀라게 하지만 아직 자기표현은 많이 서툴다.
작은 아이는 아직 바람이 새는 귀여운 아기어를 구사하는데, 조잘조잘 이상한 인과관계로 쉴 새 없이 말을 건넨다. 이 말랑말랑 어여쁜 언어의 시기를 함께 할 수 있어서 재미있고 행복하다.


아이들은 부지런히 한국어를 배우고 나는 농땡이 부리지 않고 독일어를 배워서, 우리가 서로를 궁금하게 바라보고, 격렬하게 싸우고, 멋쩍게 화해하고, 최선을 다해 이해하려 할 때, 언어가 아름다운 수단이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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