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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Mar 01. 2020

독일 유치원 맛보기 (2)

무엇이 무엇이 좋았는가: 성 니콜라우스 어린이집 (하임하우젠)

앞 글에서 이어 씁니다.
https://brunch.co.kr/@jinmin111/70


6. 다섯 개의 반이 모두 다르다


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에는 유아반 두 반(빨강, 하양), 유치반 세 반(보라, 파랑, 초록)이 있어요. 그런데 반마다 환경도, 규율도, 구비된 장난감들도 조금씩 다릅니다. 배우는 것들도, 하는 활동도 모두 조금씩 다르고요. 반마다 율성이 강조되는 느낌입니다.


1) 반마다 규율이 다른 점은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파랑반은 체조 시간에는 꼭 운동복으로 갈아입게 하고, 각자의 운동복과 운동화가 든 가방을 자기 자리에 걸어두게 하지만, 초록반은 체조가 있는 요일에는 집에서 좀 편안한 옷을 입고 가면 됩니다. 또, 다른 반들은 모두 개별적으로 자기가 먹을 Brotzeit를 싸 오지만 하양반은 돌아가면서 한 집에서 모든 아이 것을 한 번씩 맡기로 해서 애들이 평소에 가방을 메고 다니지 않습니다. 굉장히 자율적이죠. 또 규율을 만들고 진행하는 일에 선생님, 아이들, 학부모들이 골고루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들이 일방적으로 지정하는 게 아니라요.

Brotzeit. 시립 유치원인 Kinderhausen 홈페이지에 실린 홍보용 사진입니다.

* 참고) 독일 남부에서 시작되어 전통적으로 즐겨온 Brotzeit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Bread Time. 전통적으로는 브레첼이나 곡물빵에 버터, 스프레드, 각종 치즈와 살라미, 삶은 달걀, 피클 등이 촤라락 곁들여집니다.

(사진출처: unsere-bauern.de)

유치원에 싸 가는 Brotzeit는 그냥 간식으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아요. 주로 브레첼이나 샌드위치에 과일 약간이 기본이고 요거트, 치즈, 소시지 같은 것을 더 싸 오기도 합니다. 간식 시간에 다 같이 먹는 게 원칙이지만 아침을 안 먹고 와서 배고프면 가자마자 조금 먹어도 돼요. 유치원 가는 길에 빵집에서 빵 하나 사가면 되기 때문에 큰 부담은 없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반에서 아이들이 오가며 먹을 수 있게 선생님들이 탁자 위에 늘 과일과 채소를 준비해 두시기 때문에 더 부담이 없어요. 러나 요리를 좋아하는 엄마는 아침마다 열심히 싸서 보내곤 합니다(다시 말하지만 사서 고생하는 타입).

음식 사진은 즐거우니 꽉꽉 구겨서 넣어본다

2) 반마다 구비된 장난감이나 환경도 다릅니다.  

예를 들면 둘째가 다녔던 유아반은 탁 트인 공간 구성을 기본으로 구석마다 아기자기하게 다른 포인트를 주고 볼풀이 있었고요. 유치반들은 대체로 계단으로 층이 나뉜 아늑한 놀이공간이 구비되어 있는데, 반마다 다르게 꾸미고 색다른 장난감들을 갖추어 두었습니다. 장난감은 조금씩 새로운 게 생기는 것 같아요. 정말 장난감이라고 이름 붙은 것들이 오기도 하고, 생활 용품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는 초록반에 실을 잣는 골동품 물레가 등장.

이렇게 모두 다르기 때문에 다른 반에 놀러 가는 게 참 즐거운 일이라고 합니다.

반마다 다른 구성

보라반 앞 복도에는 커다란 특수 모래통이 있어서 아이들이 틀로 모양을 찍느라 바쁘고, 파랑반 앞에는 레고 테이블과 바닥 놀이용 매트가 있습니다. 초록반 앞에는 작은 수퍼마켓이 있어요. 빨강반 앞에는 거대한 목조 놀이기구, 하양반 앞에는 인디언 텐트와 벽 놀이가 있고요. 그리고 매년 조금씩 바뀌거나 변화가 생깁니다. 작년엔 보라반 앞에 자석놀이 세트가 가득한 카펫, 초록반 앞에 레일을 깔 수 있는 기차놀이 세트가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하양반 앞 벽놀이 세트는 우리 집 벽에도 붙여놓고 싶어요. 내가 잘 할 수 있는데.

3) 큰 테마에 부합한다면 반별로 활동이나 수업 내용 역시 자율적으로 진행합니다.

예를 들어 올해의 테마는 마법 가득한 동화 나라 <Zauberhafte Märchenwelt(Magical fairytale world)>인데, 자율적으로 반마다 읽고 싶은 동화를 다양하게 선택하고 있어요. 다수결로 선택하는 반도 있고(이러면서 다수결 원리에 대해 배웠다고요), 아이들이 추천을 한 것 중에서 제비뽑기를 하는 반도 있고, 선택하는 방법도 다양하다고 하네요. 첫째네 반에서는 1월엔 빨간 모자, 2월엔 개구리 왕자를, 둘째네 반에서는 1월엔 룸펠스틸츠헨, 2월엔 매직 팟으로 활동을 진행 중입니다.

종이 접기로 만든 빨간 모자들이 우글우글
룸펠스틸츠헨이 불을 피워놓고 불가를 돌면서 부르던 노래도 배웠고, 겁내 귀여운 개구리 왕자도 접어왔습니다.

첫째네 반에서는 매일 개구리 왕자를 뽑는다고 하는데 뽑아서 뭘 어쩌는지는 모르겠고요. 지금은 반을 거대한 궁전처럼 꾸며놓았습니다. 둘째네 반에서는 다 같이 매직 팟에 나오는 Süße Brei(sweet porridge)를 만들어 먹을 예정이니 그 날 하루는 간식을 싸오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웃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만들었을지 몹시 궁금)

나도 갖고 싶다 매직 팟, 이왕이면 쇠고기 전복죽 나오는 걸로

아래 사진은 보라반 복도에 걸린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입니다. 귀여워라.

나 아닌 거 아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그냥 이야기만 듣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필요한 부분들을 수업으로 진행시키는 모양이에요. 예를 들어 빨간 모자 이야기 안에서는 우리의 감각(sense)에 대해 배웠다고 합니다. 할머니로 변장해 누워 있는 늑대와의 대화 중에 "할머니는 왜 그렇게 눈이 커졌어요? 귀가 왜 그렇게 커요? 입은요?" 이렇게 묻고, 늑대는 각각의 질문에 "너를 잘 보려고, 네 목소리를 잘 들으려고, 너를 잡아먹으려고!"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오감과 관련한 내용을 배우기에 적절하다고 판단하셨던 거죠.


이렇게 큰 테마 아래 자율적으로 다양한 이야기들을 선정해서 1년 수업을 진행해가는 모습이 제가 보기에도 재미있고 즐겁습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실천하는 느낌이랄까요. 이렇게 반마다 다른 것을 배우면 다른 반 친구들이 자랑하면서 서로에게 설명해 줄 수도 있고요,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모두가 같은 규율, 같은 내용으로 획일적인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그리고 다른 집단의 규율과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점이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내면에 자리 잡을 것 같아 꽤 좋다고 생각합니다.  


7. 간소한 알림장


이건 제 브런치북 <철학하는 엄마>에서 분리불안에 대해 쓴 글에도 살짝 들어있는 내용인데요.

저는 아이들의 하루하루가 굉장히 궁금한 타입의 인간입니다. 늘 옆에서 꼬물꼬물 불어있던 따뜻하고 말랑한 것들이 없어지니 마음이 허전하더라고요.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고, 말은 잘 통하는지 걱정도 되고요.


그래서 처음엔 오가는 게 아기자기하게 많은 한국 어린이집의 소통 시스템이 부러웠습니다.
지인들의 소셜 미디어를 보면, 한국의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선생님들께서는 정성스럽게 아이의 하루하루에 대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알려주시고 사진도 많이 올려주시더라고요.
하지만 저희 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의 경우, 애가 크게 다친 곳 없이 하루를 잘 보냈으면 그냥 그걸로 끝입니다. 내가 독일어를 잘 못해서 과묵한가 싶었지만, 독일인이고 외국인이고간에 다 그냥 과묵하더라고요. 허허.


반마다 주간 활동을 간략하게 알려주는 알림판이 붙어있는데요. 아이가 뭘 했는지 알 수 있는 정보는 기본적으로 이게 다입니다. 독일 유치원은 파티도 소박하지만 벽에 붙은 알림장도 소박하달까요. 사진에서 보듯이 하루하루 뭘 했는지 간략하게 적어두는 게 전부고(주로 “아침 조회를 하면서 어떤 주제에 대해 얘기했어요, 다른 반에 가서 놀았어요, 다 함께 어떤 책을 읽었어요, 간식을 먹었어요, 밖에서 놀았어요” 정도), 그 마저도 별로 특별한 일이 없으면 선생님이 한 주 정도 안 쓰고 넘기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선생님 부디 좀 관심을...)

생각해보니 길게 썼으면 아마 내가 해석을 못했을... 긁적

그래서 알림장이며 어플 등으로 아이들이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 다정하게 알려주시는 한국 시스템이 부러웠지요. 그런데 그러다 보니 그 시스템의 부정적인 측면도 살금살금 귀에 들려오기 시작하더라고요. 어느 유치원의 경우, 선생님이 알림장을 쓰시는 약 30분 동안 아이들을 모아놓고 만화를 틀어주시는데요. 집에서도 애써 피했던 TV, 그것도 선악의 구도가 극명한 로봇 만화영화를 보여주는 게 별로 달갑지 않았다고 해요. 한편, 일일이 알림장을 적는 것은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일이라 교사들 입장에서도 꽤 부담이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부모 입장에서만 생각했구나 싶더라고요. 저도 대학에서 아이들 중간 기말 페이퍼를 채점하거나 쪽글에 코멘트를 달아봐서, 모두에게 일일이 뭔가를 써준다는 게 얼마나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소비되는 일인지를 잘 알거든요. 저만해도 할 일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상당히 달라지는 걸 느낍니다. 내가 딱히 할 일이 없어서 그냥 아이들과 편히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때, 저도 아이도 가장 많이 웃게 되더라고요.


거기에 생각이 가 닿으니 처음에는 좀 아쉽다고 생각했던 저 간소한 알림장이 사실은 장점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 돌보기도 바쁜 선생님들께, 부모로서 바라는 걸 좀 줄이면 어떨까요. 어린이집 교사들의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가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각종 마음 아픈 사고들의 이유가 조금이라도 된다면 더더욱요. 선생님들이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더 관심을 가져주고 적절히 보살펴주시는 것, 사실 부모들이 가장 바라는 건 그게 아닐까 합니다.


대신에 이 유치원에서는 매 학기마다 아이의 발달이라든가 유치원 생활 전반에 걸쳐 체계적인 개별 상담을 진행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고요. 또 커다란 개인 파일 안에 아이가 유치원 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찍은 사진들, 아이가 그렸거나 만들었던 것 중에서 근사한 작품들, 이런 것들을 차곡차곡 모아 뒀다가 유치원을 졸업할 때 커다란 앨범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이 파일은 현재도 반마다 쪼로록 구비되어 있는데, 원하는 부모는 언제든 볼 수 있게 되어있어요. 또 특별히 파랑반에서는 매월 말이 되면 그 달에 진행한 행사라든가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아래처럼 전시해 주시고 계십니다. 올해 들어 처음 생겼는데, 사진에서 아이 찾는 재미가 쏠쏠하네요.

이번 달엔 경찰서에서 오셔서 5-6세 아이들과 함께 길을 돌아다니며  교통안전에 대해 알려주셨고, 근처 학교의 청소년 형 누나들이 와서 쇼도 보여주신 듯...?

8. 바깥 놀이, 바깥 활동의 중요성 (feat. 더럽기를 권장하는 어른들)


Kindergarten은 Kinder(children)와 Garten(garden), 즉 아이들과 정원/마당의 합성어임을 독일에서 몹시 매우 격렬하게 느낍니다. 유치원이란 것이 기본적으로 수업하는 건물이 아니라 뛰어노는 마당인 건가 봅니다.

아이를 데리러 갔더니 거대한 지옥의 불구덩이가 건설되어 있었다

처음에 애들을 유치원에 보낼 때 필요한 물건들 리스트를 받았는데 처음 보는 단어가 있었어요.

Matschhose. (실은 이것 말고도 98%가 처음 보는 단어였... 크흑)
번역기를 돌려보니 Mudpants라고 나오는 것. 대체 무슨 물건인고.

알아보니 이런 것이었습니다. 방수가 되는 놀이 바지. 유치원에선 이걸 입혀서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사시사철 내보냅니다. 겨울에는 추우니까 이걸 한 겹 더 입고 유치원에 오기도 하고요. 줄창 입고 다녀서 무슨 개인 교복 같은 느낌이에요.


놀이 바지와 개인용 선크림은 거의  늘 있어야 하는 아이템이고, 여름과 겨울엔 각각 물놀이와 눈놀이를 대비한 준비물이 더해집니다. 겨울에는 아이들이 사물함에 개인 썰매를 갖다 놓고 타기도 하고, 여름에는 수영복과 타월 세트가 필수. 아이들 데리러 갔더니 꼬꼬마들이 잔디밭에서 각자 자기 타월에 누워 일광욕하고 있는데 얼마나 귀엽던지요. 사진 찍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혼났습니다.


물놀이도 전체가 다 하는 게 아니라 그날그날 기분 따라 하고 싶은 사람만, 하고 싶은 만큼 참여할 수 있게 정원 한쪽에 만들어 둡니다. 수영복은 입기 싫지만 손 넣고 물놀이는 하고 싶은 아이들을 위해서 찰랑찰랑 물을 담아 둔 거대한 고깔, 수영복을 입고 풍덩 빠질 수 있는 작은 풀, 그리고 축구를 하다가도 맞을 수 있게 정원을 가로지르는 스프링 쿨러와 물놀이용 호스 등이 다양하게 아이들의 물놀이를 반깁니다.  

여름이면 개장하는 꼬마 수영장. 저희 첫째가 정말 미친 듯이 좋아합니다. 전생에 최소 미역이었나 봄.

겨울에 유치원에 있는 작은 언덕에 눈이 쌓이면 꼬꼬마 눈썰매장도 개장합니다.

유치원에도 썰매가 있지만, 많지 않아서 차례를 기다려야 하므로 개인 썰매를 많이들 갖다 둡니다

바깥 놀이의 중요성이야 누구나 인정하는 부분인데 문제는 어른들이 이걸 정말로 기쁘게 권하는지, 아니면 애가 더러워져서 내키진 않지만 좋다니까 시키는 건지가 좀 다르게 느껴집니다.
사실 저도 그렇게 밖에서 많이 뛰어놀게 하는 엄마는 못 됩니다. 일단 누워있는 걸 좋아하고요(흠흠). 애들이 밖에서 거지꼴을 하고 놀고 있으면 어이쿠가 절로 나오거든요. 솔직히 저도 어린 시절에 막 더러워질 정도로 논 기억은 거의 없어요. 책 읽는 걸 워낙에 좋아하기도 했고, 집에서 책을 보고 있으면 부모님이 좋아하셨거든요. 사실 엄마 아빠가 별로 좋아하지 않으면 아이들도 덩달아 깔끔을 떨게 되느라 마음껏 뛰어놀지 못하는 것 같긴 해요. 그래서 웬만하면 제 아이들은 마음껏 더럽히며 놀게 해 주고 싶지만 그게 참 마음 같지는 않습니다.

놈들이 귀가할 때마다 현관에 해운대 백사장이 펼쳐진다 (살려주세요)

그런데 독일 놀이터(대체로 물과 모래가 중요 아이템)에 가 보면, 애들이 펌프질을 해서 진흙으로 떡을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 있어도 벤치에 앉은 부모들의 표정이 놀랍도록 초연한 경우를 많이 봅니다. 너무 본받고 싶은 멘털인데 잘 안 본받아지는, 마치 부처님과도 같은 그 연함. 


비가 오다가 해가 났더니 유치원 선생님이 정말 세상 행복하다는 얼굴로 "우와, 해다! 오늘은 밖에서 놀 수 있겠어!!!"하고 아이에게 진짜로 기쁜 듯 말을 걸어주실 때 느꼈어요. 아, 진짜 해가 나서 밖에 나갈 수 있어서 되게 좋으신가 보다.  


9. 엘턴 바이라트(Elternbeirat) 및 부모들의 활동


엘턴 바이라트는 학부모 대표들의 모임이라고 할까요. 우리나라의 학부모회입니다. 독일에서 학부모가 되면 알게 되는 중요한 단어가 엘턴 아벤트(Elternabend)인데요, 직해하자면 '부모들의 저녁.' 부모들이 학기마다 1회 정도 모여서 교사들이 학교/유치원 운영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도 듣고, 질문이나 토론도 하고 그러는 모임이에요. 여기에서 반마다 대표를 선출하는데 이 분들의 모임이 바로 엘턴 바이라트. 선생님과 학부모 간에 가교 역할도 하고, 학교/유치원의 발전을 위해 함께 고민하고, 행사에 부모들의 서포트도 고민하고, 자체적인 행사도 열고 그럽니다.


저희 유치원의 예를 들면 가끔씩 엄마 아빠들이 아이들을 데려다 놓고 잠시 한 방에 모여 커피와 케이크를 들면서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엘턴 카페 같은 것을 만들기도 하고요. 자체적으로 벼룩시장을 열기도 합니다. 딱 그 나이대의 아가들과 친구들이 필요한 물품과 장난감들이 나오기 때문에 꽤 쏠쏠해요. 

올해의 유치원 벼룩시장 안내문. 저는 그놈의 Matschhose를 사러 갈 예정입니다.

여름 축제 같은 때는 부모들이 자발적으로 음식을 조금씩 가져와서 뷔페를 차리고, 행사가 있을 때는 케이크와 음료를 협찬해서 나오는 수익금을 유치원에 기부하기도 해요. 경험해 보니 꼭 엘턴바이라트만 부담을 짊어지는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많은 부모들이 참여하는 모습이 보기 좋더라고요. 예를 들어 벼룩시장을 열 때는 케이크 종류를 구워 올 수 있는 집, 케이크와 음료 판매를 담당할 수 있는 집, 행사 후 정리를 도와줄 수 있는 집, 이렇게 크게 세 덩어리로 나누어 벽에 빈 리스트를 붙여두어 시간별로 자발적인 참가 신청을 받고요. 부모들이 각종 케이크와 음료를 협찬하면 또 다른 부모들이 이를 싼 값에 판매하고 그 수익금을 기부합니다. 아이들 소풍 갈 때 버스 대절비 같은 걸 이걸로 충당한다죠.


이런 행사를 할 때 가장 인상적인 것은 각자 피크닉 바구니 같은 곳에 식기류와 수저, 컵을 챙겨 온다는 점입니다. 일회용품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안 챙겨오면 먹을 수가 없다는. 물론 각자 식기류를 챙겨 오라는 쪽지가 엘턴 바이라트로부터 전달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저 행사를 돕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이렇게 교육적인 부분과 환경적인 측면도 생각한다는 점. 유치원 때부터 아이들이 이렇게 일회용품의 편리함보다는 수고스러운 뿌듯함을 알게 해 주니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경우처럼 행사를 효율적으로 해치우자는 결의가 넘치는 스피릿이 아니라, 같이 좋은 방향을 고민하고 온 가족이 느긋하게 즐기면서 참여하는 모습이 좋더라고요.    


우리나라 학부모회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주로 똘똘한 자식놈을 둔 부모들이 시간과 노력(과 돈...)을 헌납하는 모임이었던 것 같은데, 여기는 반 대표 부모가 꼭 그럴듯한 직업을 가질 필요도 없고 한다고만 하면 너무나 좋아하면서 박수를 칩니다. (초등학교에 올라가면 공부 잘하는 아이 부모들 입김이 세지는 지는 한 번 봐야겠습니다. :)) 
우리나라 학부모들이 전체적으로 많이 까다롭지 않나 하는 얘기를 Play Fund 민 매니저님께 들었는데, 여기는 기본적으로 선생님에 대한 학부모들의 신뢰가 크고 서로 간에 별로 원하는 게 없는 느낌이에요.


유치원 측에서는 반대로 부모들을 대상으로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큰 명절에는 즐겁고 소소한 워크샵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유치원 선생님들이 대체로 만들기 분야 능력자이시니, 그 재능을 부모들에게 기부하는 거죠.
예를 들어 작년 부활절 때는 달걀 껍데기 공예, 초 만들기, 종이접기 중에서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할 수 있었고, 크리스마스 때는 천사, 아드벤츠크란츠(Adventskranz, 12월에 주일마다 하나씩 총 네 개의 초를 켜는 촛대. 크리스마스 리스처럼 생겼어요.), 과자 집 만들기 같은 것들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어요. 물론 하고 싶은 사람에 한해서 신청하는데, 단돈 1유로의 참가비만 내면 같이 떠들면서 재미있게 만들고, 만든 것을 집에 가져갈 수도 있고, 또 배운 대로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다시 만들어 볼 수 있어서 저는 무척 좋았답니다. 선생님들이랑 학부모들이랑 편하게 수다를 떨며 친해질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고요(물론 독어가 짧은 저는 복화술을 시도해야 합니다만...). 집에 있는 아내에게 선물로 초를 만들어 주겠다고 혼자 오셨던 한 스윗한 아저씨가 기억에 남습니다.

저는 부활절엔 튤립과 나비를, 크리스마스엔 젤리곰이 든 작은 오두막과 기차들을 만들어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저는 선생님들과 부모들의 관계가, 서로 그다지 크게 요구하거나 바라는 게 없는 가운데 신뢰가 기반이 된 친구 같은 관계처럼 보여서 참 좋았습니다.


10. 매년 중심 주제가 있다


이미 언급된 부분인데, 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에서는 매년 테마를 하나씩 잡아서 1년 내내 관련된 행사들을 아기자기하게 만들어 갑니다. 매해 새로운 주제로 1년을 꾸려가는 모습도 꽤 근사한 점이 아닌가 해요.


1) 아이들이 다녔던 첫 해의 테마는 '소리와 음악'이었습니다. 계절별로 내 귀에 들려오는 소리에 대해 알아보고, 어떤 공간(ex. 공사장, 농장)에서는 어떤 소리가 나는지 꼽아보고, 가을 숲으로 소리 채집 소풍을 떠나기도 하더군요. 또 일 년 내내 이런저런 악기를 경험해 보고, 각국의 음악을 들어보고, 축제 기간에는 흥겨운 음악이 울려 퍼지는 디스코 룸을 만들기도 하고, 악기 연주자인 부모님들이 줄줄이 초대되어 자신이 연주하는 악기를 설명해주고 질문을 받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생일에는 유치원에서 손으로 핸들을 돌려 작동시키는 작은 오르골을 선물 받아 왔고요.

 이 자식, 색칠을 이렇게 온 힘을 다해 성의 없게 하다니

2) 작년의 테마는 '우리가 사는 세계'.

다달이 새로운 나라에 대해 배우고, 교실로 쓰지 않는 방에다 그 나라의 테마로 꾸민 플레이룸을 만들기도 하고,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들이 있는 반은 특별히 그 나라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예를 들어 첫째가 있는 파랑반에는 미국에서 온 제임스, 터키에서 온 베어렌,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온 니클라스와 한국에서 온 제 새끼가 있었거든요. 이 중에서 원하는 부모에게만 30분가량의 소개 세션을 부탁하더라고요. 꼭 와서 소개를 직접 하지 않더라도 관련된 물건들이나 사진만 주어도 좋다고요. 부모들이 흔쾌히 자국의 간식거리와 사진, 플래카드 등을 들고 참여해 주었습니다. 여름 축제인 Sommerfest 때는 선생님들이 게임 코너를 각 대륙별 나라와 관련된 게임으로 만들고, 부모들은 세계 각국의 음식 뷔페를 차리고, 아이들은 다양한 나라와 관련된 노래와 춤, 연극을 선보이기도 했는데 그중에 강남 스타일 댄스 커버도 나왔다는 사실. 

Hort라고, 유치원 건물에서 방과 후 시간을 보내는 초등학교 형 누나들의 공연이었습니다.

3) 그리고 올해의 테마는 말씀드린 대로 마법 가득한 동화 속 세계.
3월에는 첫째네는 장화 신은 고양이, 둘째네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읽을 모양인데 또 어떤 즐거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저도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길게는 4-5년을 보내는 곳이 어린이집인데, 이런 테마가 없다면 매년 아무리 조금씩 변화를 준다고는 해도 선생님도 아이들도 다소는 지루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렇게 매 해 새롭게 선정되는 테마가 있어서 이 익숙한 공간이 늘 새롭게 느껴지고 신나는 곳이 됩니다. 굉장히 영리하고 즐거운 포인트라고 생각해요.
 



이상으로 제가 독일 유치원을 경험하면서 좋다고 생각했던 점들, 우리나라 보육시설에서도 한 번쯤 돌아보면 어떨까 싶은 점들을 열 가지로 추려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물론 조금 답답한 면이나 아쉬운 점, 의문이 가는 점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아이가 때 맞추어 약을 먹어야 해서 선생님께 부탁을 드린 적이 있었는데, 독일에서는 유치원 선생님이 절대 아이에게 약을 주거나 먹일 수 없게 되어 있더군요. 아이의 체온을 재는 것도 사전에 부모로부터 동의서를 받아야만 가능할 정도로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습니다. 알레르기가 있는 아이의 경우 위급한 상황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미리 의사의 동의서와 투약법을 제출하면 그런 경우에만 투약이 가능하다고 하네요. 이해가 안 가는 바도 아니고 그게 타당할 수도 있겠다 싶지만, 급한 상황에서도 책임 문제 때문에 조금 움츠리는 일이 있진 않을까 싶은 걱정도 들었습니다.   

그밖에도 선생님들이 대체로 좀 무뚝뚝하고 우리 기준에서 보면 과하게 엄격한 건 아닌가 싶기도 할 때가 있는데, 이건 그냥 독일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그런 것 같고요. 세상 살면서 백프로 만족하기는 어려운 일이죠. 저는 아이들을 보내면서 97 퍼센트 이상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번 글을 기획하면서 좋았던 점들을 추려 거기에 대해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나의 지점으로 생각이 모이게 되더라고요.

유치원이라는 공간은 대체 어떤 공간이어야 할까.


제가 한국에서 경험한 바로는 유치원은 학습이 주가 되는 곳이었습니다.
학교 가기 전에 떼어야 할 것들을 열심히 배우는 곳.
혹은 영어 유치원처럼 뭔가 특별한 배움을 기대하는 곳.

놀이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는 현재, 유치원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놀이 학교 역시 그 이름에는 놀이를 통해 아이들이 뭔가 배워야 한다는 어떤 의지가 느껴집니다.


제가 이 곳에서 아이들을 보내며 느끼는 유치원은 그냥 시간을 잘 보내는 곳입니다.

물론 많은 것을 배우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아이들이 건강하고 안전하게 놀고 먹는 곳.

자기다움을 잃지 않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곳, 숫자나 글자를 배우는 것보다는 사회 생활을 더 중요하게 배우고 경험하는 곳, 싸워도 보고 화해도 하면서 친구들을 만들어 가는 곳, 사는데 기본이 되는 것들을 배우는 곳.


유치원이 이런 곳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아무래도 사회 구조와 교육 제도, 문화와 가치관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겠죠. 공부에 크게 목매지 않는 시스템, 모두가 공부를 잘하지 않아도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는 시스템, 박사와 교수들을 크게 존중하지만 마이스터라 불리는 각 분야의 장인들 역시 존경받는 사회, 부를 과시하지 않는 독일 문화 같은 것들이 모두 복합적으로 이런 유치원 문화를 가능하게 하지 않나 싶습니다.


어느 부분들이 좋아 보인다고 해서 우리 사회 구조나 교육 제도 전반에 대한 고려 없이 그 알맹이만 쏙 가져다가 놓을 수는 없는 일이겠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떤 시도를 어떻게 해 볼 수 있을지, 생각하고 꿈꾸고 영감을 얻는 일은 늘 부지런히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저 아무것도 아닌 애들 유치원으로 볼 수도 있지만,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들은 보통 유치원에서 다 배우게 되니까요.


저는 유치원 하나로 사회 전체를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망한 제 글은 여기서 접지만, 계속 이어질 다른 특파원 분들의 글을 통해 우리는 어떤 유치원을 통해 어떤 사회를 그리고 싶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마음껏 놀고 무럭무럭 자라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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