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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Feb 22. 2020

독일 유치원 맛보기 (1)

무엇이 무엇이 좋았는가: 성 니콜라우스 어린이집 (하임하우젠)

이 글은 '아이들을 위한 제3의 공간을 좋아하는 해외 리포터'들이 같이 만들어가는 매거진 <해외특파원이 발견한 제3의 공간>에 싣기 위해 작성한 글입니다. 많은 분들이 모여 협업하는 공간이고, 저는 일원으로(특파된 적은 없지만 어쨌든 독일 특파원) 참여합니다.


제3의 공간과 새로운 경험을 고민하시는 Play Fund 측에 유치원/초등학교 시리즈를 수줍게 제안해 보았습니다.


제3의 공간은 못되더라도 한 제2의 공간쯤은 되는 곳, 아이들이 많은 시간을 보내며 노는 곳, 경우에 따라서는 제3의 공간도 충분히 될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각국에 퍼져있는 특파원들이 자녀들을 직접 보낸 경험을 통해 이런 부분이 신선하고 좋더라, 하는 부분을 각자 나눈다면 분명 괜찮은 레퍼런스 시리즈가 될 것 같아서요.


감사하게도 함께 해 주신다는 특파원 분들이 계시다기에 일단 저부터 첫걸음을 뗍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해서 쓰기 때문에 독일의 모든 유치원들이 다 이렇진 않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신선한 점들을 모아 참고로 삼자는 의도라면 대표성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용된 사진들은 초상권이 문제 되지 않는 범위에서 제가 찍은 것이거나 웹사이트에 홍보용으로 나온 사진들만 사용했음을 밝힙니다.)


그럼 시작해 볼게요.



5살, 3살인 저희 아이들은 아직 둘 다 유치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하임하우젠(뮌헨 근처의 작은 시골 마을입니다)에는 유치원이 네 군데 있어요. 지자체 소속 시립 유치원인 Kinderhausen, 가톨릭 재단인 St. Nikolaus Kinderhaus(산타클로스 어린이집), 바이에른 적십자에서 운영하는 BRK-Kindergarten Tatü-Tata(빵빵 유치원), 그리고 제가 작년에 모닝 뜀박질을 하다 발견한 숲 속 유치원. (숲 속 유치원은 어떤 시스템으로 운영되는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초등학교에서 오는 공문도 여길 제외한 다른 유치원들만 대상으로 하는 걸 보면 좀 특별하게 운영되는 곳 같아요. 작은 오두막이 하나 있고, 주로 밖에서만 노는 듯합니다.) 

1, 2, 3, 4 사분면 순으로 각각 가톨릭, 지자체, 적십자에서 운영하는 유치원, 그리고 숲 속 유치원.
유치원 선택하기 (feat. 정부 + Tag der offenen Tür)

하임하우젠은 인구가 5-6천쯤 되는 작은 마을인데, 어린이집 자리 걱정은 별로 없이 수월하게 넣을 수 있었습니다. 뮌헨 같은 대도시에서는 자리가 부족해서 대기를 해야 한다고도 들었어요. 참고로 독일에서는 아이가 3살이 될 때까지 부모의 육아휴직이 한 아이당 3년간 가능하고, 아이가 1 살이 되었는데도 어린이집에 자리가 없다면 소송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소송으로 가는 사례가 있는지, 있다면 얼마나 빈번한지는 모르겠네요. 독일도 대도시에서 보육시설이 넉넉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독일에 새로 이사를 하고 아이와 함께 전입신고를 하면, 집 주변에 어떤 유치원이 있고 빈자리는 어디에 있는지 알려줍니다. 원래 시립 유치원에 넣으려고 했는데, 시청 직원분께서 여긴 지금 유아반에만 자리가 있으니 둘을 함께 보내려면 다른 두 곳이 좋겠다고 친절하게 정보를 주시더군요. 유치원들을 방문해 얘기를 들어보니 세 유치원 간에도 협의가 되는 느낌이었어요.


이 과정에서 제일 처음으로 좋았던 것.

부모님과 아이들이 어떤 유치원을 고를지 선택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동네에 있는 세 유치원이 일제히 같은 날 Tag der offenen Tür(오픈 하우스)를 합니다. 휴일인 토요일에 진행되므로 시간을 잘 배분해서 동네 유치원 세 곳을 돌아다니며 비교를 해도 좋고, 마음에 둔 곳에만 집중해도 좋습니다. 제가 좋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이가 직접 교실에 들어가서 편안히 시간을 보내면서 선생님도 만나보고, 교실 환경도 탐색해 보고, 같이 놀아도 보는 시간을 주는 거였어요. 부모님들을 위해선 따로 다과를 준비하고요.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의 Tag der offenen Tür 포스터

세 군데를 모두 돌아본 결과, 저희는 가톨릭 재단에서 하는 산타할아버지 어린이집에 두 놈을 모두 넣기로 결정했습니다. 집에서 걸어갈 수 있고 깔끔한 느낌. 셋 중에는 마당이 제일 넓고 나무도 많아서 신나게 뛰어놀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당시 큰 아이는 세 살 무렵이라 바로 유치반인 킨더가튼(Kindergarten)에, 돌도 안 지났던 작은 아이는 유아반인 크리페(Krippe)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 동네에 사시는 지인, 그리고 앞 집 아저씨도 어렸을 때 다녔다는데(헤헤) 그때는 수녀님들께서 운영하셨다는군요. 지금은 교육 쪽 학위나 자격증을 가진 전문 교사진에 의해 운영됩니다.

아이들이 다니는 성 니콜라우스 어린이집. 저도 다니고 싶어요.
무엇이 무엇이 좋았는가

저희 아이들을 2-3년간 보내면서 경험한 것들을 토대로 이런 것들은 참 괜찮더라 하는 부분을 간추려 봅니다. 다른 유치원이 궁금해서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Kinderhausen 웹사이트를 돌아보니 하루 일과며 활동들이 꽤 비슷하게 운영되는 것 같아요.


1. 섞여 있다


1)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을 섞어 반을 만듭니다.


유치반인 킨더가튼(Kindergarten: 3-6,7세)과 유아반인 크리페(Krippe: 0-3세)가 있는데, 터울이 있는 아이들을 섞어서 반을 구성합니다. 아이들끼리 서로 자연스럽게 배려하는 법도 익히고, 도움을 청하는 법도 배우고, 자기보다 어린 동생들을 돌보기도 해서 참 좋은 것 같아요. 독일 아이들을 놀이터에서 만나보면 처음 만나는 아이라도 자기보다 어린 아이들을 배려하고 도와주는 모습이 참 고맙고 예쁜데, 이게 이런 시스템 안에서 자연스레 묻어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작고 귀여운 애들이 더 작은 애들을 귀여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건 정말 감당할 수 없는 귀여움입니다. 크으.

(귀여운 애가 귀여운 애 보고 귀엽대)

돌도 안 되었던 둘째는 여기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형과 누나들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등원할 때마다 여자애들이 "Awww..."하면서 모여든다고, "So viele Mädchen(So many girls)!"이라고 선생님이 막 웃으셨어요.


우리나라에도 혼합반이 퍼지고 있다고 하는데, 지자체의 권고 기준들을 보니 아직 대부분 연령별 반편성을 기본으로 하고 있네요. "동년도 출생아(동년도 1.1~동년도 12.31 출생아)를 함께 반편성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내용이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섞임은 그 자체로 많은 순기능을 하지만, 제가 가장 중요하게 보는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이에 따라 획일적으로 반을 구성하게 되면 그 안에서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가 뚜렷하게 구별되기 마련이고, 모두가 낙오 없이 다음 학년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생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처음부터 이렇게 섞어 두면 아이들은 늘 나보다 어린 누군가를 도와주고 가르쳐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자신감을 얻게 되고, 1-2년의 유예 같은 것도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는 듯합니다. 이 곳에서는 나이가 되면 무조건 초등학교에 가는 게 아니고, 아이가 준비되었는지 여부를 보고 1년의 유예를 갖는 것이 너무나 일반화되어 있는 일이거든요. 대학에 가기 전에도 1년 정도 하고 싶은 다른 일을 해보는 게 꽤 보편화되어 있고요. 저는 모든 과정을 빨리 마치는 게 미덕인 것으로 교육받고 자랐지만, 돌아보면 중간중간 자신의 페이스를 정비하거나 다른 것을 시도해 볼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내가 나이 때문에 등 떠밀리지 않는 느낌으로 사는 것.
그래서인지 저는 이 섞임이, 기본적으로 나이에 유연할 수 있는 마인드를 만들어 주는 시스템인 것 같아서 참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2) 선생님도 섞여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담임 선생님(Erzieherin) 한 분에 보육교사(Kinderpflegerin) 1-2분이 한 팀을 이루어 한 반을 맡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주도적으로 아이들의 일과와 커리큘럼 같은 것을 담당하고, 보육교사는 담임을 보조하며 아이들을 돌봅니다. 둘은 자격요건이 다르고, 공부하는 기간도 다르며, Kinderpflegerin들은 Erzieherin 없이 단독으로는 아이들을 지도할 수 없게 되어있는 것이 기본이라고 들었습니다.


선생님들도 페다고지스트, 아동심리를 전공하신 분 등등 전공이 다양하게 섞여 있고요. 인턴십을 하는 십 대 청소년 선생님이 학기마다 바뀌어가며 들어오고, 화요일과 목요일에만 출근하시는 할머니 선생님도 계십니다. 선생님들 연령대가 다양하다는 점도 무척 좋다고 봐요.


둘째가 처음 들어갔던 빨강반의 경우를 예로 들면, 유치원 부원장을 맡고 있는 젊은 선생님 한 분(30대), 오랜 경험이 있는 보육교사 한 분(50대), 화목에만 오시는 할머니 선생님 한 분(60대), 그리고 약간 장애가 있으신 젊은 보조교사가 또 한 분(20대). 이렇게 네 분이서 아이들을 돌보셨어요. 다양한 어른들을 만나는 경험이 참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어르신 보육 선생님들이 계시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보조해 주는 역할로, 자격시험과 요건을 일반 유치원 선생님보다는 간단히 해서요. 한 사람에게 과중한 업무를 부과하기보다는, 근무시간을 좀 유연하게 나누고 시간과 에너지가 많은 여러 사람이 조화롭게 참여하면 좋지 않을까요. 저렇게 화, 목만 오신다든지, 아니면 오전 시간만 오신다든지요. 인생 경험과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새싹 같은 꼬맹이들과 시간을 보내며 직업을 가지시는 일은 분명 국가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서로에게도 무척 좋은 일일 거라고 믿어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장애를 가진 선생님을 두는 역시 너무 좋은 제도이자 고마운 교육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좀 불편하신 분을 선생님으로 둔다는 것, 그 선생님과 함께 신나게 어울려 논다는 것이 아이들의 일생에 미칠 영향은 자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섞임의 미학이 두드러진 시스템입니다만 제가 지금껏 독일에서 만난 유치원 선생님들이 모두 여성인 점은 많이 아쉽네요.


2. 버퍼존을 준다


다음으로 좋았던 점은 뭐든 천천히, 자연스럽게 적응할 시간을 주는 점이었습니다.  

아까 유치원을 선택할 때도 오픈하우스 날이 있어서 아이들이 반에 들어가 스스럼없이 선생님도 만나고 반에서 놀아보기도 한다는 말씀을 드렸는데요, 그런 버퍼존 같은 시간들이 시스템화 되어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1) 작은 아이가 크리페에서 킨더가튼 반으로 올라갈 때도 비슷한 시스템이 있었습니다. 빨강반에서 초록반으로 올라갈 때, 그 반에 같이 가게 된 프란츠, 아멜리아 등과 함께 매일 초록반에 가서 조금씩 노는 시간을 갖게 하더라고요. 초록반에서는 모두가 환영해주고요. 그렇게 서서히 새로운 반에 적응하고, 애정을 갖게 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참고로 이 유치원은 원래도 반끼리의 이동이 자주 있는 편입니다. 유아반인 하양반 꼬마들 몇 명이 유치반인 보라반에 가서 놀고, 보라반 꼬마 몇 명은 하양반에 가서 놀고, 이런 것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반마다 구조도 다르고 갖추어 둔 장난감들도 규칙도 달라서, 아이들로서는 다른 반을 방문하는 일이 참 즐거운 일이라고 합니다.


2) 버퍼존과 관련해서 가장 좋았던 것은 Vorkurs라는, 초등학교 예비반입니다. 만 5세가 되면 이듬해에 초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나이가 되므로 이 프로그램을 시작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 초등학교에 가서 한 시간 정도 수업도 하고 선생님과 새로운 친구들도 만나는 그런 과정이에요. 원래는 독일어가 좀 느리거나 외국에서 온 아이들을 대상으로 만든 특별 프로그램이었지만 이제는 누구나 하는 일반 프로그램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아이들은 서서히 학교라는 곳을 받아들이고, 선생님들과 친구들도 차츰 알게 되고, 스스로 학교 수업을 받을 준비가 되었는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유치원과 학교가 긴밀히 팀을 이루어 이 과정을 수행하는데요. 아이들 인솔도 유치원에서 담당해주시고 유치원에서도 그들만의 Vorkurs를 따로 진행합니다. 즉 저희 아이는 화요일에는 학교에서 한 시간, 목요일에는 유치원에서 한 시간, 이렇게 학교 수업에 적응할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처음 Vorkurs를 시작한 날, 숙제 책이 너무 좋아서 손에 꼬옥 들고 집까지 간 첫째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독일 초등학교는 만 6세가 되었다고 일괄적으로 보내는 게 아니라, 아이가 준비가 되었는가의 여부를 다각도로 따집니다. 의사 선생님이 아이가 수업받는 데 지장이 없는지 신체적 상황을 꼼꼼하게 체크하고, 전문가들이 한 시간 가량 관찰하면서 아이들이 어떻게 놀고 질문에 반응하는지 체크하는 시간(Unterrichtsspiel)도 따로 있고요.


신체발달이나 학습능력과 상관없이 아이가 마음의 준비가 더 필요하면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싶어 하는지의 여부도 중요하게 따진다고 해요.

너무나 키도 크고 똘똘한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고 유치원에 우르르 남아있는 걸 보고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는데, 알고 나니 꽤 좋은 제도가 아닌가 생각해요.

뭐든지 준비가 잘 되어서 자신감이 생겼을 때 시작하는 건 정말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1월에는 초등학교에서 Kleine Forscher(Little researchers)고 해서, 신청한 친구들에 한해서 초등학교 1학년 선배들(귀엽지 않을 수 없다)과 함께 팀을 이루어 "헤엄치는 달걀, " "젤리 곰의 모험" 같은 각종 과학 프로젝트를 4회 진행하는 기회도 있었는데요. 아이가 굉장히 좋아했어요. 졸업한 유치원 친구들도 만나고, 실험도 재미있었다고요. 아이들이 새 환경에 잘 섞일 수 있도록, 또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새로 들어 올 친구들을 돕고 환영할 수 있도록, 학교에서 많이 신경 쓰는 느낌이에요.

그 때 했던 관찰일지. 무슨 씨앗도 심은 듯 합니다.

이런 것들을 할 때 유치원 선생님이 인솔해서 데려가고 데려오고, 그러면서 학교 선생님들과 유치원 선생님들이 애들이 문제없이 잘하고 있는지 서로 이야기도 나누고, 학교에 관련된 서류나 전달사항은 유치원을 통해 모두 전달할 수 있고, 이렇게 유치원과 학교가 잘 연결되어 있는 점이 저는 굉장히 좋았습니다.


3. 스스로 평가하게 한다


관찰일지 오른쪽 사진에 보면 아래에 얼굴 표시가 세 개 있는데요. 이건 쉬웠다, 이건 조금 시간이 걸렸다, 이건 도움이 필요했다. 이렇게 스스로 판단하는 칸이에요.


독일 교육에서 또 한 가지 좋은 점.

뭐든지 스스로 평가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유치원은 숙제가 없지만 초등 예비반에 가면서 일주일에 한 페이지씩 숙제를 받아오기 시작했는데, 페이지마다 꼭 자기가 판단하는 칸이 있어요. (아래 사진의 원숭이 얼굴)

어려웠어도 무조건 웃는 얼굴에 표시하는 자식 놈과 가끔 엄청난 실랑이를 벌입니다

학교 예비반에서 주는 설문에도 예를 들어 “아이가 규칙을 잘 지킬 수 있나요?”라는 질문에 왼쪽은 부모님의 의견, 오른쪽은 아이들 자신의 의견을 기입하게 되어 있어요. 어려서부터 스스로 평가할 수 있게 한다는 점, 나에 대한 판단을 타인이 아니라 스스로 하게 한다는 점은 정말 중요한 포인트인 것 같아요.   

학교 예비반에서 준 설문. 여기에도 늘 보던 얼굴 세트가.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낸 경험이 있는 지인의 말씀으로는 부모님이 오시는 학교 상담 시간에도 아이를 두고 부모와 선생님이 얘기하는 게 아니더라고 하시더군요. 부모는 거의 지켜볼 뿐,  내가 무엇을 잘했고 무엇이 조금 부족했는지, 그래서 앞으로는 무엇을 더 열심히 하면 좋을지를 거의 아이 스스로 판단해서 선생님과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그게 무엇보다 좋았다고 하시더라고요. 물론 효과도 236배쯤 더 좋을 것 같습니다.


4. 소박하다 


기본적으로 소박한 독일 문화는 유치원 안에서도 빛을 발합니다.
아래 사진은 Erntedankfest(추수감사 축제)를 위해 부모님들이 음식을 협찬해 줄 수 있는지를 묻는 리스트인데요. 오이 한 개, 빨간 파프리카 한 개, 포도주스 한 통, 이렇게 너무나 귀여운 것입니다. (참고로 독일은 과일을 비롯한 식료품 가격이 무척 싼 편입니다.)

김 씨 집안은 방울토마토와 포도주스 한 통을 협찬하기로 한다

작은 참여를 기대하고, 그 작은 참여마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한다는 것.

그래서 부모들은 흔쾌히 참여하고 즐겁게 돕습니다.

크리스마스에 선생님들에게 드릴 선물을 사려고 학부모들이 돈을 걷어도, 반대표 학부모의 아이 자리에 조그만 자루를 걸어놓고 익명으로 1-2유로씩(귀엽다) 넣도록 하더군요. 뭔가 크리스마스에 홍길동이나 임꺽정이 된 듯한 느낌.


 소박함 관련해서 제가 독일 교육에서 두 번째로 좋아하는 점은 좋아하는 것을 쉽게, 많이 주지 않는 점인데요.

미국은 어른이 아이들에게 사랑과 정열을 다 바쳐 아이들을 미소 짓고 행복하게 하는 문화였다면, 독일은 애들이 참 수수하게 자라게 하는 문화라는 생각이 들어요.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과시하지 않고 소박하게 사는 문화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미국도, 우리나라도, 아이들에게 뭔가 어메이징한 것을 제공하고 그들의 기뻐하는 모습에 흐뭇해지는 그런 문화 아닌가요. 그것도 사랑스럽지만, 이 곳은 작은 것을 크게 생각하고 별 거 아닌 것에도 기뻐하게 만드는 그런 문화인 것 같습니다.

(부모로서는 감사함이 조골세포로부터 절로 나오는 문화로다)

3년째 살아보니 여기는 애들이 감자튀김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거라고 생각하며 자라는 것 같고(사실 독일 음식 중에 겁내 맛있는 건 맥주뿐인 것 같은 건 비밀... 그러나 맥주를 하염없이 마시다 보면 모든 음식이 다 맛있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기 때문에 괜찮은 것도 비밀...), 유치원에서 생일 파티를 해도 소시지와 요거트를 가져와서 나눠 먹거나, 아이스크림을 돌리거나, 머핀 하나씩을 나눠 먹습니다. 그게 너무너무 신나는 일인 거예요. 그렇게 자라기 때문에 작은 것에 크게 기뻐하고 감사하게 되지요. 좀 심심하고 촌스러워 보여도, 저는 기본적으로 아이들이 이렇게 크는 것에 찬성입니다.


큰아이가 있는 파랑반을 예로 들면, 생일 파티를 하면 선생님들이 직접 만든 왕관을 씌워 주고 그 날 하루는 왕이 되어서 아이가 하고 싶은 건 무조건 하게 해 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치원으로부터 미칠 듯이 작은 조그만 선물을 하나 받아옵니다. 사진으로 보시듯 첫 해에는 생일 축하 노래가 나오는 손가락만 한 수동 오르골을, 다음 해에는 해마를 찍을 수 있는 미니 펀치를 받아왔어요. 친구들은 아이에게 생일을 축하하는 그림을 한 장씩 그려주고, 선생님은 그걸 예쁘게 책처럼 묶어서 아이에게 주는데 그게 2018년 아이의 보물 1호였습니다. 밤에도 갖고 잠자리에 들만큼 아낀 나머지 너덜너덜 닳아버렸죠. 작은 것이나 정성이 들어간 것을 선물하고, 돈이 들지 않더라고 즐거운 경험을 하게 해 주는 이런 문화는 참 고맙고 다정하게 느껴집니다.

왕관은 집에서 가끔씩 맥락없이 쓰고 놉니다 + 작은 선물들 + 생일에 몬스터가 있는 마법 지하실을 갖기 바란다는 루이자의 그림 + 닳아빠진 첫 해의 생일북

지금은 Fasching이라는 카니발 기간인데요. 이때에도 파티를 합니다. 집집마다 자유롭게 어떤 음식을 가져올 수 있는지 묻는 리스트에 케이크를 굽거나 머핀을 만들어오겠다는 집도 있지만 팝콘을 한 그릇 튀겨온다는 집, 미니 당근 한 팩을 가져온다는 집, 모두 소소하고 즐겁게 참여하는 모습이 좋아요. 물론 꼭 참여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저는 올유치원 테마가 <Zauberhafte Märchenwelt(Magical fairytale world)>여서 딸기로 빨간 모자 아가씨를 제작해 보냈습니다. (저희 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은 매 해 다른 테마로 운영됩니다. 첫 해에는 음악과 소리, 두 번째 해에는 전 세계의 여러 나라, 올해는 동화 나라. 이 부분은 다음에 다시 설명드릴게요.)

사서 고생하는 타입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걸 생각해 보고 만드는 걸 되게 좋아해요.

여기서 또 한 가지.
좋아하는 것을 쉽게, 많이 주지 않는 문화이지만 축제만큼은 예외라고 해요. 원하는 것을 마음껏 먹고 즐기는 날이라서, 이 날만큼은 젤리도 과자도 제한 없이 즐기게 해 준다고 합니다. (평소에 무뚝뚝하고 단정하고 까칠한 독일인들이 유독 옥토버페스트 때 엉망진창인 점을 여기서 이해할 수 있었... 흠흠.)


5. 평소에 집에서 하는 일들을 자연스럽게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이건 유치원 일과와 관련된 부분인데요.

요일별로 다양한 활동을 구성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평소에 우리가 집에서 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모양입니다. 요리도 하고, 배터리도 갈고, 일도 돕고 그러면서 노는 듯해요.
사는 법을 배운다는 느낌입니다. 아니면 생활의 기술을 배운달까요.


어린 둘째가 아침에 종종 엄마 아빠와 떨어지기 싫어할 때, 선생님의 마법 같은 말씀에 반 안으로 조르르 빨려 들어가곤 했는데요. 주로 이런 말씀이었습니다.
"선생님 좀 도와줄래? 장난감 배터리를 갈아야 하는데, 이음이가 드라이버로 잘하지! 같이 해 줄래?"

"지금 파울리나랑 같이 당근이랑 사과 씻을 건데 이음이도 갈래? 우리 좀 도와주면 좋겠는데."

"우리 오늘 쿠키 구울 건데, 부엌에 밀가루 받으러 같이 갈까?"

"이따가 마당에서 땅에 떨어진 사과 주워 담고 같이 낙엽 청소할 거야. 이음이 좋아하는 도토리도 주울 거야!"

(참고로 도토리는 바구니에 잔뜩 주워 담은 뒤 펜치 같은 도구로 애들이 껍질을 스스로 깨서 알맹이를 먹습니다. 아이를 데리러 갔더니 새끼돼지마냥 홀라당 홀라당 날도토리를 먹고 있는 모습에 처음에는 잠시 당황.)


학습도 이루어지지만 주가 되는 것은 노는 것, 그리고 생활의 기술을 배우는 것이라는 느낌입니다.

반마다 오븐과 싱크대가 있어서 같이 요리도 하고 쿠키나 빵도 굽고요.

싱크대 앞에는 넓은 발판을 만들어 두어서 아이들이 직접 무얼 씻거나, 먹은 접시나 컵도 닦는 모양입니다.

오른쪽에 보이는 오븐. 그 옆에 싱크와 식기세척기가 있습니다.

저희 아이는 유치원에서 과일 씻기와 설거지를 배워왔습니다.

(어머나 너 이 자식)


먹은 접시를 개수대에 놓는 건 가르쳤지만 설거지를 벌써부터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은 아직 못 했는데, 집에서 자기가 간식을 먹은 접시를 깨끗하지 않게(......) 씻어서 식기세척기 안에 둔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요.(반에서 식사 후 반마다 식기 세척기를 스스로 돌리는 시스템이니, 아마 큰 덩어리들만 대충 물로 헹궈서 식기 세척기 안에 넣는 법을 배운 건 아닐까 싶더라고요. 어쨌든 엄마는 흐뭇.)
경험해 보니, 단어 하나를 더 배워온 것보다 이런 것을 배워 오는 게 더 흐뭇하더이다.  


듣자 하니 초등학교 저학년에서도 국어 시간에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것 중 하나가 레시피를 적는 법이라고 합니다.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가 엄마에게 디저트를 만들어 주어서 행복했다고도 하고요. 생각해보니 레시피를 잘 적는 법은 언어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종합적인 교육이 되는 좋은 아이템 같아요.


인스트럭션을 잘 따라 하는 법을 배우고 먹고사는 일을 기본적으로 중요하게 배우는 것, 저는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너는 공부만 잘하면 된다는 가풍에서 자랐는데요. 이게 참 감사하지만 감사할 수만은 없는 일인 것 같더라고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홀로서기를 잘할 수 있는 법을 배우는 일은 심오한 철학이나 어려운 수학 문제를 이해했을 때 느끼는 기쁨보다 중요할 수 있으니까요.


앞서 1번에서 언급한 섞임과 관련해서, 연령별 반편성을 선호하는 입장에서는 교사들이 수업할 때 아이들 능력 편차가 많아 힘든 부분이 있다는 점을 내세운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맞는 말이기도 하죠. 그맘때의 꼬꼬마들은 한 달 차이로도 할 수 있는 일들이 확확 달라지니까요. 하지만 유치원이란 곳이 학습이 주가 되는 곳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먹고 놀면서 시간을 보내는 곳이고 이렇게 어울려 살아가는 법을 주로 익히기 때문에, 별 무리 없이 각자의 능력껏 보고 배우고 서로 돕게 가능한 것 같습니다. 4세 이상은 따로 인형극을 관람하러 가기도 하고, 5세 이상은 따로 좀 더 멀리 소풍을 가거나 Vorkurs를 진행하는 등 연령대의 아동들도 배려하면서 진행하는 데다, 무엇보다 보육교사들이 있어 어린아이들을 챙기면서 담임 선생님의 지도를 돕기 때문에 별 무리 없이 잘 돌아가는 것 같네요. 터울이 있는 아이들을 섞어 두려면 확실히 반마다 선생님이 적어도 두 분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우리나라 보육시설에서도 이런 점을 한 번 고려해 보면 어떨까 하는 점을 열 가지 정도 추렸는데, 글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여기서 자르고 2부로 나누어 쓰도록 하겠습니다.


다 잡혀간다고 생각했던 코로나 바이러스가 급속도로 퍼지고 있어 정말 걱정이에요. 평범한 일상이란 실은 얼마나 많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떠받치고 있어 줘야 가능한 일인지, 그리하여 평범한 일상이란 실은 얼마나 특별했던 것인지 깨닫는 요즘입니다. 인간을 통제한다는 일이 얼마나 까다롭고 어려운 일인지도요. 위기에 강한 시민들이니 잘 헤쳐갈 것을 믿습니다. 간절한 마음 보탭니다. 모두들 조심하세요.

아윌비백. 유치원 우산 걸이에 걸려있던 탐나는 가방.

(다음 편에 계속)

https://brunch.co.kr/@jinmin11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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