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의 사무실들-1 | London
집과 호텔, 미술관, 카페들, 상점에 이어서 일하는 공간들에 대한 기록이다. 오래도록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첫 이국의 사무실, 매일 구름다리를 건너 다녔던 오래된 샵 하우스 위의 사무실, 서점과 꽃집, 카페와 다이닝, 중정로 둘러싸인 근사한 반경을 사랑했던 어떤 일터의 장면들까지. 지금껏 거쳐간 곳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무실과 그 반경에 대한 기록이다.
쇼디치의 건축 사무실
55 Curtain road, Hackney, London
그곳은 사방이 차가운 금속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대표 소장의 시크한 성격만큼이나 차가운 스테인리스로 금속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스틸로 된 책상과 핀업 벽, 슬라이딩 수납장, 팬트리의 가구들은 세상에서 가장 기능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얀빛을 내뿜는 형광등, 하얗게 칠해진 사방의 벽면, 스틸 가구와 회색빛 콘크리트 바닥으로 공간 전체를 설명할 수 있었다.
이곳은 내가 경험한 첫 이국의 사무실이었다. 학부 여름방학 동안 인턴으로 일했던 런던의 한 건축사무소이다. 베이지색 벽돌로 되어있던 그 건물은 쇼디치의 한 큰 길가에 위치해있었다. 1층은 길가에서 유리창을 통해 그 안이 들여다보였는데, 그 공간은 평소 비워두면서 건축모형 등을 전시해두는 곳으로 사용했다. 한켠에는 외부 미팅 용도로 쓰는 테이블과 작은 팬트리가 있었다. 그곳을 지나쳐 계단을 따라 오르면 2층에 사무실이 있었다.
입구 쪽에는 커피를 내려먹을 수 있을 정도의 간단한 팬트리가 있고, 도면과 각종 작업물을 펼쳐놓는 커다란 작업대가 있었다. 안쪽으로는 책상이 줄지어 놓여있었다. 한쪽 벽면은 전체가 핀업을 할 수 있는 긴 슬라이드 벽장으로 되어있었는데, 방 안의 모든 가구들과 마찬가지로 차가운 직선의 결을 가진 금속으로 되어있었다. 3층은 예전에는 사무실로 썼지만 현재는 비어있었는데, 종종 그 빈 공간에 올라가 점심을 먹곤 했다. 이곳은 다 함께 모여 점심을 먹는 일이 거의 드물었다. 일을 하면서 각자 책상 위에서 점심을 챙겨 먹는 식이었는데, 나는 그 대신 3층의 빈 사무실에 올라가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잠시 숨을 고르곤 했다. 꼭대기 층에는 올라가 보지 못했지만, 대표가 살고 있는 공간이라고 들었다. 그는 새로운 공동 파트너가 된 새 부인과 함께 아침마다 계단을 따라 걸어 내려와 2층의 사무실로 출근하곤 했다.
내가 처음으로 경험한 회사라는 공간이자 이국의 사무실이었던 이 곳은 Alejandro Zaera Polo라는 스페인 출신 건축가의 사무실이었다. 그는 큼직한 프로젝트들을 진행한 저명한 건축가이자 교수이고, 전 부인과 함께 오랫동안 공동 파트너로 회사를 운영했었다. 그러다 그즈음 부부가 갈라서면서, 새 부인과 공동 파트너로 회사를 다시 차렸다. 당시에 사무실은 절반의 인원이 빠져나간 뒤라 휑한 분위기였다. 아마도 그런 어수선하고 예민한 시기여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은 내게 이국의 사무실에 대한 첫인상과 선입견을 심어주었던 곳이다. 대표 소장을 포함해 직원들은 그 인상에서부터 합리적이고 철두철미한 성격이 느껴지는 건축가들이었는데, 살가움이나 다정함과는 아무래도 거리가 멀다고 느꼈다. 모든 이국의 사무실이 모두 이렇게 외로운 공간이라면 외국에 나가 일하려던 생각은 접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기억은 때로 어떤 공간의 장면을 껴안는다. 그리고 더 강력한 잔상으로 남는다. 첫 직장생활의 겁먹고 초조했던 마음은 차갑고 단단한 질감으로 가득 찬 공간 안에서 더 또렷한 기억으로 남았다. 10년 전의 기억이지만 아직도 꽤 선명하다. 혹시 그 공간이 좀 더 다정한 모습이었다면- 발 밑에는 차가운 콘크리트 대신 나무 바닥이 깔려있고, 블라인드 너머로 직선의 햇빛이 새어 들어오는 대신에 천 커튼 사이로 햇살이 배어들어왔더라면, 스틸 대신 따뜻한 질감의 가구들로 차 있었다면 그 이국의 사무실에서 느꼈던 감정이 조금은 말랑했을까 하고 문득 궁금해진다. 공간은 내게 기억의 가장 강력한 조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