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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n Oct 18. 2020

미술관의 카페들-2

우아하고 다정한 공간의 장치들  |  Kafeteriasmk

여행지에서 본 것 중에서 한참이 지난 뒤에야 내 것으로 소화되는 것들이 있다. 그럴 땐 기록하고 싶어도 생각이 내 것이 되지 않아서 설익은 문장들만 나온다. 여행지에서는 막연히 좋다는 느낌만 받았고 왜 좋은지는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없었다. 그럴 때는 생각이 베이킹될 때까지 무의식 속에 묵혀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셰프의 인터뷰


코펜하겐에서 마지막 날 엄마와 점심을 먹었던 곳은 국립미술관에 딸린 카페였다. 그 공간은 특별히 멋을 부리지 않은 듯 보였지만 우아하고 근사했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모두 편안해 보였다. 어떤 공간에 처음 가면 낯설게 느껴지기 마련인데, 그런 긴장감도 금세 풀어지는 편안한 장면이었다. 기분 좋은 북적임과 활기가 넘쳤고, 그곳의 음식들은 담음새가 아름다웠다. 신선하고 싱그럽고 따뜻하고 온기가 느껴지는, 감각을 일깨우는 아름다운 음식들이었다.


최근에 공간에 대해서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글 중 하나는 건축가도 디자이너도 아닌 어떤 셰프의 인터뷰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한참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매거진 B에서 JOBS라는 단행본을 통해 직업을 한 가지씩 다루기 시작해서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는데, 두 번째 에디션에서는 셰프라는 직업을 다룬다고 했다. 나는 음식을 잘 만들 줄 모르고 미식을 즐기는 사람도 아니지만, 음식을 다루는 공간과 음식을 다루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항상 눈길이 갔다. 그래서 책이 나오기 전부터 기대하고 있었다.


마침내 책을 사서 펼쳐보았다. 프레드릭 빌레 브라헤라는 한 셰프의 인터뷰로 시작되었다. 그가 요리를 통해 추구하는 가치와 태도의 결이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며 읽고 있었다. 그러다 거짓말같이 내가 다녀온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훅 치고 들어왔다. 아, 하고 무릎을 탁 쳤다. 무의식 속에서 잠자고 있던 생각이 깨어나서 책의 문장과 연결되는 기분이었다.


2018년에 당신이 문을 연 덴마크 국립 미술관의 카페테리아 Kafeteria의 중앙에 10명이 족히 앉을 만한 긴 테이블을 놓은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을까요?

[...] 이 고풍스러운 건물 안으로 대리석 테이블이나 샹들리에가 아닌, 이사무 노구치의 종이 조명과 엔조 마리가 1970년대에 고안한 DIY 가구를 들인 데에는 정치적 의도가 있어요. 덴마크에서 예술은 사회 계층과 상관없이  모두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빈부격차가 점점 벌어지면서 현재 미술관 방문객이 예전처럼 다양하지는 않아요. 미술관이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임을 다시금 알리도록 카페테리아가 친근한 공간이었으면 했고, 이런 메시지를 전하는 데 엔조 마리의 가구만큼 적합한 것도 없었죠.
- 53p, JOBS 셰프 : 맛의 세계에서 매일을 보내는 사람


우아하고 다정함의 경계에 있는 장면들


공간은 평범한 입구를 지나서 시작된다. 안으로 깊게, 그리고 길게 펼쳐져있다. 공간으로 걸어 들어가다 보면 양 옆에 놓인 조각상과 게이트를 연속해서 지나게 된다. 그 게이트 아래를 지날 때마다 어떤 스틸 장면의 프레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게이트를 경계로 해서 공간은 세 덩이로 나뉘어진다. 입구에 가장 가까이에는 라운지 같은 공간이 있다. 사람들은 거기에서 소파에 늘어져서 쉬고, 식사를 하기 전후로 누군가를 기다렸다. 라운지를 지나서 안으로 들어가면 식사를 하는 다이닝 공간이 본격적으로 나왔다.


그 공간의 중앙에는 다음 공간으로 이어지는 긴 통로가 계속 나있고, 그 동선에 살짝 빗겨서 길다란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10명 정도는 둘러앉을 수 있을 정도의 커다란 커뮤널 테이블이었다. 서로 일행이 아닌 듯 보이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한 테이블에 섞여 앉아서 식사를 하고, 모두 대화에 한창인 모습이었다. 창가 쪽에는 짙은 초록빛의 식물들이 놓여있었다. 떡갈나무와 고무나무, 셀렘 등이 주황색 토분에 심겨져있었다. 그 모습이 싱그러웠고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는것 같았다.


공간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게이트 아래를 지날 때마다 어떤 스틸 장면의 프레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창가 맞은편 벽면은 진한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붉은색 부스 소파가 그 벽을 따라 길게 나있었다. 소파 앞에 테이블과 함께 놓인 의자들은 어딘가 투박한 모습이었다. 내가 보지 못하고 지나친 걸 눈썰미가 좋은 엄마가 먼저 알아보고는, 저 의자들이 왠지 예사롭지 않다고 말해주었다. 나무판을 조각조각 이어서 만든 투박한 모습이었는데, 흔히 레스토랑에서 보는 매끈하고 세련된 모습의 의자와는 어쩐지 달라 보였다.


천정은 약간 완만한 돔 형태로 되어있었다. 그 높이가 꽤 높아서 창가의 반대쪽 벽면까지도 햇빛이 제법 깊숙이 들어왔다. 머리 위에는 종이로 만든 조명이 오브제처럼 여기저기 걸려있었다. 종이가 주는 그 특유의 따뜻한 재질감과 그 안에 부드럽게 비치는 노란 불빛, 그리고 천정에 구름같이 둥둥 떠있는 그 모습이 캐주얼하지만 우아해보였다.


다이닝 공간을 지나서 한번 더 게이트를 통과하면 식사를 주문할 수 있는 바 카운터가 나왔다. 스틸 상판과 회색빛의 나무로 만든 카운터가 단단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군더더기 없이 기능에 충실한 모양이었지만 차가운 인상을 주지는 않았다. 그 위에 헤이Hay스러워 보이는 따뜻하고 위트 있는 색감과 질감을 가진 식기들이 포개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위에는 어김없이 구름 같은 조명들이 떠있었다. [헤이 Hay : 아름답고 합리적인 제품을 선보이는 덴마크의 리빙/라이프스타일 브랜드]


공간에서 상징적이라고 할 수 있는 긴 커뮤널테이블과 엔조마리의 의자, 구름같이 떠 있는 조명들


우아하고 다정한 공간의 장치들


너무 화려하고 힘이 잔뜩 들어가서 사람을 압도하는 공간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 안에 있자면 왠지 작아지는 기분이 들고, 내 행색이 초라한 건 아닌지해서 자꾸 주변을 살피게 된다. 그래서 유행하는 핫플레이스를 잘 찾아다니지는 않는 것 같다. 대신 결이 맞는 곳을 찾아내서 계속 가는 편이다. 일을 하다 보면 잔뜩 멋 부린 공간에도 가봐야 하고 설계해야 할 때도 있지만, 나의 개인적인 성향과는 조금 거리가 멀다.


국립미술관이라고 하면 그 나라의 아트 신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상징성을 생각해볼 때 그 자리에는 카페테리아 대신에 그 도시의 미식 수준을 뽐낼 파인 다이닝을 넣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대신에 문턱이 낮은 카페를 미술관 1층에 넣은 것, 그리고 모두에게 열려있는 다정한 공간이지만 그 안에서의 식사가 근사하고 아름다운 경험이 되도록 만드는 적절한 공간의 장치들을 심어둔 것- 이것이 내가 그토록 찾고 있었던 ‘좋음’의 구체적인 이유였다는 것을 알았다.


Kafeteriasmk에는 공간을 다정하고 우아하게 만들어주는 장치들이 곳곳에 녹아있다. 프레드릭 브라헤는 디자이너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공간에 딱 그만큼으로 충분하고 적절한 가구와 조명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화려한 샹들리에 대신에 노구치의 조명을, 그리고 대리석 테이블 대신 엔조 마리의 가구들을 택했다는 대목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특히 놀랐다.


내가 엔조 마리의 가구를 처음 본 것은 몇 년 전 동대문 디자인플라자(DDP)의 개관전시에서였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큰 감흥이 있지 않았다. 디자인을 다루다 보면 워낙 많은 가구들을 접하게 되고, 그중에서 하나일 뿐이었다. 그저 이런 것도 있구나 했다. 그리고 코펜하겐에서 이 투박한 가구를 다시 보았을 때 그때 봤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을 뿐이다. 엔조 마리의 가구는 형태보다도 그 이면에 깔려있는 사람중심적인 메시지가 주는 의미가 크다. 모두를 위한, 모두가 만들 수 있는, 나무판자와 못만 가지고서도 만들 수 있는 가구를 설계했고, 디자인의 사회적인 역할을 이야기했던 사람이다.


프레드릭 브라헤가 ‘요리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음식을 통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Hospitality(환대)인 것, 아름답고 몸에 이로운 음식을 먹는 일이 특정 사회계층의 전유물이 되지 않도록 하는 사회적 의무감을 가진 셰프인 것’ [JOBS CHEF/ 50, 55p]을 생각하면,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엔조 마리의 가구들은 더도 덜도 아닌 딱 적절한 공간의 장치였다.


그가 바라는 장면들이 이 공간에 온전히 담겨있었다고 생각했다. 나에게도 다정하고 편안한 식사였다.




감각을 일깨우는 아름답고 건강한 음식들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경력을 쌓고 브런치 카페를 연 셈인데, 이런 저의 선택을 의아하게 생각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당시 제 바람은 고가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과 가격이 싼 대신 품질도 바닥인 패스트푸드점으로 양분되어 있던 코펜하겐 외식 신에서 중간 지대를 다지는 것이었어요.”
(브라헤가 운영하는 다른 레스토랑인 아틀리에 셉템버 Atelier September에 대한 인터뷰 중에서.)

- 53p, JOBS 셰프 : 맛의 세계에서 매일을 보내는 사람

 

신선하고 싱그럽고 따뜻하고 온기가 느껴졌던 아름다운 음식들
영혼의 감자수프 같았던 따뜻하고 깊은 맛의 수프
프레드릭 브라헤의 인터뷰가 실려있던 JOBS CHEF
어떻게 기록할지 고민하다가 공간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레이아웃과 섹션으로 남긴 기록. 길다란 커뮤널테이블 씬과 구름처럼 떠 있던 조명들을 담기 위함이다.

——


미술관의 카페들에 대한 다음 글 :

미술관의 카페들-3  |  malmokonsth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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