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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n Sep 11. 2020

런던의 다락

100년 된 빅토리안 하우스에서 지낸 여름  |  London


  2011년 여름밤, 나는 런던 동쪽의 Brockley라는 조용한 동네의 주택가에 도착했다. 빅토리아 양식의 주택들이 줄지어있는 고요하고 적막한 동네였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현관문 두 개가 나란히 보인다. 건물 전체가 한 집인 줄 알았는데, 위아래로 집주인이 다른 모양이다. 오른쪽 문을 열고 계단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3층 다락에 짐을 풀었다.


———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 동안 건축사무소에서 인턴으로 일하기 위해 런던에 왔다. 이 집은 같이 온 학교 선배의 지인이 살고 있던 집이다. 처음에는 잠시만 신세를 지기로 하고, 주말마다 집을 구하러 다녔다. 하지만 물가가 높은 런던에서 집값과 교통편 기준으로 찾아다니다 보니, 입구부터 쇠창살이 쳐져있는, 왠지 딱 보기에도 위험해 보이는 동네의 공공아파트들을 서성이고 있었다. 에어비앤비가 흔해지기 전이라 단기간 동안 살 집을 구하는 일이 낯설던 시절이었다. 때마침 그 지인분과 함께 살던 룸메가 최근에 독립해나가면서 집에 여유공간이 생겼고, 함께 인턴 하러 온 선배와 공간을 나눠 쓰면서 집세를 드리기로 하고 그 집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렇게 런던에서 두 달 동안 지내게 된 집은, 100년 정도 된 빅토리안 하우스였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현관문 두 개가 나란히 보였다. 공동 현관을 기준으로 아랫집은 지상층에서 시작해서 아래로 걸쳐져 있고, 내가 살았던 윗집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가파른 계단을 한층 올라가서 시작되었다. 그 계단을 오르면, 또다시 문이 나왔다. 벽에 열쇠를 걸어두고서 문을 한번 더 열고 들어가면 전실이 나온다. 여기서 몇 걸음 앞에는 부엌이, 뒤돌아 다섯 계단 정도를 더 오르면 반개층 위에 거실 겸 서재와 방 하나가 있었다.


  부엌은 2인용 나무 식탁과 싱크대, 냉장고, 식료품을 두는 선반 등으로 가득 차 있어서 제법 밀도 있는 공간이었다. 식탁 너머로 창이 나있었고, 아랫집의 정원 일상이 내려다보였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면 셋이 식탁에 모여 앉아 저녁을 먹었다. 식탁 위에는 항상 주인 언니의 애정이 담긴 음식들이 오르곤 했다. 언니의 음식들은 지루하지 않고 위트가 있었다. 하루 종일 잡고 있었던 긴장의 끈을 살짝 풀어놓고 집으로 돌아가는 퇴근길에, 매일 소소한 기대감을 가져다주었다. 어떤 날은 따뜻한 밥에 김가루를 뿌리고 차가운 녹차를 부어 오차츠케를 훌훌 말아먹었고, 어떤 날은 고등어를 굽고 잘게 찢어서, 채 썰어둔 여러 가지 채소와 함께 밥을 구운 김에 싸서 간장을 콕 찍어먹었다. 밤늦게 도착한 첫날에는 자기 전에 간단히 요기하라고 영국식 오트밀 포리지를 내어주었는데, 처음 먹어본 맛이 낯설어서 목구멍으로 흘러 삼키듯 넘겼던 그날 밤의 첫인상이 기억난다.


———


  주방을 등지고 돌아서 반개층을 오르면, 거실 겸 서재로 가는 길목이 나온다. 그 길목의 오른쪽에는 언니의 방이, 왼쪽으로는 위층 다락방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다. 좁고 가파른 나무 계단이었는데, 오른손에는 손잡이를 잡고, 왼손으로는 벽돌벽을 더듬어가며 올라가면 그 끝에 다락방이 있었다.


  다락방에는 문이 없는 대신에 앞뒤가 뚫린 나무 선반 하나가 계단 난간에 기대서 우뚝 서 있었는데, 그 선반은 마치 나에게 방문과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있었고, 그걸 맨발로 밟는 느낌이 낯설었다. 창가 바닥에는 매트리스가 놓여있었다. 그 머리맡에는 발레 튀튀 스커트가 걸려있었는데, 그 장면이 낭만적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문이 없이 뻥 뚫린(!) 욕실이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 샤워를 할 때면 방을 내어주고 아래로 내려가서 피해있곤 했다. 문이 달려있던 흔적도 없었다. 굳이 문을 달지 않고 나처럼 지냈을 사람들의 모습이 왠지 상상되어 귀엽기도 하고 웃음이 나왔다.


  다락방에 남겨져 있었던 물건들은 나의 상상의 재료가 되었다. 머리맡에 걸린 튀튀 스커트, 골동품같이 낡아 보이는 철제 선풍기, 룸메가 남기고 간 책 몇 권과 같은 물건들이, 방 곳곳에 마치 다락방이 가진 기억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그 물건들을 보면서 한 번도 만난 적 없었던 언니의 룸메가 어떤 사람일지 상상하곤 했다. 그리고 100년 전, 다른 시대적 배경 속에 살았을 누군가가 이 다락방에서 어떤 옷을 입고 있었을지, 그때는 어떤 가구들이 방을 채우고 있었을지, 아래층에 부엌과 거실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했다.


  내가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지붕과 숲의 지평선을 내다볼 때에도, 왠지 아주 오래전에도 누군가 창가에 앉아 같은 장면을 보고 있었을 것 같았다. 지붕으로 난 천창을 비스듬히 열어놓고 빨래를 널어놓던 일상처럼, 다락방 안에서 보내는 소소한 시간들이 모두 내가 어떤 소설 속 시공간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다락방 안에서는 항상 비밀스럽고 내밀한 시간이 흘렀다.


이젠 지붕 밑 방이 없을지라도, 다락방이 망실되었을지라도, 그렇더라도 여전히 우리들이 어떤 지붕 밑 방을 사랑했으며 어떤 다락방에서 살았다는 사실은 남을 것이다. 우리들은 밤의 꿈속에서 그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  물론 그 다락방을 너무 좁다고,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덥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와서 몽상을 통해 되찾은 추억 속에서는, 알 수 없는 기이한 융합으로 그 다락방은 작으면서도 크고, 더우면서도 시원하고, 언제나 기운을 되찾게 하는 것이다. "
/ 85p, 공간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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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생  나는 ‘공간의 시학이라는 책에 꽂혀서,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열심히 읽어보려고 애썼다. 지금 다시 펴본 책은 기억 속의 모습보다  난해하다. 어려운 어휘들에 부딪혀  문장  문장이 좀처럼 넘어가지지 않는  책을 읽고 읽으며 나름대로 이해하고 해석해보려 애썼다. 그중에서도 다락방에 관한 구절은 내가 가장 좋아했던 부분이다. 신비로운 기운이 감도는 다락방에 대한 추억과 맞물려서 내게  특별해진 구절이다.


  런던에서 지낸 다락방에 대한 기억은, 이제는 거의 10 전의 기억 속에서 꺼낸 공간이다. 아쉽게도 사진이   남아있지 않아 몸으로 기억하는 공간감에 많은 부분을 의존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약간의 픽션이 섞였을 수도 있을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오래된 기억을 되짚어 기록하다보니, 마치 내가 주인공인 소설을 쓰는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누군가 나의 문장들을 읽을 때면, 다락방으로 향하는 계단을 따라 함께 오르는 기분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내려갔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  공간의 문장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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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도착한 다음날 아침의 기록. 비닐봉지에 꼬깃꼬깃 담아온 생활도구와 간밤에 펼쳐서 필요한 것만 꺼내어 쓴 흔적
머리맡에 걸려있던 튀튀 스커트, 문없이 뻥- 뚫려있는 화장실, 그리고 지붕으로 나있는 천창
다락에서 창밖으로 보이던 풍경. 귀여운 굴뚝이 솟아있는 박공지붕과 숲이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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